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08화 (108/116)

# 108

이거 완전 흥행의 신?(3)

빠르게 시간이 흘러 유병세 감독의 ‘트루 러브’가 개봉한지 나흘이 지났다.

LS엔터 관계자들은 계속 불안해했지만 막상 언론시사회에서의 나쁘지 않은 반응에 상당히 고무된 모습을 보였었다.

기자들은 어쩌면 ‘건축학 원론’ 만큼의 흥행을 기대해봐도 될지 모른다는 논조의 기사를 냈을 정도로 호의적이었다.

이후 VIP시사회와 유료시사회에서도 나쁘지 않은 반응이 이어졌고 당연히 개봉 첫날 관객수는 상당했다.

무려 32만명.

로맨틱 코미디라는 장르의 한계를 가진 영화 치고 굉장히 좋은 스코어임은 틀림 없었다.

첫날 많은 관객들 빨아들인 ‘트루 러브’는 둘째 날 30만, 평일 월요일 셋째 날에 24만 관객을 불러들이며 백만 고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문제는 조금씩 SNS를 중심으로 ‘트루 러브’에 대한 박한 평가가 올라오며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고 ‘동네 아저씨’가 시사회에서 엄청난 호평을 받으며 흥행전선에 먹구름을 드리우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현장 체크해봤어? 어때?”

임다은 과장이 빠른 걸음으로 사람들을 헤치고 지나가며 묻자 뒤에서 열심히 걸음을 맞추고 있는 정주리 대리가 대답했다.

“체크해봤는데 관객수는 아직 많이 안 떨어지고 있는걸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확실해?”

“네.”

“그런데 왜 저쪽에서 말이 달라져?”

“그건 저도 잘...”

임다은 과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어제 까지만해도 다음주 스크린 점유율에 대해 큰 변동은 없을 거라고 얘기했던 메가플렉스에서 갑자기 메일로 스크린 수를 줄이겠다는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아무리 잘 나가는 영화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새 영화가 개봉하면 이미 확보하고 있는 스크린 수를 어느 정도 줄여야 하는건 당연했다.

당초 메가플렉스에서 ‘동네 아저씨’ 개봉때 그쪽에 주기로 한 스크린 수는 380개로 LS엔터에서 충분히 양보(?)했던 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갑자기 520개로 늘리겠다는 통보는 이제부터 ‘트루 러브’를 아예 줄여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한거나 마찬가지였다.

LS엔터테인먼트 입장에서는 당연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임다은 과장이 직접 움직여 담판을 지으려했다.

“됐다. 가서 만나보면 알겠지.”

하지만 임다은 과장은 마음 단단히 먹고 메가플렉스 본사에 도착해 연락을 취했을 때 뜻박의 이야기를 들었다.

“회사 건너편 중식당에 있다고, 식사 안 했으면 오라고 하시는데요?”

정주리 대리가 핸드폰을 귀에서 떼며 말했다.

임다은 과장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래, 간다고 해.”

보통 이런 상황이면 식사 끝나고 보자고 하는게 정상이라 임다은 과장은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오라는데 굳이 회사에서 기다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시 메가플렉스 건물을 나와 큰 길 건너편 유명 중식당에 도착하니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지 점원이 이름을 체크하고 능숙하게 안내했다.

“안녕하세... 요.”

안내를 받아 룸으로 들어간 임다은 과장은 인사를 채 마치기도 전에 안색이 싸늘하게 굳고 말았다.

식사를 하고 있는 이들은 메가플렉스 편성팀장인 차해강 팀장만이 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로 빛그림의 양지원 대표가 빙긋 웃으며 임다은 과장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반갑네요. 이게 얼마만이던가요? 4년 전이었나? SHOW의 김용민 부장님하고 영화인의 밤에서 만난적 있었죠?”

“네. 그때 뵙고 처음이네요.”

“너무 반갑워요. 아, 식사 안 하셨죠? 뒤에 직원분도.”

양지원이 정주리 대리를 쳐다보며 말하자 정주리 대리를 황급히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임다은 과장이 바로 대답했다.

“네. 식사도 못하고 달려오느라구요. 여기 뭐가 맛있죠?”

“여기 차돌짬뽕이 죽여요. 오랜만에 뵙게 됐는데 제가 쏠게요.”

차해강 팀장이 양지원 대표를 말렸다.

