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헐리우드에 가고 싶은 사람들(1)
브래드 피트는 한국에 온 김에 관광을 하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일정 때문에 가야 한다며 다음날 회의를 마치고 바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가면서 자막이 달린 ‘동네 아저씨’ 꼭 보겠다고 언제 개봉하냐며 묻기도 했었다.
어쨌든 그렇게 브래드 피트가 떠나고 나서 DH미디어는 공식적인 보도자료를 배포했다.
[장동훈 감독, 브래드 피트와 손잡다!]
[헐리우드 진출을 눈앞에 둔 DH미디어]
[장동훈 감독, 세계적인 거장이 되어 가나?]
[브래드 피트의 플랜 B는 어떤 제작사인가?]
당연히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고 안 그래도 ‘동네 아저씨’로 파죽지세의 흥행을 이어가는 장동훈 감독은 더욱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개봉 일주일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한 ‘동네 아저씨’는 개봉 2주가 지났을 때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흥행열기를 이어갔다.
다만 예매율이 조금씩 떨어지며 천만 관객 돌파는 어렵다고 자체적으로 결론 내렸지만 말이 천만이지 어디 천만 관객이 쉬운 일이던가?
동훈은 이 정도 흥행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이미 손익분기점은 넘어섰고 대한민국 최고 흥행 감독이라는 수식어도 당연하게 여겨졌으며 수많은 연예기획사들이 DH미디어에 연락해 시나리오를 요청했다.
마침 양호민 감독이 리먼브라더스 사태를 소재로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기에 캐스팅 디렉터는 좋아라 하며 제작 일정을 돌렸다.
아직 트리트먼트가 다 나오지 않은 까닭에 일단 어떤 영화를 만든다고만 전해주고 일정만 나온 걸로 캐스팅을 진행한 거다.
별로 인기가 없는 감독이나 신인감독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캐스팅이지만 전작이 천만 관객을 넘었던 감독이었기에 시나리오도 안 보고 하겠다는 배우는 넘칠 정도였다.
개봉 3주차에 접어든 월요일 오전, 동훈은 미국에서 온 플랜 B 임원과 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영화 감독에 프로젝트 디렉터를 동훈이 맡고 박광효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았다.
다만 박광효 감독이 총연출을 맡지는 않고 플랜 B에서 선정한 감독을 총연출로 맡기겠다고 했는데 이건 박광효 감독도 충분히 수긍할만한 내용이었다.
단순히 수긍한 정도가 아니라 자기가 총연출이 아닌 것에 안도했을 정도였다.
자신의 시나리오가 헐리우드 제작사에서 만들기로 했다는 것도 흥분할만한 일인데 자신이 총연출까지 맡게 되면 그 부담감을 견딜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추가로 영어도 안 되는 자신이 헐리우드 스타들을 상대로 디렉팅할 생각만 하면 숨이 가빠온다나?
어쨌든 박광효 감독은 계약이 체결되자마자 바로 개인 영어 과외 선생님을 모셔와 속성과외에 들어갔고 이는 동훈도 마찬가지였다.
하루에 최소 여섯 시간 이상을 영어공부에 매진하다보니 수험생 시절이 떠오르며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렇게 며칠간 사무실에서 영어 공부를 병행하느라 녹초가 되어 있을 때 명진이가 오랜만에 회사에 찾아왔다.
불안하게 현주와 같이 말이다.
“여행은 다 즐겼냐?”
“헤헤...”
명진은 머리만 긁적이며 시선을 슬며시 돌린다.
여행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다.
작품 만드느라고 고생했으니 몇 달 편히 쉬라고 했던 건데 마침 현주도 스케줄이 비어 있었기에 둘이 국내 이곳저곳 남모르게 돌아다닌걸 여행이라고 말한 거였다.
“신기하게 기사가 안 나더라?”
“저도 신기했습니다. 그래도 이번에는 나름 잘 가리고 돌아다녔어요.”
“뭐, 그건 그렇고 갑자기 연락도 없이 왜 온거야?”
“회사에 뭐 연락하고 옵니까?”
“너 쉬라고 했는데 갑자기 와서 그러지.”
“크흠... 브래드 피트 왔다면서요? 좀 부르시지.”
“야, 쪽팔리게 싸인이라도 받으려고 그러냐? 너도 인마 감독인데 꿇리면 안 돼.”
