# 115
헐리우드에 가고 싶은 사람들(5)
“옛날이랑 많이 바뀌었네. 말과 표정에 자신감이 생겼어. 이제 성공한 제작사 대표라 이거지? 축하해.”
유병세 감독은 치밀어 오르는 쓴물을 삼키며 차분히 말했지만 동훈은 그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떨리는 손을 보고서 알 수 있었다.
“선배님이 도와주신 덕분이죠. 많이 가르쳐주셔서 이렇게 운 좋게 흥행작을 쏟아낼 수 있었습니다. 선배님도 잘 되시겠죠. 첫 작품은 뭡니까? 궁금하네요.”
유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며 저 뒤에 서 있는 강석호 감독에게 아주 잠깐 시선을 주었다 말았다.
동훈은 그걸 보자마자 작은 탄성을 터뜨리며 물었다.
“아... 강석호 감독님이 첫 타자이신가봐요?”
“어? 어, 그래.”
“이야... 제가 강 감독님 밑에서 몇 년을 굴렀더라? 감독님! 반갑습니다. 왜 거기서 그러고 계세요? 앞으로 나오세요. 아유, 축하드립니다. 제작 들어가신다구요?”
동훈은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했다.
강석호 감독 역시 떨떠름한 얼굴로 어쩔 수 없이 나섰다.
“그, 그래.”
“어떤 영화입니까?”
“뭘 그걸 궁금해 해? 네 영화도 아닌걸?”
“워낙 배울점이 많은 감독님이시니 어떤 작품을 할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그러고 보면 제가 감독님한테 욕 진짜 많이 먹었는데. 아는게 너무 없었죠?”
주변 감독들의 시선이 몰려있는 와중에 동훈이 대놓고 저러니 강 감독은 더욱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뭘 그런 소리를 해? 그리고 조감독때 욕 안 먹은 감독이 어딨어? 다 그렇게 배우는 거지.”
“그런가요? 이상하게 다른 조감독들에 비해 제가 더 많이 고생한 것 같기는 하던데... 어쨌든 강 감독님이 그렇게 생각하신다니까 할 말은 없네요. 조감독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주세요. 그러다 또 도망갈라.”
“...”
동훈은 인상을 쓰면서도 입을 못 여는 강석호 감독에게서 다시 유병세 감독에게 시선을 돌렸다.
“첫 제작 영화 성공하기를 바랄게요. 우리만 너무 잘 되면 미안하니까. 같이 잘 돼야죠.”
“자신감을 가지는 것도 좋은데 그러다 실수한다. 대한민국 사람들은 겸손하지 못한거 되게 싫어해.”
“그래서 그런 실수를 해도 말이 나오지 않게 계속 성공하려구요. 그럼 잘 되기를 바랄게요. 고생하세요.”
동훈은 유병세 감독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고는 몸을 돌려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비록 얼마 차이는 안 나지만 그래도 선배였는데 완전히 새까만 후배 취급하듯 격려를 하니 유병세 감독은 얼빠진 얼굴로 멀어져가는 동훈의 뒷모습만 쳐다볼 뿐이었다.
“와... 저 새끼 독하네.”
유 감독 옆에 서 있던 감독 하나가 놀란 듯 고개를 흔들며 혼잣말을 했는데 그만큼 방금 전 동훈의 모습이 놀라웠던 것이리라.
선배들이 모여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악의를 드러내며 쪽을 준건 둘 사이에 어지간히 많은 사연이 쌓여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지금 장동훈 감독이 충무로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지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누구 하나 나서서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동훈의 옆에 서 있던 양호민 감독이 이 행사에 모인 감독들 중에서도 상당히 높은 연배의 감독이었기에 더욱 나서지 못한 것도 있었다.
“이야... 장 대표, 다시 봤네? 난 우리 장 대표 너무 착하게 본 것 같아. 제대로 엿 먹이던데?”
양 감독의 너스레에 동훈이 빙그레 미소지었다.
“감독님이 곁에 계셨으니까 한 방 먹여준 겁니다. 혼자였으면 다른 감독님들이 건방지다 어쩌다 하면서 가만있지 않았겠죠. 감사합니다.”
“나야 장 감독이 유 감독이랑 강 감독한테 많이 당한걸 아니까 그냥 판만 깔아줬지. 그런데 석호 밑에서 얼마나 있었어?”
“두 작품 같이 했습니다. 대략 3년 정도 같이 일했죠.”
