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
누가 밟는 사람인가(3)
다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동네 아저씨’의 후반부 작업이 거의 끝나가고 빛그림과 개봉 일정을 잡아가던 도중 뜻밖의 소식이 전해졌다.
“유병세 감독 영화 개봉시기가 정해졌어요. 7월 25일이라고 해요.”
“7월 25일? 우리랑 일주일 차이도 안 나네?”
동훈은 유지은 팀장이 전해준 뜻밖의 소식에 참으로 악연은 악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비슷한 시기에 크랭크인이 들어가긴 했지만 개봉도 비슷한 시기에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에 촬영에 들어갔다고 해도 개봉하는 시기가 겹치는 일은 많지 않으니까.
영화마다 촬영기간이 천차만별인데다가 후반부 작업 역시 천차만별이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CG가 많은 영화 같은 경우는 촬영기간보다 후반부 작업기간이 배이상 길게 가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렇기에 당연히 맞상대할 일은 없을거라 생각했는데...
“제목이 뭐라고 했죠?”
“트루 러브라고 하던데요?”
“트루 러브? 제목 우리 만큼이나 구리네.”
“하하하, 동네 아저씨 제목이 구리다는건 인정하시는 거예요?”
“구린건 구린거니까... 그래도 우린 그 구린 제목을 주연배우 얼굴빨로 반전을 주잖아요. 물론 영화를 보면 액션이 더 죽이다는걸 알겠지만.”
“사실 가장 난적은 우리보다 2주 먼저 개봉하는 헐리우드 액션 영화인 ‘헬보이 4’이긴 해요. 그래도 유병세 감독은 감독님하고 인연(?)도 있고 해서 신경이 쓰여서 말씀드린 거예요.”
“듣고 보니까 저도 헬보이 보단 그게 더 신경쓰이네요. 거기랑 붙어서 지면 속이 어마어마하게 쓰릴 것 같은데...”
이미 페르소나에 케잌도 한번 투척한 적도 있었기에 만약 이번에 맞대결에서 진다면 사무실에 어떤 선물이 날아들지 예측할 수 없었다.
아마 보게 된다면 심히 멘탈에 타격이 있을게 분명했다.
“빛그림 쪽에다 말해 볼까요?”
“아니요. 이미 일정 다 잡혔는데요, 뭐. 그리고 마땅히 들어갈데가 없잖아요. 8월 하순에 헐리우드에서 마블 시리즈가 날아오고 9월부터 10월 중순까지 엄청 빡빡하던데.”
“아예 10월 말이나 11월 초로 미루는것도 방법 아닐까요?”
“그때는 시즌이 아니라 그닥 끌리지가 않네요. 그리고 유병세 감독 무서워서 굳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도 않고... 괜히 쫄려서 피하는 것 같잖아요. 피하려면 저쪽이 피해야지.”
“그건 그렇죠. 괜히 감독님 심기가 불편하실까봐 물어봤어요.”
“편한건 아니지만 그냥 그대로 갑시다. 그리고 이제 내일 출발인데 다들 짐은 다 쌌대요?”
베트남 단체 여행 비행기가 뜨는 날이 드디어 내일로 다가왔다.
지금 직원들 손에 일이 잡힐리 없다고 생각했다.
유지은 팀장이 배시시 웃는다.
“그럼요~ 다들 퇴근 시간만 기다리고 있어요.”
“그럼 어차피 오늘 일도 별로 없는데 조기 퇴근 합시다. 처리해야 할 일이 남은 직원은 남구요.”
“아마 있어도 없다고 할 테지만 중요한 일은 없어요. 이미 거의 모든 일이 우리 손을 떠났으니까.”
“그럼 3시에 퇴근하라고 하세요.”
“넵! 알겠습니다.”
유지은 팀장이 나가자 동훈은 재빨리 핸드폰을 꺼냈다.
아까부터 계속 톡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선글라스 어때요?]
[분위기 끝내주는 음식점 찾았음. 대박 맛집이래요!!!]
[이거 새로 산 수영복, 너무 야한가? ㅋㅋㅋㅋ]
수많은 사진에 톡이 수십여개가 와 있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띄는건 새로산 수영복을 입고 조금은 수줍게 브이를 그리고 있는 은정의 모습이었다.
