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13화 (113/116)

# 113

헐리우드에 가고 싶은 사람들(3)

3주 후, 동훈과 박광효 감독이 한국에 들어왔다.

박광효 감독은 다시 미국으로 가 장기간 체류하며 영화제작을 준비할 예정이었고 동훈은 필요한 사안에 관해서는 메일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프로젝트 디렉터 업무를 진행하기로 했다.

연출에 관해서는 손을 대지 않을 생각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할 일이 많이 있었고 말이다.

“어떻게 하실래요?”

유지은 팀장은 동훈에게 리스트를 건네주며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동훈에게 건네준 리스트는 다름 아닌 촬영 스태프 직원 목록.

여기서 발탁된 인원이 이번 헐리우드 영화 제작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게 될 것이었다.

“음... 잠시만요.”

동훈이 네임펜을 집어들고 체크하기 시작하자 유지은 팀장이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바로 결정하시는 거예요?”

“이미 생각하고 있었어요. 누구를 보낼지.”

“어... 알겠어요.”

동훈은 리스트에 올라와 있는 직원들을 거침없이 체크해 나갔고 1분도 채 되지 않아 헐리우드로 날아갈 명부가 완성되었다.

유 팀장은 살짝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못 가는 인원은 아무래도 실망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잘 달래주셔야 할 것 같아요.”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렇다고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어르고 달래줄수는 없지 않아요? 회식으로 툭 털고 다음에 더 좋은 기회가 있을 때 갈 수 있는 거라고 말해야죠.”

“그게 맞겠네요. 알겠어요.”

“그리고 전에 말했던건 어떻게 됐어요?”

“그건 여기...”

유 팀장은 또 다른 서류를 동훈에게 내밀었다.

딱 봐도 작품의 시놉이나 트리트먼트임을 알 수 있었다.

유지은 팀장이 건넨 건 총 네 개의 시놉.

전부 동훈이 미국에 있을 때 미리 드라마를 준비하는 작가의 작품을 찾아 달라고 한 것들이었다.

“이건 누구거예요?”

“장병주 작가요. 왜 ‘그 날은 오지 않았다’랑 ‘비서 생존기’라고 아시죠? 시청률 꽤 잘 나왔는데.”

“아... 알아요. 그 작품 한 3년 되지 않았나?”

“맞아요. 기억하시네요. 인기 괜찮았는데 이상하게 다음 작품이 안나오더라구요. 그리고 이건 유인선 작가꺼. 요건 백대현 작가꺼...”

“일단 두고 가세요. 보고 검토할게요. 아, 양 감독님은 지금 어디 계세요? 사무실에 있어요?”

“아니요. 요즘 공부하러 다니신다고 바쁘세요.”

“그래요? 힘드시겠네.”

본래 이렇게 빨리 드라마를 제작해야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진행하려고 생각했었는데 미국에서 작품을 검토하고 있다가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양호민 감독이 준비하고 있는 영화의 각본이 대폭적인 수정을 필요로 한다는 소식이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의 배경에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경우 준비기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길어지는 경우가 있다.

처음에 구상했던 플롯을 구체적화 시키며 각본을 쓰는 도중 전문적인 지식의 부족으로 예상치 못하게 개연성에 문제가 생기는걸 발견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각본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데 이게 운이 좋으면 쉽게 풀리지만 플롯의 뼈대가 되는 중요 설정에서 문제가 생기면 며칠 고생한다고 해결하지 못했다.

빠르면 몇 달만에 각본을 마무리 하겠지만 늦어지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이렇게 된 상황이니 일단 급하게 다른 일을 진행해야 회사 입장에서 일이 끊이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다.

“양호민 감독님이 대표님께 많이 미안해하는 것 같으시더라구요. 자기 때문에 스케줄이 완전히 엉망이 된 상황이니까.”

“그렇긴 한데 원래 창작이라는게 마음대로 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동훈은 유지은 팀장을 내보내고 시놉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유 팀장이 놓고 간 네 가지의 시놉 모두 작가들이 오랫동안 준비한 작품이라 그런지 이야기의 구성이나 캐릭터 자체는 탄탄했다.

다만 어느게 시청률이 잘 나올 것인지는 감이 오질 않았다.

네 개의 작품 모두를 다 살피고 고민하는데 누군가 문을 똑똑 두드리며 들어왔다.

“감독님!”

은정이었다.

