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
이거 완전 흥행의 신?(5)
“감독님... 저 지금 브래드 피트 본 거 같아요. 너무 닮았는데...”
동훈은 수화거 너머에서 들리는 은정의 음성에 화들짝 놀랐다.
“어? 누가 와?”
“브래드 피트요.”
“왜 대표가 직접 왔지?”
“뭐에요? 진짜 오기로 되어 있는 거예요? 아, 지금 방금 사무실로 들어 갔는데... 유지은 팀장님도 놀라는 것 같은데요? 두 명 더 있어요. 한 명은 한국 사람 같은데 통역 같구요. 다른 사람은 외국 사람이에요. 감독님도 모르는 거예요?”
“난 대표가 올 줄은 몰랐어. 올 거면 다른 사람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유 팀장은 플랜 B에서 오는 사람이 브래드 피트인지 몰라서 놀라는거지, 오늘 사람이 올 지는 알고 있었어.”
“브래드 피트가 어디 대표에요?”
“어. 플랜 B라는 제작사 대표야. 일단 들어가서 셀카 찍으면서 시간 보내고 있어. 나 조금 있다가 들어갈 거야.”
“네. 빨리 오세요.”
동훈은 전화를 끊고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얼마 전에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에서 박광효 감독과의 시나리오를 헐리우드에서 조금 더 키워 보자는 연락을 받았었다.
동훈은 헐리우드 영화가 아닌 바에야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는데 그쪽에서 시나리오의 배경을 헐리우드로 바꾸자고 말이 나왔다.
그럴 수가 있냐고 했더니 제작사 하나를 연결해주겠다고 했다.
고민하던 동훈은 연결 시켜주려는 제작사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놀랍게도 플랜 B라고 했다.
어떻게 그쪽과 연결됐냐고 물어보니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에서 아시아 제작사의 영화를 투자한다는 소문이 난 후 시나리오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DH미디어의 시나리오를 보고 욕심이 났다나 뭐라나.
이렇게 되니 굳이 거절할 이유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다.
다음 단계라고 생각했던 헐리우드 진출을 한단계 빠르게 진행할 수 있고 헐리우드 제작의 노하우를 배울 수 있는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김영웅 감독의 제작 노하우를 다 알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헐리우드 제작사와의 협업은 상당히 기대되는 일이었다.
어쨌든 제작비도 줄이고 헐리우드에 DH미디어의 영향력을 더 키울 수 있는 기회여서 미팅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빨리 올 줄도 몰랐고 한국으로 온다는 인사가 브래드 피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해보니 머니볼의 브래드 피트가 비슷한 영화인 야구 영화에 더 흥미를 가지는게 희한하긴 했다.
“무슨 전화였는데 그러세요?”
동훈의 앞에서 묻는 이는 방송국의 연예부 기자였다.
‘동네 아저씨’로 인해 밀려오는 인터뷰 요청으로 동훈은 현재 굉장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아닙니다. 인터뷰 계속하죠.”
이후 30여분간 이어진 인터뷰를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을 때가 오후 4시 경이었다.
원래 플랜 B와의 약속은 오후 5시로 첫날은 간단히 인사하고 식사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가 이튿날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나눌 계획이었는데 생각보다 브래드 피트가 약속시간보다 훨씬 빨리 온 거였다.
“대표님!”
유지은 팀장이 한눈에 봐도 조금 흥분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헐리우드 스타를 가까이서 봤으니 얼마나 기분이 좋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브래드 피트가 직접 왔어요?”
“네. 대표가 직접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그것도 이렇게 빨리 올줄은 몰랐어요.”
“대표가 왔으니 더 좋죠. 일단 들어갑시다.”
동훈이 회의실에 들어가니 TV에서만 보던 헐리우드 스타, 브래드 피트와 한국인 통역사 한 명, 그리고 나이가 꽤 있어보이는 남자가 한 명 자리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물론 영어로 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브래드 피트가 손을 내밀었고 동훈도 악수를 나누며 인사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지금까지 한국에 몇 번 왔었는데 한국인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맛있다며 한동안 별 의미 없는 칭찬을 해댔다.