“아이고, 양 대표님. 여기 제 나와바리 아닙니까? 네가 사겠습니다.”

“아니에요. 오랜만에 반가운 분도 만나고 제가 후배된 도리로 사는게 맞죠. 앉으세요.”

한 회사의 대표가 후배가 되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차해강 팀장도 신기한지 조금 과하게 놀라며 말했다.

“아, 그런가요? 임다은 과장님이 선배셨구나.”

“한참 선배시죠. 저야 할아버지가 회사에서 손 떼시고 이 바닥 들어온거니까. 그때 임다은 과장님께서 저를 단단히 교육해주셨는걸요?”

양지원 대표는 양장피 한 젓가락을 입에 물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임다은 과장을 쏘아보았다.

차해강 팀장은 그 ‘단단히 해주었던 교육’이 어떤 교육이었는지는 묻지 않고 임다은 과장의 시선을 피해 짬뽕에 집중했다.

임다은 과장은 정주리 대리를 옆에 앉게 한 후 양지원 대표에게 물었다.

“양 대표님을 여기에서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혹시 ‘동네 아저씨’ 배급 때문에 메가플렉스에 압력을 행사했다거나 하는건 제 우려겠죠?”

“우려 맞아요. 빛그림이 얼마나 크다고 메가플렉스를 압박하겠어요? 그런일은 LS엔터 정도는 되야 하는거 아닌가?”

“우리도 그런 일은 하지 않는데, 제 말을 오해하셨나보군요.”

“오해... 으음... 뭐 그렇게 생각하신다면야...”

양지원 대표는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네까짓게 여기서 뭘 더할 수 있겠냐는 표정이었다.

임다은 과장은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고작 1년 전까지만 해도 상업영화로 국내 배급시장에서는 명함 한 장 내밀지 못하던 빛그림이 감히 LS엔터를 상대로 이런 배짱을 부릴수 있는건지 이해가 안 됐기 때문이다.

이것 뿐이 아니었다.

양지원 대표야 정신이 훼까닥 해서 이상한 짓을 할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메가플렉스는 이러면 안 되는거였다.

LS엔터는 단순히 영화 배급만 하는 회사가 아니었다.

영화, 드라마 제작과 케이블 방송까지 가지고 있는 국내 제일의 엔터사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뒤통수를 치는 행태는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지금 임다은 과장은 이 상황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최대한 냉정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일단 식사가 나올때까지 아무렇지도 않은척 입을 다물고 있다가 짬뽕을 입에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못 느끼며 식사를 마쳤다.

“어머, 반 넘게 남기셨네. 입에 안 맞아요? 여기 괜찮은데.”

양지운 대표가 얄밉게 물어보자 임다은 과장은 티슈로 입을 닦으며 미소지었다.

“제가 입이 좀 짧아서요. 차 팀장님?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럼요. 말씀하세요.”

임다은 과장은 또 한번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차해강 팀장이 엉덩이를 붙이고 어디 말해보라는 제스처를 취했기 때문이다.

임다은 과장은 확신했다.

이 모든 결정은 차해강 팀장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된 일이 아니라는 걸 말이다.

그때 양지원 대표가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걱정 말아요. 내가 일어날 거였으니까. 나 그렇게 눈치없는 여자 아니라구요. 그럼 다음에 또 보죠. 차 팀장님 오늘 식사 잘 했어요.”

차해강 팀장은 어쩔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유, 제가 사야 하는데 말입니다.”

“아니에요. 그럼 말씀 나누세요.”

양지원 대표가 룸에서 나가자 차해강 팀장의 얼굴이 싹 바뀌었다.

지금까지는 임다은 과장 일행을 두고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였지만 양 대표가 나가니 얼굴에 잔뜩 미안한 얼굴로 변해있었다.

“미안하지만 지금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미안해요.”

임다은 과장은 화가 치밀었지만 오로지 차해강 팀장의 결정이 아니었음을 눈치채었는지라 차분히 물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거예요? 지금 우리 영화 반응 좋은거 알잖아요? 오늘 백만 넘어가는거 모르세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객수가 조금씩 눈에 띄게 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 역시 틀린 사실은 아닙니다.”

관객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극장에서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고 하니 반박할 수 없었다.

“차 팀장님.”