한국에 도착할 때 공항에 가장 먼저 나와 있겠다는걸 기자가 보면 좋은 꼴을 못 볼거라며 겨우 말렸었다.

이후 사무실에 들어온 다음에야 직원들 안 보는 사이 진한 포옹으로 그리움을 달랬는데 밖에 있다가 심심해서 들어온 듯 했다.

“왜?”

“뭐해요?”

“어... 시놉을 좀 보고 있었어.”

“이번에 한다는 드라마요?”

“응. 내가 드라마를 안 본건 아닌데 뭘 선택해야 할지 확 감이 오는건 없네.”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의 드라마 작가들이 이곳에도 있다는건 분명 동훈에게 있어 좋은 점이었다.

그런데 그런 스타작가들은 이미 어딜가나 가장 먼제 제작사들과 방송국의 선택을 받았기에 대박 작품을 가로채올 확률은 없다고 봐야 했다.

그저그런 시청률의 작품일 경우 김영웅 감독의 기억에도 없을 것이기에 어쨌든 동훈이 모르는 작품은 결과를 쉽게 예측할 수 없다는게 문제였다.

“우웅... 그럼 이거 어때요?”

은정이 검지 손가락을 세워 한 작품을 톡 찍었다.

“이거?”

은정이 찍은 작품은 유인선 작가의 ‘배고플 때 사랑하라’라는 작품이었다.

오로지 일과 미식에만 관심있던 여주인공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는 과정을 그린 스토리인데 사실 동훈은 시놉을 읽으면서도 그닥 와닿지는 않았다.

아마 이런 식의 로맨스 드라마보단 스릴러나 수사물 같은 장르물을 좋아해서 그런지도 몰랐다.

“네. 재밌을 것 같아요.”

“그래? 흐음... 난 잘 모르겠는데. 스토리상 특색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보이고. 별 특별한 점이 없어.”

“시놉단계니까요. 각본이 나오면 더 괜찮지 않을까요? 아니면 4회까지 대본을 달라고 해보시던지...”

“그래볼까?”

아무래도 시놉만 봐서는 선택하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은정의 말대로 대본을 봐야 감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네 개의 작품 모두 대본을 다라고 할 수는 없었다.

최소한 제작사도 대본을 내놓으라고 할 때는 어느 정도의 성의는 필요했으니까.

이를 테면 작가와의 미팅을 통해 회사에서 이 작품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등의 진정성을 보여 줘야 작가도 의욕을 가지고 대본을 쓰든 이미 쓴 대본을 넘겨주든 할 거다.

동훈은 유지은 팀장을 불러 유인선 작가와 미팅을 잡아달라고 했다.

“왜? 하고 싶은 말 있어?”

유 팀장이 나가고 나서도 아직 미적거리며 나가지 않은 은정을 보고 동훈이 물었다.

유리로 된 벽 때문에 밖에서도 다 보이는 사무실에서 애정행각을 할 만큼 머리가 나쁜 아이도 아니었기에 뭔가 할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했다.

“저기요...”

은정은 몸을 베베 꼬며 동훈의 눈치를 보며 입을 쉽사리 열지 않았다.

“뭔데? 궁금하게...”

“저기 혹시 여주인공은 누구 생각해두신 배우가 있어요?”

동훈은 씨익 미소지으며 물었다.

“왜? 네가 하고 싶어서? 너 하고 싶다고 하면 진지하게 생각해볼게.”

솔직히 은정이 정도면 어느 여배우에 비해 꿇리지 않았다.

아직 현주급 톱스타는 아니었지만 몇 번의 흥행작품에 출연하면서 인지도를 쌓아올렸기에 이제는 미니시리즈 주연을 맡아도 전혀 무리가 없었다.

한참 인기도가 올라가는 추세여서 지금 이미 각종 드라마나 CF, 예능에서 출연제의가 들어오고 있어 어쩌면 은정이 먼저 나서서 해주겠다고 하면 다른 제작사에서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게 분명했다.

“아니요. 전 감독님이 작품 골라주는거 해도 돼요.”

“그래? 아니, 나야 너가 좋다고 하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거야.”

“그게 아니라 감독님이 아직 생각해둔 배우가 없으면 혹시 우리 언니는 어떤가 해서요.”

“언니? 세연이?”

“네.”

“세연이 일 없어? 그럴 리가...”