“그게 아니라 제가 어렸을 때 ‘가을의 전설’ 보고 남자배우인데도 진짜 반해버렸었다니까요. 보면 같이 사진이라도 찍어야 하는 건데.”
“나중에 만날 일이 있겠지. 그리고 나도 브래드 피트가 직접 올줄은 몰랐어. 그리고 기사 봤으면 그 다음날이라도 오지 그랬어?”
“그때는 부산에 있었어요.”
괜히 말을 꺼내기 어려운지 현주와 시선을 맞추는걸 보니 이 얘기를 하려고 온 건 아닌 듯 싶었다.
“그럼 어쩔 수 없고...”
“광효 형이 연출 하는거예요?”
역시... 이게 궁금했나보다.
“총연출은 아니야. 조감독 개념은 아니지만 메인 프로듀서가 있고 일종의 서브 프로듀서라고 봐야지. 내가 프로젝트 디렉터로 참여해서 기본 스토리의 축을 손 댈 거지만 현장 연출까지는 손대지 않을거야. 그렇게 해서도 안 되고.”
“그럼 박 감독님이 많이 배울 수 있겠네요.”
“그렇지. 누가 연출을 맡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 나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헐리우드 연출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거야. 그렇다고 우리 실력이 아주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그저 압도적인 자본력을 바탕으로 뛰어난 기술을 표현하는 능력이 뛰어나긴 하지만 그 외에는 우리도 그리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거든,”
“그래도 헐리우드 스타들과의 협업은 충분히 기대할만 하겠어요.”
“그렇지. 아까 오면서 봤지? 사무실에 직원들 엄청 많은거.”
“맞다. 아까 들어오면서 보니까 직원들 장난 아니던데요?”
명진의 옆에 앉아 있던 현주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기사 뜨자마자 가장 먼저 반응한게 바로 우리 직원들이다. 우리 직원들중에 누가 헐리우드 가는거냐고 계속 눈치싸움중이야.”
“아... 하긴, 우리가 촬영팀만 세 팀이죠?”
“응, 조명팀이 네 개. 미술팀이 세 개, 그밖에 잡다한 스태프들까지 지금 사무실에 다 와 있어. 혹시 출근 안 했다가 못 끼게 될까봐 어찌나 걱정하는지 집에 가라고 해도 안 가.”
“장난 아니네.”
명진이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 현주가 물었다.
“배우는요?”
“네?”
“배우 캐스팅 아직 진행 안 됐을거 아니에요?”
“하하하!”
항상 표정이 한결같은 현주였기에 이걸 농담으로 받아야 할지, 진담으로 받아야 할지 구분이 안 가는데 명진이 웃으며 나섰다.
“현주 씨도 되게 궁금해하더라구요. 캐스팅은 어떻게 될 건지, 앞으로 계속 헐리우드 영화를 만들게 될 건지 말이에요.”
아무래도 현주는 헐리우드 진출에 관심이 있는건 분명한 것 같았다.
일단 웃으면서 넘어갈 이야기는 아니었기에 현재까지 결정된 사항들을 알려주기로 했다.
“일단 이번 영화 자체가 주연 여배우가 필요하긴 한데 그렇게 중요한 역할은 아니에요. 그냥 주인공 아내 역인데 이걸 주연 여배우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 그리고 일단 스토리 자체 배경을 한국에서 미국으로 바꾸기로 했기 때문에 한국 배우는 몇 명 참여하지 않을 계획입니다.”
“주연급은 아무도 참여하지 않는 건가요?”
실망스러운 현주의 분위기에 미안함을 담아 말했다.
“미안해요. 이번 영화에는 한국 배우들이 참여한다고 해도 그렇게 비중있는 캐릭터는 몇 개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앞으로 계속 이렇게 가지는 않을 거예요.”
“헐리우드 영화를 계속 만들려고 한다면서요?”
“하하하, 아니에요. 헐리우드에 진출한다는거지 앞으로 모든 영화를 헐리우드 배우를 써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이번 영화만 헐리우드에 진출하기 위해서 감독부터 배우들까지 싹 바꾸는 거죠. 박광효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까지만... 아시겠죠?”
“그럼 다음 작품은 어떻게 하시게요? 한국 배우들로 헐리우드에 진출할 건가요?”
