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14화 (114/116)

# 114

헐리우드에 가고 싶은 사람들(4)

유지은 팀장은 나름 최선을 다해 유인선 작가와 합을 맞출 연출자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의외로 유인선 작가의 성향이 까다로웠다.

몇 명의 연출자를 입에 올렸음에도 유인선 작가는 그들의 이름을 듣자 고개를 흔들었는데 알고 보니 유인선 작가가 드라마 쪽에서 성격 까다롭기로 유명하다고 했다.

결국 유 팀장은 동훈에게 최순길 감독 말고는 괜찮은 사람이 없다는 의견에 동의했다.

사실 동훈은 유 팀장이 최순길 감독 말고 다른 감독을 제시할거라고 생각해 최 감독과 같이 하지 못할 확률이 크다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동훈은 사무실로 찾아온 최순길 감독과 불편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드라마 연출에 진짜 날 써보겠다고?”

최순길 감독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감독님이 동의하시면 한번 진행해보려구요.”

“왜 날?”

“감독님 연출 실력은 괜찮다고 생각하거든요. 제가 그 때 감독님에게 한 조언 때문에 많이 섭섭하셨겠지만, 그게 감독님의 연출 실력에 대한 비판은 아니었다는걸 알 겁니다.”

“...”

최 감독은 별 말 없이 팔짱을 끼고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동훈을 바라보았다.

아마 마음 같아서는 때려치우라고 소리치고 밖으로 나가고 싶었을 거다.

아니, 애초부터 이 자리에 앉고 싶지도 않았을거다.

그럼에도 쉽사리 거절의 말을 내뱉지 못하는건 자존심만을 생각하기에는 고려해야 할게 많은 나이일 것이기 때문일 거다.

동훈도 만약 최 감독이 싫다고 하면 굳이 매달릴 생각은 없었다.

그의 연출력이 마음에 들기는 하지만 회사 대표가 돼서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붙잡을 만큼 최 감독이 엄청난 실력가는 아니니까.

동훈은 나름 껄끄러운 관계 속에서도 회사 대표로써 최선의 선택을 한 셈이었다.

한참을 말없이 고민하던 최순길 감독이 입을 열었다.

“나 드라마 해본적 없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문제는 아니잖아요. 괜히 드라마면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일부 감독들이 문제지. 기술적으로나 환경적으로나 문제 될 건 없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조감독이나 주요 스탭은 어떻게 선정할 건데?”

“감독님이 알아서 하셔야죠.”

“넌 신경 안 쓰고?”

“이래봬도 제작사 대표입니다. 드라마 스탭 선정하는 것까지 일일이 참견하지 않습니다.”

박광효 감독이 연출자로 참여하는 헐리우드 영화야 굉장히 민감한 사안이었기에 대표가 직접 선택한 것이었다.

그것도 총연출자가 박 감독이 아니었기에 했던 것이고 다음에 박 감독이 헐리우드 영화를 총연출을 맡게 된다면 동훈이 스탭 선정에 손을 댈 생각은 없었다.

“시청률을 망치면?”

“걱정 마세요. 원래 드라마는 작가 놀음입니다. 시청률 떨어진다고 감독님한테 뭐라 하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그리고 유인선 작가도 감독님이라면 괜찮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냥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만 찍어 주세요. 잘 할 수 있으시죠?”

“그거야... 할 수 있지.”

“그럼 문제없군요.”

동훈은 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을 이었다.

“나가면 드라마 지원팀 직원이 연출 계약서 줄겁니다. 잘 보고 문제 없다고 생각하면 계약하고 일정 잡으시면 돼요.”

“그러지.”

최 감독은 씁쓸한 표정으로 수긍하자 동훈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 대표실을 나와 유지은 팀장에게로 갔다.

“최 감독님이 맡겠다고 하니까 계약서 주고 도장 찍으세요.”

“계약 조건은 어디까지 조정 해줘야 할까요?”

“그건 팀장님이 알아서 하세요.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세요.”

동훈은 사무실을 나와 시내의 한 호텔로 향했다.

“어, 여기!”

멀리서 양호민 감독이 동훈을 보고 손을 흔든다.

오늘 자리는 연말 영화제를 앞두고 영화 감독끼리 모여 한해를 돌아보는 송년회 자리였다.

말이 좋아 한해를 돌아보는 뜻깊은 자리이지 사실 인기있는 영화감독들은 자리의 주인공이 되고 그렇지 못한 감독들은 투명인간이 되는 그런 자리였다.