“알아요. 이미 LS엔터와 구두상으로 합의한 내용이 있었죠. 하지만 위에서는 빛그림의 ‘동네 아저씨’의 대박 흥행이 분명하니 굳이 상대 영화관에 뒤쳐질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영화관이 가만히 앉아서 들어오는 영화를 상영하고 돈만 받아가니 이런 꿀같은 사업이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의외로 영화관마다 매출과 순이익이 차이나는 경우가 있다.

아예 개봉 전부터 블록버스타라고 티를 팍팍 내는 영화라면 모르겠지만 대부분은 영화들은 흥행할지 아닐지 애매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예매율에 따라 스크린수를 계속 조율하지만 그걸 실시간, 또는 매일 막 바꿀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어느 관객이 영화를 보려고 예매를 해놨는데 영화관에서 관객이 많지 않다고 그 시간대에 상영할 영화를 다른걸로 돌려버리면 이미 예매한 관객은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그렇기에 개봉전부터 경쟁 영화관이나 배급사 직원들과 치열한 눈치싸움과 머리싸움이 진행될 수밖에 없다.

“팀장님이 말씀하시는 위가 정확히 어딜 말씀하시는거죠?”

차 팀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과장님, 제가 말씀드릴수 있는건 안타깝지만 다음주부터 ‘동네 아저씨’의 스크린을 조금 늘릴 수밖에 없다는 것과 앞으로 예매율을 지켜보다가 상황이 나아지면 언제든 ‘트루 러브’의 스크린을 늘려주겠다는 것, 이 두가지가 답니다. 그 결정이 어디서 나왔는지까지 알려드릴 의무도 없고 그걸 캐물으시는건 메가플렉스의 의사결정에 간섭을 하시겠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이건 선을 넘으시는 거죠.”

임다은 과장은 황급히 정정했다.

“아니에요. 오해하게 만들었다면 미안해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었어요. 너무 의외여서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어요.”

“알겠습니다. 그 얘긴 못 들은걸로 하겠습니다.”

차해강 팀장이 수긍하고 넘어갔지만 임다은 과장은 여기서 그냥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럼 이거 하나만 말해줄수 있어요? 도대체 빛그림에서 어떻게 했길래 위에서 생각을 바꾼거죠? 그 정도는 말해줄 수 있잖아요. 제가 팀장님이랑 저녁 식사한 횟수가 남편이랑 외식한 횟수보다 많아요. 그러니까...”

“알아요. 더 얘기 안해도 알아요.”

차 팀장은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헹구다가 말을 이었다.

“빛그림 양지원 대표 다시 봤어요. 이제 서른 됐을려나? 나이는 내 막내동생보다 한참 어린데 어떻게 그런 패기가 나왔는지 궁금하더군요.”

“네?”

“DH미디어의 독점 배급계약서를 가지고 와서 스크린 숫자를 제대로 맞춰주지 않으면 앞으로 우리 영화관에 배급을 하지 않겠다고 협박을 했다고 합니다. 전 사실 독점 배급이라는 말도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우리도 황당했어요.”

“허... 그게 말이 되나요? 미친거 아닌가?”

“맞아요. 미친 짓이지. 이게 밖으로 새나가면 빛그림 욕먹기 딱 좋을 겁니다.”

“당연하죠. 앞으로 완전히 갑질의 전형 아닌가요? 당연히 반대를...”

“그런데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아요. 무슨 이유에선지 위에서는 저 가당찮은 요구를 쉽게 들어주었습니다.”

“왜요?”

“무려 3년 독점 배급 계약이에요. 전에 우리가 ‘한강의 괴물’로 얼마만큼의 매출이 나왔는지 아십니까? 200억이 넘어요. 3년간 그 매출을 포기할 수는 없다는게 위에서 내려온 이유였어요.”

“그럼 차 팀장님이 생각하는 진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시는데요?”

차해강 팀장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저도 모르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들리더군요. 위에서는 빛그림 전 대표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다구요. 어쩌면 이번에 양 대표가 우리에게 한 협박... 아니, 제안이라고 해두죠. 아마 외부에도 협박을 받았다는걸 인정하지 않을테니까. 어쨌든 그 제안을 명분으로 삼는거 아니냐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물론 전 그 얘기가 무슨 이야기인지 전혀 모르겠습니다만.”

차 팀장의 묘한 미소로 임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힘으로는 되돌릴 수 없다는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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