“당분간은 기본적으로 헐리우드 영화를 표방할 생각이에요. 다만 한국적인 색채를 유지할겁니다. 연출은 되도록 우리 감독이 맡고 배우들 가운데 주연 배우 한 명은 최소 우리나라 배우를 쓸 생각이에요. 남배우 한명이나 여배우 한명, 이런 식으로... 그리고 규모가 작은 영화들은 기존 영화들처럼 한국에서 제작해서 국내 박스오피스를 노릴 생각입니다.”
“아... 그러니까 헐리우드용 따로, 국내용 따로, 이렇게 두 가지를 한다는 거죠?”
“맞아요. 물론 헐리우드 영화를 타켓으로 하는건 당연히 국내에서도 먹힐 영화를 만들 생각이구요.”
“그렇구나...”
현주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래도 실망한 내색을 감추지는 못했다.
헐리우드 영화에 진출할 가능성은 무척 높아졌지만 그래도 그 경쟁률이 엄청나게 높을 거라는건 불보듯 뻔했기 때문이리라.
현주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명진이 물었다.
“그럼 다음 영화는 준비하고 있는게 있습니까?”
“없어, 아직...”
“양호민 감독님 영화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건 시나리오 변경 없이 그대로 갈 거야. 헐리우드 배우를 넣을 생각도 없고, 그냥 원래 구상했던 그대로 가려고 해. 양 감독님도 그렇게 하자고 하셨어. 자기는 헐리우드 스타 오면 괜히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하시네. 굳이 외국 배우가 필요할 것 같지도 않다고 하시고.”
“그럼... 혹시 제가 끼어도 됩니까?”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걸 보니 뭔가 가져오기는 한 것 같았다.
“뭔데? 이번 영화에 연출로 끼겠다는건 아니겠고... 그간에 뭐 만들어 온 거야?”
“현주 씨랑 데이트 하면서 작품 하나를 구상하긴 했는데 이게 시나리오를 완성한건 아니라서요.”
“괜찮은 소재가 나온 수준인거네?”
“맞습니다.”
“그래? 그럼 잘 만져가지고 와봐.”
동훈이 별 망설임 없이 쿨하게 대답하자 명진의 안색이 밝아진다.
“그럼 시나리오 괜찮으면 헐리우드에서 제작 가능한겁니까?”
“당연하지. 왜? 내 작품만 헐리우드에서 만들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감독님 작품이 가장 먼저일 것 같아서요.”
사실 이번 영화는 동훈이 프로젝트 디렉터를 맡기는 했어도 연출을 하는건 아니었기에 온전히 동훈의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 명진은 다음에 헐리우드에서 제작하는 작품은 당연히 동훈의 작품으로 할 거라고 생각한 듯 했다.
“아니야. 내 작품을 국내용으로 할 수도 있어.”
“진짜요? 왜요?”
“상황에 맞게 가는거지. 괜찮은 소재 있는데 국내용이라고 안 할 수는 없잖아. 일단 재지 말고 가져오기나 해. 쓸데없이 간보려고 하지 말고.”
“간보려는게 아니라 궁금했던 겁니다.”
“알았어, 인마. 현주 씨는 김태현 실장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어떤 이야기요?”
화제가 전환되자 현주는 안색을 바로하고 되물었다.
“드라마 몇 개 온거 있어서 현주 씨 오면 의논하고 싶은게 있다고 했거든요.”
“아... 이야기는 들었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어요.”
“잘 보고 판단해보세요. 시놉을 본건 아니지만 들리는 말로는 괜찮다고 하더라구요.”
현주는 잠시 말이 없다가 화제를 돌렸다.
“드라마 연출은 손 안 대세요?”
“드라마요? 그건 굳이...”
“왜요?”
“영화는 제작할 능력이 되는데 드라마는 경험도 없고, 굳이 제작할 이유가 있나 싶어서요.”
“요즘엔 드라마가 영화보다 더 파급력 있잖아요.”
“하긴 그렇긴 한데...”
생각해보니 국내 환경으로만 따지자면 영화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해 왔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모든 한류스타들은 드라마를 통해 탄생했고 각종 PPL은 영화보다 드라마에 더욱 많이 들어온다.
“꼭 그렇게 하자는건 아니구요. 그냥 물어본거예요. 나도 다른 회사에서 제작한게 아니라 우리 회사가 제작한 드라마면 왠지 시청률도 더 잘 나올 것 같고 믿음이 갈 것 같기도 하고...”
현주는 어째 DH미디어가 제작하지 않는 모든 작품은 조금 꺼려하는 기색이었는데 다시 뒤집어 생각하면 꼭 나쁘지 않은 생각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