하지만 아무리 인기없는 감독이라고 해도 이런 자리는 함부로 빠지지 않는다.

인기있고 영향력 있는 감독들과 친해진다는건 단순히 인맥을 늘린다는 의미를 넘어서 좋은 제작사와 스타급 배우를 연결시켜 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마 최순길 감독은 유지은 팀장과 계약에 관한 미팅을 한 후 늦게라도 오려고 할 터였다.

그 정도로 감독들에게는 의미 있는 행사였다.

동훈은 작년에 처음 감독이 되어 이 자리에 참석했었고 이번이 두 번째 참석이었다.

조감독일때는 이 송년회에 얼마나 참석하고 싶었는지 이루 말할수 없었는데 막상 작년에는 바빠서 굳이 참석해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다.

이래서 개구리 올챙이적 생각 못한다는 말이 나오는가보다.

“일찍 오셨어요?”

양호민 감독이 슬며시 눈웃음을 지으며 귓속말로 속삭였다.

“아니, 방금 전에 왔어. 다들 너 기다리고 있더라.”

“저를요?”

“뭘 모른척이야? 다들 우리 회사에 들어오고 싶어서 그러는거지.”

“아...”

박광효 감독 이후로 아직 새로운 감독과 계약한 적은 없었다.

최순길 감독이 찾아와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이후 아예 당분간 새로운 감독 계약은 없다고 못 박았기 때문이다.

그때 누가 옆에 다가와서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신인감독 윤재성이라고 합니다.”

“아이고, 왜 그러세요. 선배님.”

다가와서 인사한 이는 동훈보다 1년 먼저 이 바닥에 들어온 윤재성 감독이었다.

조감독 시절부터 알고 있었는데 성격도 좋고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들을 배푸는데 아낌이 없어 많은 후배들이 따랐다.

동훈도 그 후배들 중 하나였는데 안타깝게도 입봉이 늦어 동훈보다 늦게 데뷔작을 내놓았다.

입봉작이 늦은 것도 가슴 아픈 일인데 아쉽게도 흥행마저 실패했던 걸로 알고 있었다.

“하하, 원래 이 바닥이 흥행하면 다 선배님이야. 안녕하십니까. 양 감독님.”

“어, 오랜만이네.”

“그런 말씀 마세요. 언제 오셨어요?”

“나야 가장 빨리 왔지. 식사는 했어? 여기 과자 먹어라. 맛 좋더라.”

“네. 감사해요.”

아무 생각없이 이 자리에 왔기에 윤재성 감독을 여기서 볼 줄은 몰랐는데 막상 만나니 반가우면서도 솔직히 부담스러워졌다.

특히 ‘날 도와주세요’하는 눈빛으로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으니 이거 도망칠수도 없고 난감했다.

그때 저 멀리 일단의 무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병세 감독과 그와 친한 무리들...

마침 유병세 감독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어 시선을 마주칠 수 있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시선을 돌린다.

사이가 안 좋아지고 나서부터 언제나 무시하는 눈빛으로 바라봤었는데 이제는 서로의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는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유 감독도 왔네?”

양호민 감독이 다가와 턱짓으로 유병세 감독 무리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그렇네요. 그래도 사람들이 많이 붙어있네. 아, 전에 유병세 감독이 회사 세운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금쯤 한창 회사 만든다고 바쁠 타이밍 아닌가?”

“맞다. 그랬지. 그런데 내가 요즘 정신이 없다 보니 그 얘기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

양호민 감독이 고개를 갸웃할 때 윤재성 감독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제가 알고 있습니다. 저기 유병세 감독 주변에 몰려든 감독들 전부 이번에 YOU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한다고 들었습니다.”

“YOU엔터테인먼트?”

양호민 감독이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네. 유병세 감독이 만든 회사 이름이라네요.”

“지 이름에서 성을 딴 거야? 유치한데?”

“하하,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저한테도 권유하더라구요.”

“너한테? 어떻게 권유했는데?”

윤재성 감독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별거 없었습니다. 계약하면 최대한 빨리 제작을 지원하겠다는 거였죠..”

“그럼 넌 쟤랑 계약했어?”

“아니요.”

윤 감독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왜?”

“다들 너무 빵빵해서요.”

“아... 순서가 많이 밀리긴 하겠다.”

양호민 감독이 윤재성 감독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동훈도 윤 감독이 왜 YOU엔터와 계약하지 않았는지 이해했다.