지금까지 그저 마른 체형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 어느 정도 볼륨이 있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절로 눈이 번쩍 뜨였다.
비키니가 아닌 허리가 드러난 원피스 수영복이라 조금 아쉽기는 했지만 충분히 예뻤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얼마나 이번 여행을 기대하고 있는지도 충분히 느껴지고 있었다.
[응 예쁘다. 얼른 정리하고 오늘 일찍 자라. 내일 오전 비행기라 새벽부터 정신없을거야.]
톡을 보내놓고 나서 동훈은 컴퓨터와 책상을 정리하고 대표실을 나섰다.
“다들 수고하고 일찍 퇴근해서 내일 늦지 않게 인천공항에서 봅시다.”
“네~ 들어가세요~”
“들어가세요~”
동훈은 싱글벙글하는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회사를 나와 분당의 한 음식점으로 향했다.
점심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도 이미 약속장소에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여기야. 여기.”
저 멀리서 양호민 감독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동훈이 재빨리 다가가니 그의 옆에 마흔이 안 돼 보이는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십니까. 파라곤 파트너스 조윤혁 실장이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동훈은 내심 당혹스러웠다.
오늘 양호민 감독이 꼭 소개시켜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길래 왔는데 그게 파라곤 파트너스 사람일 줄이야...
아직 완벽히 밝혀진 사안은 아니지만 그래도 회사 내부적으로는 한때 파라곤 파트너스가 DH미디어를 노리고 스크린을 싹 쓸어 모았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이건 동훈이나 유지은 팀장 외 몇몇만 알고 있던 상황이라 양호민 감독은 모르고 있었다.
“앉으시죠.”
“네... 소개 시켜주고 싶다는 분이 투자자였어요?”
동훈이 묻자 양호민 감독이 멋쩍게 웃었다.
“하하하, 내가 장 감독한테 참 염치가 없어서 말이야.”
“무슨 염치가 없어요?”
“막무가내로 찾아와서 영화 만들어 달라고 떼쓰고 지금 월급까지 착실히 받아가는 상황이라 조금 안정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회사에 보답을 해주고 싶은데 머리에서 그런게 잘 안 나와.”
“그럴 수 있죠. 마음대로 다 머릿속에서 나오면 엄청난 천재일 겁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 내가 하고 싶은 영화는 흥행과는 거리가 멀 것 같거든.”
“어떤 소재인데요?”
“금융에 관한 이야기야. 리먼브라더스 사태때 국내 금융시장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고 싶거든.”
“아...”
지금껏 국내에서는 금융권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많지 않았고 그 가운데서 성공한 영화는 전무한 실정이었다.
돈이나 보물을 훔치는 케이퍼물이야 성공을 거둔 적도 있었지만 이건 장르가 아예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회사 돈으로 영화를 제작해달라고 말하기가 너무 염치 없더라고.”
“그래서...?”
“여기 파라곤 파트너스에서 내 영화 소재를 듣고는 투자하고 싶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소개를 시켜주려고 했지.”
“그러셨구나.”
한 마디로 자기가 만들 이번 영화가 성공하기 힘드니 회사 돈이 아닌 외부 투자사의 돈으로 영화를 만들게끔 해달라는 말이었다.
회사 입장에서 보면 이번 양호민 감독의 부탁은 거절할 수가 없는,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고마운(?) 부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이번에 ‘한강의 괴물’로 천만 영화가 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기에 이번 영화가 성공할 것 같지 않아도 그가 요청한다면 거부하기가 난감했을게 분명했다.
아마 내부 회의를 거쳐 제작비를 최대한 줄이고 손실을 최대한 줄이는 방향으로 제작을 지원했을게 뻔했다.
그런데 그걸 알고 미리 외부 투자자를 데려온 셈이니 이렇게 고마울데가 있을까.
다만 문제는 파라곤 파트너스다.
소재만 들어도 뭔가 재미없다는 기운이 팍팍 느껴지는데 굳이 이런 영화를 투자하겠다고 다가온게 이상했다.