“두 작품? 석호가 그 전에 성적이 괜찮았나?”
“둘 다 크게 성공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는 손익분기점을 겨우 넘겼고 하나는 조금 손해였습니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좀 아쉽긴 했어도 계속 밀어줄만 했죠.”
“으음... 그런데 석호 쟤는 연출력은 그렇다 치고 주변에 사람이 없어. 쟤도 그걸 알아야 하는데...”
양호민 감독은 고개를 흔들고는 자신은 만날 사람이 있다며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양 감독이 자리를 떠나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윤재성 감독이 입을 열었다.
“진짜 아까는 속이 다 후련하더라.”
“아, 형도 강석호 감독한테 많이 디였죠?”
“말도 마. 하나하나 꺼내기 시작하면 사흘 밤낮을 이야기해도 모자르지. 그런데 나 궁금한게 있는데...”
“뭔데요?”
“헐리우드 영화 있잖아. 그거 정말 박광효 감독이 보조연출하는거야?”
“네.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할거예요.”
“와... 부럽다. 박 감독 얼마나 좋을까? 나라면 너무 설레서 사흘 밤늦을 잠도 못 잘거야.”
“사실 박 감독님도 그랬어요. 미국에 갔을 때 얼마나 좋아하시는지... 사흘 정도 지나니까 눈이 벌게지시더라구요. 잠을 못 자서. 뭐, 시차적응이 안 돼서 그럴수도 있구요. 하하하.”
윤재성 감독은 호탕하게 웃는 동훈을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다들 좋겠네.”
“형도 좋은 작품 만들면 곧 그렇게 될 겁니다.”
“그래, 그래야겠지.”
동훈은 그에게 어떤 작품을 준비하고 있는지 물어보려고 하다가 말았다.
왠지 이번에는 남들보다 자신의 작품에 더 신경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행사장에 머물며 의미 없는 수다를 나눈 동훈은 누구보다 빨리 빠져나와 사무실로 돌아갔다.
당장이라도 시나리오를 건들지 않으면 못 견딜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
한달 뒤, DH미디어.
동훈은 유지은 팀장에게 새로 만든 각본을 주고 난 뒤, 사흘도 안 돼 빈센트 리치 앤 컴퍼티로부터 작품을 하고 싶다는 연락을 받을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나 봐요. 한국으로 들어와서 자세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싶대요.”
유지은 팀장이 흥분해서 못소리를 높였다.
“그래요? 다행이네요.”
솔직히 내심 걱정했다.
이번 작품은 바로 김영웅 감독이 있었을 때 조금 애매하게 흥행했던 영화였기 때문이다.
바로 초능력을 기반으로한 액션 판타지 영화인 ‘마녀’였는데 한국이 아닌 미국을 배경으로 했기에 스케일은 굉장히 커졌고 세부적인 캐릭터는 조금 바뀌었다.
어쨌든 기본 구성은 거의 비슷했기에 과연 이걸 마음에 들어할지 궁금했는데 다행히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았다.
“헐리우드는 지금껏 많은 히어로물이 있어서 감독님 작품이 마음에 들지 저도 확신이 없었는데 반응이 좋아서 다행이에요.”
“다행이기는 한데 제작비를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국내 영화로 만들면 아무리 제작비를 많이 써도 최대 300억 이상은 굉장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천만 관객을 돌파한다고 가정했을 때도 제작사에서 벌어들일수 있는 수익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헐리우드에서 제작한다고 하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판매할 수 있기에 제작비는 수천억으로 뻥튀기 될 수 있다.
“배우를 한국 배우로 쓰실 건가요?”
“아니요. 헐리우드 배우 생각하고 있어요.”
“어... 그럼 천억 단위까지 올라갈 수 있는데...”
유 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혹스러워 했다.
지금까지 여러 영화를 흥행시키며 회사 통장에 빵빵히 현금을 쟁여놨다고 생각했는데 제작비가 천억 단위를 넘어서면 지금까지 벌어놓은 돈으로도 감당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투자사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최소 70% 이상은 투자를 받았으면 좋겠거든요.”
“70%요? 그걸로도 쉽지 않은데... 제 생각에 최소 80% 이상은 돼야 진행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천억이라는 것도 아직 누가 주연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인데다가 아직 세트장을 어디에 어떤 규모로 할지도 못 정했는데... 제작비가 예상보다 30%만 넘어도 300억이 추가로 들어야 해요. 이 정도면 투자사에서 90%는 해줘야 마음이 놓을 것 같은데...”