마치 연예 프로그램에서 내한한 스타 인터뷰하듯 영혼 없는 칭찬이라고 해야 할까?
그러다 슬슬 저녁 식사 예약해 놓은 곳으로 이동하려는 찰나 브래드 피트가 통역을 거쳐 물었다.
“감독님이 연출한 액션 영화 정말 잘 봤습니다.”
“봤어요? 어떻게?”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봤어요. 자막 없이 액션 장면만을 주로 봤는데 아주 흥미롭더군요.”
액션 영화의 퀄리티로만 보면 아직 한국영화는 헐리우드 영화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고 생각했기에 의아했다.
“헐리우드에서 액션영화에 흥미를 가질 줄은 몰랐는데요? 이것보다 더 재미있는 시리즈가 있는데...”
“맞아요. 본 시리즈 같은 작품은 분명 굉장한 작품임이 틀림없어요. 다만 언제까지 같은 감독이 계속 그런 작품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것 아니겠어요?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더 재미있는 작품을 찾을 거고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계속해서 재능있는 사람을 찾아야 해요. 내가 듣기로 감독님 역시 그런 생각으로 재능있는 감독들을 받아 들인걸로 알고 있어요. 맞나요?”
꽤나 조사를 많이 해왔나보다.
“맞습니다. 그런 생각이죠. 그런데 굳이 이 작품에 참여하고 싶다고 하신 이유를 잘 모르겠습니다. 우리야 적은 제작비로 당신들의 노하우와 헐리우드에 발판을 놓는다는 이득이 있지만 플랜 B에서는 무슨 이득이 있죠?”
“성공적인 작품을 내보인다는 것. 그건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성공적인 작품은 그리 많지 않았죠. 흥행한다라는 것. 전 지금까지 흥행은 굉장한 운과 재능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라는 말인가요?”
“네. 당신을 보고서야 운보다 재능이 생각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도 있다는걸 인정했어요.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한계는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로부터 들었을 때 미안하지만 조금 웃겼습니다.”
“어떻게 설명했길래 당신에게 웃음을 줬을까요?”
브래드 피트는 멋들어진 미소를 지으며 의자를 앞으로 바짝 당겼다.
“흥행의 신. 전 처음에 무슨 영화 제목을 말하는줄 알았어요.”
“하하하! 거기에서 꽤나 과장을 했네요. 흥행의 신이라고 불리기에는 아주 많이 부족합니다.”
“저도 처음에 들을 때 많이, 아~주 많이 과장을 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흥행의 신이라니... 이거 정말 말도 안 되는 말 아닙니까? 그런데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는 상당히 많은 양의 자료를 추가해주며 단순히 듣기 좋게 과장된 이야기를 한 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전 당신이 연출한 영화와 이곳 DH미디어에서 제작한 영화 모두 감상했습니다. 연속적으로 말이죠.”
“정말요?”
“네. 몇 시간이었더라? 하여간 모든 작품을 다 보았을때는 새벽 4시가 넘어가고 있더군요. 전 바로 연락했습니다. 당신의 제작한다는 야구 시나리오는 흥미로웠지만 그것만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앞으로 제작할 수많은 작품들이 궁금해졌습니다.”
분명 칭찬이기는 한데 막 날아갈 것 같은 기분은 아니었다.
뭔지 모를 찝찝함.
그건 혹시 알맹이만 쏙 빼먹으려는 술수는 아닐까 하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나쁘지는 않은데... 그러니까 앞으로 계속 작품을 같이 만들자는 말씀이신건가요?”
“하하, 당신의 지적재산권을 뺏을 의도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부분에서 굉장히 철저하거든요. 지금처럼 좋은 작품에 같이해주었으면 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면 언제든지 환영이라는 뜻이죠.”
“으흠, 우리가 원할때는 언제든지 같이 하겠다는 말이네요?”
“맞습니다.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의 투자를 받는 걸로 알고 있어요. 하지만 헐리우드에 제대로 진출하고 싶다면 단지 미국의 투자자만으로는 힘들 겁니다.”
“그런가요?”
