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02화 (102/116)

# 102

누가 밟는 사람인가(2)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동훈의 ‘동네 아저씨’ 촬영이 마무리 되고 후반부 작업에 돌입하며 빛그림과 개봉 일정에 대해 의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회사 직원들의 최대 관심사는 동훈의 작품도 아니고 이후 박광효 감독의 연출작도 아닌 바로 포상여행이었다.

“다낭? 거기가 괜찮아요?”

유지은 팀장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은정이 나섰다.

“여기가 나름 싸고 괜찮아요. 가장 핫한 곳은 아닌데 한국인들이 많이 가서 편하게 관광할 수 있대요. 가격도 그리 비싸지 않고.”

“네가 제일 신나 보인다.”

“헤헤... 너무 티났나?”

유지은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해외 로케이션 헌팅하는 회사 대표가 우리투어 사장의 매제래요. 그래서 그쪽이 연결시켜 줘서 하는 거라 금액도 상당히 저렴해요. 호텔도 나쁘지 않구요. 3박 5일 일정 괜찮으시죠?”

“그 정도면 적당하죠.”

“감독님 또 박광효 감독님이랑 다음 작품 준비 들어가시면 시간 없으니까 이번 ‘동네 아저씨’ 후반부 작업 끝나자마자 바로 가는걸로 하는게 좋겠어요. 개봉 전까지는 딱히 할 게 없으니까.”

그 시기가 되면 제작사는 손을 떼고 배급사에게 바톤을 넘긴다고 보는게 맞았다.

개봉하고 나서도 제작사에서는 딱히 할 일이 없어 느긋하게 다음 작품 준비나 몰두하면 되겠지만 이미 박광효 감독과의 합작영화가 준비되고 있었기에 너무 늦으면 곤란했다.

“그렇게 합시다. 다들 즐겁게 놀다 왔으면 좋겠네. 아, 그리고 임현주 영입이 언제죠?”

“다음주 목요일이에요. 변호사께서 확인했는데 정확히 다음주 수요일까지가 WAS엔터와 계약만료일이래요.”

“그럼 그 전까지 기사 내지 말고 조용히 있어요. 괜히 WAS엔터 심기 거스르지 말고.”

유지은 팀장은 마음에 안 드는지 볼에 바람을 집어 넣다가 말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이미 그쪽하고 우리 변호사가 이야기까지 다 했는데.”

“그래도 사람 마음이라는게 그렇잖아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싶다가도 한번 마음이 상하면 계속 엇나가고 싶은거.”

“그렇긴 하지만... 너무 봐주시는거 아니에요? 현주 씨한테 들어보니까 말은 안해도 꽤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것 같던데요?”

“말 안 했으면 모른 척 넘어갑시다. 어쨌거나 WAS엔터와 현주씨가 같이 성장해온건 맞으니까. 끝날때까지는 예의를 차려주자구요.”

“아우... 솔직히 현주 씨가 WAS엔터랑 쫑내겠다고 말 나온 시점부터 광고를 몇 개나 했는 줄 아세요? 다섯 개에요. 그것도 현주 씨가 별로 좋아하는 않는 브랜드 광고까지 했대요.”

동훈은 그 소리에 유 팀장 옆에 서 있는 김태현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요?”

“네.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답니다.”

“흐음... 그 성격에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해서 하기 싫은 광고를 억지로 했다고?”

“말은 하지 않는데 아무래도 사이가 더 틀어지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거 같아요. 어쨌든 1년 단기 계약이라서 이번 한번만이라는 생각으로 해준 것 같습니다.”

“금액이 어느 정도인데요?”

“광고만 다섯 개에 드라마 하나를 찍어줘야 할 것 같아요.”

“드라마까지?”

“네. 내년 초에 촬영 들어갈 것 같구요. MBS에서 편성 확정 받았답니다. 16부작이고 출연료는 회당 9천이라고 하네요.”

“회당 9천? 쎄네. 와... 그럼 얼마에요?”

“광고랑 드라마 출연료까지 해서 대략 40억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아주 제대로 뽕을 뽑네.”

“그래도 현주 씨가 그중 70% 가져가니까 아까 했던 말처럼 이번 한번이라고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어쨌거나 WAS는 막판에 앉아서 12억 땡겼으니 크게 기분 나쁘진 않겠네. 알겠어요. 본인이 말 안하니까 괜히 파고들지 맙시다. 그리고 현주씨 마음 많이 상했을테니까 잘 달래주고 다음주 계약 잘 진행하도록 해봐요.”

“알겠습니다.”