은정을 통해 세연이 소속사와의 관계가 굉장히 안 좋아졌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소속사에서 세연이 정도의 스타를 놀리는건 세연이만 손해가 아니라 소속사에서도 손해였다.

기본적으로 세연이에게 투입되는 매니저와 차량, 그리고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헤어, 메이크업 비용만 해도 못해도 월 500 이상이 들어갈거다.

가만히 놀리고 있는게 소속사 입장에서는 완전히 손해보는 일이기에 아무리 사이가 안 좋다고 해도 일을 계속 만들어줘야 했다.

그런데 일이 없다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지금 회사에서 이상한 예능에 꽂아주려고 한 대요.”

“아... 드라마가 아니라 예능에?”

“네. 무슨 일반인이랑 미팅해서 연예하는 예능이라던가? 그렇대요.”

“완전히 악질이네.”

예능이면 확실히 배우의 이미지와 상관없이 돈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특히 싫어하는 배우에게 줄 일거리로 저런 예능은 딱 맞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니까요. 아주 나쁜 새끼들이에요.”

“그런데 세연이가 어떤 드라마든 할 거래? 딱히 거르는 작품은 없고?”

“네. 그런거 없어요. 정말요.”

은정이가 저렇게 원하니 들어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신세연 정도면 제작사 입장에서 쌍수를 들고 환영해도 될 정도였다.

물론 현주가 소속배우로 있었긴 하지만 현주는 드라마에는 흥미가 없기에 더더욱 나쁠게 없었다.

“그래, 알겠어. 일단 작품 정해지면 캐스팅 디렉터한테 이야기해 놓을게. 그리고 아직 PD 안 정해진거 알지? 연출자가 다른 여배우를 원할수도 있으니까 아직 세연이한테는 말하지 마.”

“알겠어요.”

은정은 쿨하게 승낙했지만 동훈이 보기에도 설마 새로 계약하는 PD가 자신의 말을 거부하리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며칠 뒤, 유인선 작가와의 미팅했는데 운좋게도 이미 대본이 6회까지 나온 상황이었다고 했다.

이렇게 좋을수가...

대본을 받아보니 시놉에서 느끼지 못했던 캐릭터의 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전작이 그리 좋은 시청률은 나오지 않았다고 하던데 이번에는 꽤 칼을 갈았는지 잔잔하면서도 코믹적인 부분이 많아 누구나 재밌게 볼 것 같다고 유 팀장이 매우 흡족해했다.

사무실로 돌아온 유지은 팀장이 물었다.

“연출자는 누굴 생각하고 있어요?”

동훈은 입을 씰룩이며 고민하다가 말했다.

“혹시 최순길 감독 연락할 수 있어요?”

“최순길 감독이요? 어... 연락이야 물어물어 가능할거긴 한데 굳이 왜 최순길 감독을...?”

유 팀장은 얼마 전에 동훈과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는데 굳이 그런 사람을 연출자로 부르려는게 이해되지 않는 것 같았다.

당연했다.

솔직히 동훈 자신도 굳이 껄끄러운 일이 있었던 사람과 같이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성인군자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어려운 사람을 꼭 도와야 한다는 대승적인 생각 역시 아니었다.

단지 지금 드라마 연출 PD로 마땅히 생각나는 사람이 최순길 감독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때도 생각했지만 자신이 시나리오를 직접 써야 하는 거라면 떨어질지라도 잘 만들어진 각본을 잘 연출하는건 최순길 감독이 그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있으니까요. 당장 최순길 감독 말고 생각나는 사람이 없네요. 그 사람 말고 추천해줄 만한 사람 있으면 추천해주셔도 됩니다.”

“추천해줄 사람이라...”

유지은 팀장 역시 최순길 감독이 연출 실력은 인정하고 있었기에 쉽사리 다른 연출자의 이름은 대지 못했다.

“생각해보고 조만간 추천해주세요. 팀장님도 알다시피 시간이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니까요.”

“알겠어요.”

“그리고 이제 유 팀장님은 일 줄이시고 저한테 따로 시간을 내주세요.”

“네? 설마...”

“네. 저도 이제 다른 감독 작품 도와주는거 말고 새 작품 준비해야죠.”

“벌써 새 작품 하시려구요? 우와... 정말 대단하네요. 전 빨라도 내년 초는 되어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부터 준비해도 올해 말에 크랭크인 들어가기 힘들수도 있습니다.”

동훈은 얼떨떨해하는 유지은 팀장에게 씨익 미소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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