“잘 생각해봐요. DH미디어가 헐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든다고 가정해보죠. 중요 스태프는 당신의 사람들이겠지만 모든 스탭을 다 데려갈 수 없으니 현지에서 구해야 할 텐데 그런 스탭들은 어떻게 구해야 할까요? 헐리우드에서 소개해주는 업체를 통해서? 과연 그들의 실력이 괜찮을까요? 로케이션 협조는? 권총 따위의 가벼운 무기가 아닌 꽤나 헤비한 무기가 필요할 때 미 국방성과 협의할 수 있을까요? 심의는 누구를 거쳐야 좋은 등급을 받을수 있을까요? 헐리우드 배우 캐스팅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합리적인 금액으로 캐스팅을 할 수 있을까요? 이 밖에도 수십, 수백가지의 어려운 난관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혼자서 가능하시겠어요?”
듣고 보니 암담하긴 했다.
“후... 그렇군요. 결코 쉽지 않은 일이겠어요.”
“맞습니다. 사실 우리도 이런 모든 어려움을 아주 쉽게 극복하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확신하지는 못해요. 작품을 하다보면 상상하지도 못한 난관이 우리를 곤란하게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와 같이 하는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아주 많은 차이를 보일 겁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하죠. 그럼 일어설까요? 예약한 시간이 다 됐으니.”
“안 그래도 배가 고프던 참이었습니다.”
브래드 피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이게 뭐야? 브래드 피트? 얘가 여길 왜 와?”
황당한 표정으로 핸드폰에 뜬 기사를 바라보는 LS엔터테인먼트 최호성 대표에게 홍한규 실장이 자신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래도 공동제작을 위해 한국에 온 것 같습니다.”
브래드 피트가 아무리 공식방문으로 온 게 아니라서 아무런 보도자료가 없었다고 할지라도 요즘 같은 시대에 사진 하나 안 뜰리 만무했다.
당연히 브래드 피트가 영화관에서 영화를 관람했다는 인증사진이 뜬 건 물론이고 DH미디어 직원들과의 회식자리도 인증사진이 올라왔다.
일반 시민들이야 신기하다고 생각하는걸로 그쳤지만 영화계 관계자들은 이목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플랜 B의 대표인 브래드 피트다.
지금도 DH미디어가 대한민국 최고 제작사가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는데 만약 브래드 피트가 DH미디어와 손이라도 잡는다면 압도적인 업계 원탑 제작사로 올라서는건 당연했다.
“뭘 공동제작해? 무슨 사니리오가 있기는 해? 그런게 있었어?”
“저도 그건 잘...”
“야, 미국에서 브래드 피트가 직접 건너왔어. 그런데 아무 시나리오 하나 없이 왔다고? 뭘 보고? 그냥 손잡고 짝짝꿍 하자고?”
“아무래도 국내에 풀리지 않은 시나리오인 것 같습니다.”
“그냥 가지고 있다가 둘이서 협의를 봤다?”
“네. 장동훈 감독의 작품일수도 있고 요새 장동훈 감독이 영입한 감독의 시나리오일수도 있습니다. 정확한건 보도자료가 나와봐야 알 것 같습니다.”
“보도자료 안 내면? 브래드 피트 오는것도 보도자료 안 냈잖아?”
“그건 저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인데 굳이 알면서 숨길 이유가 있었나 하는 생각입니다만 어쩌면 아직 상호간에 아무런 협의도 없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럼 간만 보러 온거다?”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거 뭐 계속 뜬구름만 잡는구만.”
최호성 대표는 팔짱을 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일단 어떻게 돌아가는지 살펴보고 우리도 한다리 걸칠 수 있는 상황인지 확인해봐.”
“우리도요?”
“왜? 그냥 남 잔치하는거 구경이라도 하게? 박수라도 쳐주고 싶어?”
홍한규 실장은 단단히 뿔이 돋은 최 대표를 보며 오늘 무슨 말을 해도 곱게 들리지 않는 상태임을 깨달았다.
“아닙니다. 확인해서 보고 드리겠습니다.”
“잘해라. 지금까지 쪽팔린 것만 해도 너랑 나랑 모가지 보전하기 힘들다. 알지?”
“네...”
번뜩이는 최 대표의 눈을 보며 홍한규 실장은 몸이 서늘하게 얼어붙는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