사실 달래주는건 아직 만나서 인사도 제대로 못해본 김태현 실장이 아니라 명진이가 더 잘하겠지만 굳이 그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동훈은 또롱또롱한 눈으로 관광코스를 고민하는 은정을 두고 회의실을 나와 박광효 감독의 작업실로 향했다.

똑똑...

“저예요. 들어갑니다.”

“어, 그래.”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약간의 땀냄새와 발냄새가 섞인 묘한 냄새가 동훈을 반겼다.

그래도 은정이 나름 화분과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로 꾸며주긴 했는데 그 모든 걸 박 감독의 압도적인 덩치가 모두 가려버리고 있었다.

“어느 정도나 진행됐어요?”

“계속 고민하고 있기는 한데 큰 진척은 없어.”

“이번 주말에 빈센트 리치 앤 컴퍼티에서 사람 들어온대요.”

“어? 정말?”

박 감독은 화들짝 놀랐다.

아직 완벽하게 준비되지 못한 상황에서 미국 투자자가 온다고 하니 낭패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네. 긴장할거 없어요. 시나리오 보려고 들어오는거 아니니까. 그거 볼거면 우리가 메일로 전해줘도 되는데 굳이 비행기타고 들어올 이유가 없잖아요.”

그제야 박 감독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후... 그렇겠네. 그럼?”

“저랑 미팅을 하고 싶은가봐요. 회사도 한번 보고, 우리쪽 스탭 실력도 확인하고 싶은거죠.”

“투자자라며? 보면 뭘 알기는 하는거야?”

“헐리우드쪽은 투자자가 각본을 직접 손대기도 하니까 오히려 어지간한 한국쪽 제작사보다 더 빠삭할 수 있어요.”

“우리랑 헐리우드는 환경이 많이 다른데?”

“이해 못하면 그건 만나서 설득을 시켜야죠. 별일은 없을 겁니다. 우리 스탭들 이 바닥 최고잖아요.”

“뭐 그렇긴 하지.”

박 감독도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할만큼 지금 DH미디어에 소속된 스태프들의 실력은 한국 최고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DH미디어가 촬영 스탭을 정직원으로 받기 시작하면서 충무로에서 밥 먹고 살고 있는 수많은 팀들이 몰려들었다.

이제 막 기술을 배우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업계에서 10년 넘게 일하면서 베테랑으로 인정받는 사람들까지,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몇 명 없는 인사팀이 엄청나게 고생을 했었다.

처음에는 경력직과 이제 막 이 바닥에 발을 들여놓은 초짜들을 적절한 비율로 입사시키자고 마음 먹었지만 막상 입사를 받기 시작하니 일이 생기면 작업 진행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 위해 경력직의 비율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차근차근 기술을 배울 스탭을 모집하고 있기는 하지만 어쨌든 DH미디어가 보유하고 있는 촬영, 조명, 미술팀들은 한국 영화계 최고의 팀들이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일단 어느 정도나 진척이 있는지 체크만 한 거예요. 잘 안나온다고 막 억지로 만들 필요는 없어요.”

“그래도 한국까지 왔는데 뭐라도 내밀어야 할 거 아니야?”

“괜찮아요. 그쪽도 백억 넘는 돈을 투자하는데 일단 어떤 회사인지, 대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확인해야 하는게 당연한거잖아요.”

“그건 그렇긴 한데...”

“그런 차원에서의 방문이니까 별다르게 생각할 건 없어요. 감독님도 미팅 자리에 나올 거니까 그렇게 알아 두시구요.”

“나도? 완성된 시나리오 없이?”

“네. 연출할 감독인데 만나서 악수는 해야죠. 밥도 먹고.”

“아이씨, 긴장되는데...”

“영어도 못하면서 뭘 긴장해요? 통역사 둘거니까 편하게 있다가 밥 맛있게 먹고 헤어지면 됩니다.”

“그래도 될까?”

“네. 한우 고깃집 가서 아주 혀를 녹여버릴라니까 형은 그냥 가서 배터지게 드시면 됩니다.”

“흐흐... 그럼 나야 고맙지.”

“아, 그리고 최순길 감독은 어때요? 요즘 연락해봤어요?”

“아... 실은 얼마 전에 만나서 술 한 잔 했어.”

동훈은 궁금함에 작은 간이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뭐래요?”

“너한테 미안하대. 당시에는 화가 많이 났는데 괜히 자기 때문에 일이 커져서 미안하다고 하더라구. 그리고 유병세 그 씹새가 막 기사를 터뜨릴지는 전혀 몰랐대. 솔직히 그리고 순길이 형이 그럴 사람이 아니야. 진짜로... 가끔 욱하기는 하는데 사람에 대해서 막 악의를 품는 사람이 아니라니까. 그 정도로 독한 사람이 아니야.”