말이 영화 투자지 한번 투자하면 최소 수십억을 던져야 하는데 그 큰 돈을 날릴수도 있는 영화를 투자하겠다니...
그것도 양호민 감독이 회사 대표 앞에서 손해볼 확률이 커서 외부 투자자를 데리고 왔다고 대놓고 말한다는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일단 식사부터 하시죠.”
“아, 네. 맛있게 드세요. 감독님도 맛있게 드시구요.”
“장 대표도 맛있게 먹어. 일단 들자고.”
조윤혁 실장은 직원이 가져온 전복삼계탕을 동훈 앞으로 옮겨 놓으며 사람 좋게 미소지었다.
일단 음식 앞에 두고 침 튀기며 말할 수 없는 상황이라 음식에 집중했다.
한참 뒤, 식사를 끝내고 후식으로 내온 매실차로 입을 헹군 후 동훈이 물었다.
“영화 소재가 투자사에게 그리 매력적이지 않을 텐데 굳이 투자하고 싶었던 이유가 있을까요?”
조윤혁 실장은 자세를 바로하며 입을 열었다.
“DH미디어는 현재 충무로를 이끌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은 혁신적인 시도를 하고 있는 제작사입니다. 모든 이목이 DH미디어로 쏠리고 있고 DH미디어에서 제작하는 영화는 수많은 이들이 개봉 전부터 주목하고 있죠. 양호민 감독님 같은 경우는 전작에서 천만 관객을 이끌어내며 일약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감독님으로 떠올랐습니다. 소재? 그리 친숙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양호민 감독님과 DH미디어에서 제작한 작품이라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관객들에게 어필할만 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긴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흥행을 크게 비관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말이었다.
“시나리오는 보셨구요?”
“물론입니다. 비록 무거운 소재이긴 하지만 그 안에 얽힌 드라마는 충분히 관객들에게 인상깊게 다가갈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동훈은 양호민 감독에게 시선을 돌렸다.
왜 저 시나리오를 나에게 보여주지 않았냐는 물음을 담고서 말이다.
“일단 보여주는 순간 내가 회사를 압박하는게 아닌가 싶어서 그랬지. 내가 지금까지 월급 받아가면서 회사에 있는게 생전 처음이라 회사에서 뭐라도 만들자는 생각에 막 썼는데... 이게 나는 마음에 드는데 회사는 영 벌로일 것 같은거야. 그래서 좀 이곳저곳 알아봤었어.”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독님이 너무 제 생각을 해주셨네요.”
안타깝기도 하고 그 마음이 너무 고맙기도 했다.
들어보니 시나리오도 크게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그냥 우리끼리 하자고 하려다가 이 자리까지 나온 파라곤 파트너스 직원을 다시 보고는 마음을 바꿨다.
“솔직히 난 의심을 하고 있었어요. 전에 우리 영화가 애니메이션이랑 한번 붙을 때가 있었는데 당시 좀 안 좋은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러셨습니까? 도대체 어떤 소문을...?”
조윤혁 실장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은 전혀 알지 못한다는 분위기를 팍팍 풍겼다.
그것이 연기이든 아니든 지금에 와서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나간 이야기니까 접어 두고 그럼 어느 정도나 투자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조윤혁 실장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감 어린 말투로 말했다.
“회사에서는 DH미디어에서 원하시는 만큼 투자할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전액을 원한다면?”
“총 제작비 전액 지원할 수 있습니다.”
“리스크가 클 텐데요?”
“양호민 감독님과 DH미디어입니다. 국내에서 이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성공률을 보장하는 작품은 많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훈은 조윤혁 실장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시죠.”
“감사합니다.”
그는 투자를 해주는 갑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동훈은 저들의 속내가 어느정도 짐작이 갔다.
이번 영화로 차기, 차차기 영화에 투자하며 DH미디어 제작 영화에 발을 깊게 담구겠다는 의도일 것임을 말이다.
다만 저들은 아직 알지 못하는게 분명했다.
지금 헐리우드 제작사와 이미 앞으로의 투자 방향에 대해 많은 논의를 하고 있음을...
저들은 앞으로 절대 DH미디어의 제 1 파트너가 될 수 없음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