현재 유병세 감독 주변에 딱 달라붙어 있는 감독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이름값을 가진 감독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요즘 동훈 때문에 충무로 경기가 좋아졌다고는 해도 감독이 아무 때고 원할 때 작품을 만들 수 있는게 아니었기에 유병세 감독의 제안을 거부하기 힘들 터였다.

어쨌든 상황이 그러니 아무리 최대한 빨리 제작을 제원하겠다고 해도 윤재성 감독의 차례가 오려면 얼마의 시간이 흐를지 알 수 없을 거다.

“그런데 규모가 크긴 한 것 같아요. 이번에 바로 제작 들어간다고 하던데...”

“그래? 누구거?”

“강석호 감독이요.”

“강석호?”

동훈도 황당한 표정으로 유병세 감독 무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강석호 감독이면 이미 자신과 수많은 사연이 있는 감독이 아닌가?

얼마 전에 개봉했던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다고 들었는데 바로 제작에 들어간다니 의외였다.

강석호 감독의 흥행성적은 결코 저 무리 중 상위권에 속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제작된다니 흥행실패 후 제대로 칼을 갈고 나왔던 것일까?

“네. 시나리오가 되게 좋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어떤 내용인지는 듣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내년 초에 프리 프로덕션 끝내고 늦어도 3월에는 크랭크인을 목표로 한다고 하던데요.”

“그렇게 빨리? 직원은 다 구했대?”

“유병세 감독이 다른건 몰라도 인맥 하나는 최고지 않습니까. 제작피디는 이미 섭외했다고 하던데요? 어디서 데리고 왔다고 했더라? LS엔터였나? 하여튼 제법 큰데서 데리고 왔다고 합니다.”

“수완은 있네.”

“사실 동훈이가 이 바닥에 혜성처럼 등장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병세 감독이 충무로 최고 기대주 아니었습니까. 실력 좋지, 인맥 빵빵하지, 운도 좋아서 입봉도 엄청 빨랐던거 아시죠?”

“그래, 그랬지.”

“지금도 유병세 감독 말이라고 하면 껌뻑 죽는 제작사랑 투자자들 많습니다. 저 정도 수완은 기본이겠죠. 사실 그래서 저도 혹하기는 했습니다. 조금만 빨리 연락주지...”

양호민 감독이 피식 웃었다.

“왜? 아쉽냐?”

“솔직히 그렇긴 합니다. 투자자도 엄청 빵빵하게 물었다고 하던데 부럽지 않으면 거짓말이죠. 하아... 이번에는 진짜 괜찮은거 썼는데...”

윤재성 감독은 그렇게 말하며 슬쩍 동훈의 눈치를 보았다.

동훈은 그런 윤 감독의 눈길을 모른척 넘기며 과자를 씹어먹는데 양호민 감독이 휘적휘적 유병세 감독에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뭔 상황인가 싶어 후다닥 따라갔거 윤재성 감독 역시 영문을 모르고 따라붙었다.

“오랜만이네?”

양 감독이 손을 척 들면서 인사하자 유병세 감독이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인다.

“오셨어요, 선배님. 늦었지만 천만 축하드립니다.”

“축하는 무슨... 그게 언제적 일이야, 잘 지냈어?”

“저야 항상 그렇죠, 뭐.”

“회사 차린다며?”

유병세 감독은 양호민 감독의 뒤에 서 있는 동훈의 눈치를 흘끔 보며 대답했다.

“네. 어떻게 하다 보니까 제작사를 운영하게 됐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예쁘게 봐주십쇼.”

“그럼, 그래야지. 이 바닥에서 너 안 예뻐하는 선배들 없잖아. 알지?”

“하하, 감사합니다.”

“그런데 의외다. 넌 회사 운영에는 전혀 관심 없었는줄 알았는데.”

“저도 몰랐습니다. 제작사를 운영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거든요. 이래서 인생은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래서 인생이 재밌는 거지.”

양호민 감독은 씨익 미소짓고는 동훈의 어깨를 툭 치며 앞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동훈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여기 우리 회사 대표, 너도 알지?”

“그럼요. 잘 알죠.”

“그래. 너도 열심히 하면 여기 장동훈 대표처럼 될 수 있을 거야. 장동훈 대표, 제작사 대표를 꿈꾸는 유 감독에게 조언 한 마디 해줘.”

동훈은 내심 웃음이 터지려는 걸 참고는 자못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유병세 대표님, 별거 없습니다. 항상 겸손하게, 최선을 다하면 저처럼 될 수 있을 거예요.”

유병세 감독의 표정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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