동훈도 그렇게 생각하긴 했었다.

“그건 알겠어요. 그래서요?”

“그래서긴... 그냥 너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대. 그리고 그 일 이후로 페르소나에도 안 나간대.”

“그래요? 그건 좀 의외네.”

몇 년 동안 돈도 못 버는 그가 페르소나에 붙어 있는 이유는 별다를 것 없었다.

아침마다 출근할 곳이 있다는 것과 붙어 있으면 가끔 만나는 유병세 감독이 밥이라도 사주기 때문이리라.

추가로 유병세 감독을 통해 간간히 얻게 되는 충무로의 정보들이 자신이 아직도 영화계 일원이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좀 의외더라고. 그 형이 페르소나 안 가면 어디서 작업하겠어. 집밖에 더 있나?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 형이 가족들하고 그렇게 다정다감한 사이가 아니거든. 그 트러블 때문에 아침 일찍 나와서 밤 늦게 들어가는데 어쩌려고 그러는지 모르겠어.”

그 당시 최순길 감독의 시나리오를 생각하면 페르소나가 작업실이라고는 하지만 막상 최순길 감독이 거기서 얼마나 작업했을지 안 봐도 뻔했다.

“작업은 한 대요?”

“음... 나도 사실 형이 시나리오 작업하는 건 별로 못 봤거든.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좀 달라. 확실히 너한테 충격을 받기는 했던거 같아.”

“그런가?”

“독하게 말하긴 했나봐? 뭐라고 했는데?”

“엄청 독하게 한 건 아니에요. 대략 90년대 작품 같다고 했지.”

박광효 감독은 입을 떡 벌렸다.

“퇴물이라고 한 거잖아? 와... 너 진짜 간 크다. 순길이 형한테 그렇게 말한 사람이 없었는데. 병세 그 새끼도 그렇게는 말 못 했거든.”

“그렇게 말 안하면 평생 그 수준을 못 벗어날 것 같아서요. 그리고 애초에 능력이 없는 사람이면 모르겠는데 솔직히 최순길 감독님 연출에 대한 감각은 있는 사람이잖아요.”

“물론이지. 그 형 진짜 감각 있어. 그거 모르면 진짜 눈 없는 거야.”

“그런데 시나리오가 너무 별로야. 단순히 별로라고 하면 이게 다 설명이 안 될 정도로 많이 부족해요.”

“그렇게 힘들어?”

박광효 감독은 안타까운 표정이다.

아무래도 자신은 여기서 월급 받으며 편하게 작업하고 있는데 같이 어려운 생활을 보내던 최순길 감독은 많이 힘들어하니 마음이 안 좋은 것 같았다.

“네. 솔직히 뭘 어떻게 도와드리면 나아질 수 있을지 감도 안 와요.”

“아... 그 형이 진짜 감각 있는데...”

“그분은 자기가 시나리오 쓰면 안되는 것 같아요. 그러지 말고 정말 도와주고 싶으면 영화 말고 드라마를 해보라고 하는게 어때요?”

“드라마? 에이...”

아직도 대부분의 영화감독은 드라마 연출 하는걸 영화 연출보다 급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영화감독을 오래한 사람일수록 그런 경향이 심했는데 최순길 감독도 그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몇 년째 작품 못한다면서요? 자기가 쓰는 시나리오는 영 별로니까 차라리 드라마 연출을 하면 난 괜찮을 것 같은데? 연출 감각은 확실히 있으니까... 그 재능 아깝지 않아요?”

“그런데 너 말대로 드라마 연출 하겠다고 마음 먹았다 치자고. 일이 었어야 할 거 아니야.”

“그건 뭐... 자기가 찾아 봐야죠. 드라마 제작사 노크해야지, 별 수 있나.”

“형이 그러려고 할까?”

“우리 회사 와서 시나리오 보여준 용기면 못할 거 없지 않아요? 어쨌든 이건 우리 회사 일도 아니고, 난 그냥 보기 그래서 내 생각을 말해준 거예요. 안 됐잖아.”

“그래, 안 됐지. 알겠어. 내가 한번 말해볼게.”

“그래요, 그럼.”

동훈이 작업실을 나가려는데 박 감독이 다시 불렀다.

“그런데...”

“네?”

“나 정장 입어야 하나? 맞는 정장이 없는데.”

“결혼식 갑니까? 정장은 무슨... 예술가 답게 프리하게 입고 나와요. 대신 옷은 좀 빨고.”

“킁킁... 냄새 나?”

박광효 감독은 자신의 옷을 잡아댕겨 코에 갖다 대며 민망해했다.

“조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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