“90%는 그쪽에서 감당이 안 될 것 같지 않아요?”
“그래도 그 정도가 아니면... 일단 처음에는 강하게 나가봐요. 안 되면 줄여 보구요.”
“그래봅시다.”
그녀 말처럼 지금 회사에 돈이 많다고 돈을 마구 꺼내 쓰다간 안 될 것 같았다.
박광효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도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소요되는 자금이 있는 만큼 최대한 소모되는 자금을 줄여주는게 맞기는 했다.
다만, 나중에 영화 흥행이 됐을 때 들어올 수익도 줄어 드는게 마음이 아플 뿐이었다.
그런데 이틀 뒤 투자사에서 들려온 답변은 예상 밖이었다.
“투자는 90%가 아니라 전부 할 수도 있대요.”
유지은 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면서 자기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제작비가 얼마나 들 줄 알고?”
“대신 1억 달러까지만이래요. 한국돈으로 약 1,200억 정도인데 그 이상은 규모를 키우지 말아줬으면 좋겠대요.”
“흠... 사실 그 정도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했지 정말 1억 달러 이상으로 제작비를 키울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럼 캐스팅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어요?”
“역시 예상하고 계셨네요. 대표님이 예상하셨듯이 그쪽에서 캐스팅을 추천하는게 조건이라고 하셨어요.”
“주연배우를 자기네들이 결정하겠다...”
과연 누구를 생각하고 있길래 주연배우를 자기네들이 찍겠다고 했을지 궁금했다.
물론 한 두명의 배우를 무조건적으로 염두해두는 건 아닐 거였다.
첫 번째로 염두해두고 있는 배우가 스케줄이 있거나 거부한다면 두 번째, 세 번째 배우까지 생각하고 있을거다.
확실한건 어느 정도 스타성이 있는 배우가 아니면 흥행이 불확실하다는 것.
“누구를 생각하는지는 얘기 안 하더라구요. 자기네들도 아직 못 정했다고...”
“주인공을 여자에서 남자로 바꾸자고는 하지 않던가요?”
“그러지는 않았어요. 오히려 흑인 여성이 주인공이라도 상관 없냐고 물어보던데요?”
“흑인 여성? 뭐 상관은 없는데 혹시 흑인 여배우 누굴 생각하고 있나?”
“저도 똑같은 생각으로 물어보니까 일단 기준을 잡고 싶어서 물어본거래요.”
여배우가 흑인이 되든 백인이 되든 큰 상관은 없었다.
다만 매력적인 배우였으면 하는 바람이라 동훈이 봤을 때 별로라면 거부할 생각이었다.
어쨌거나 주인공의 성별을 바꾸지 않는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바꿔야 한다고 했다면 각본을 아주 많이 수정해야 했을테니 말이다.
“좀 괜찮은 배우였으면 좋겠네.”
“아, 그리고 빛그림 양지원 대표가 박광효 감독님 작품에 중국 자본을 투자 받는게 어떠냐고 하더라구요.”
“중국에 넣고 싶대요?”
굳이 중국 자본을 투자 받으려는 이유는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아마 중국으로 수출하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 거다.
“아무래도 처음 아시아 시장 확보 하려고 하다 보니까 수수료를 많이 챙기기 어려웠나봐요. 그래서 중국 시장을 생각한 것 같은데 양 대표가 안 되는걸 억지로 넣어달라는 뜻은 아니니까 너무 무리할 필요는 없다고 했어요.”
“가볍게 생각해달라?”
“네. 만약 진지하게 생각있으면 투자자는 양 대표 자신이 연결시켜 줄 수 있으니 그것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구요.”
“투자자까지 미리 준비해뒀다니 준비 많이 하셨네. 알겠습니다. 그건 천천히 생각해보죠. 급한건 아니니까.”
“네.”
이후 유 팀장은 투자사에 브리핑할 제작기획서를 작성하기 시작했고 동훈은 각본을 마무리했다.
일주일 뒤, 투자사인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에서 연락이 왔다.
투자 계약서를 작성하기 전, 주연 여배우를 컨펌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와... 제니퍼 로렌스라고?”
투자사가 능력이 있기는 한 것 같았다.
현재 헐리우드에서 최고로 핫한 여배우인 제니퍼 로렌스를 들이밀다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