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101화 (101/116)

# 101

누가 밟는 사람인가(1)

“화장품? 벌써 화장품 CF가 들어와요?”

동훈은 맞은편에 앉아 브이자를 그리고 있는 은정을 슬쩍 쳐다봤다가 다시 김태현 실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네. 은정 씨가 이번 작품이 첫 작품도 아닌데다가 지금 반응 엄청 핫한거 아시죠?”

“그건 알고 있어요.”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도 ‘건축학 원론’은 성인이었을 때 배우보다 대학생 역을 맡았던 배우가 더 주목받았다.

그 싱그러운 첫사랑의 느낌을 완벽하게 소화해 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영화 마케팅의 선봉에 섰던 인물은 임현주였지만 나중에 가서는 은정이 더 주목 받기도 했다.

영화가 극장에서 내려가고 IPTV로 넘어가면서 은정은 각종 예능에서 많은 섭외 요청이 왔지만 아직 예능에 출연할 시점은 아니라고 생각해 출연을 고사하고 있었다.

이전에 들어왔던 CF는 배우가 출연하기에는 조금 급이 낮은 것들이었기에 아예 거절했었다.

그런 와중에 처음으로 들어온 CF 다운 CF에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젊은층을 타겟으로 새로운 라인을 선보이는데 은정씨가 딱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쪽에서 부르는 금액은 어느 정도예요?”

“1년 계약이고 CF포함 각종 잡지와 배너까지 모든 마케팅에 들어갈 촬영까지 다 해서 6억 4천이라고 합니다.”

“오...”

동훈은 감탄사를 내뱉자 은정이 다시 한번 브이자를 그린다.

“기분좋은 출발이긴 하지만 이게 끝은 아닙니다. 광고회사 쪽에서 계속 은정 씨 스케줄을 문의하고 있기 때문에 월말 즈음에는 한 두 개 더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장난 아니네.”

CF 하나로 매출 6억을 찍는걸 경험하니 왜 연예인 매니지먼트 회사가 우후죽순으로 생기는지 알 것 같았다.

“더 잘 돼야죠.”

“알겠어요. 고생했어요.”

“고생은 저보다 은정 씨가 했죠.”

동훈은 뿌듯한 얼굴로 허리를 쭉 펴는 은정이를 보고 미소지었다.

“고생했다.”

“이 정도는 기본이죠. 저 그리고 요즘 브이로그라고 해서 연예인들 많이 하는거 있는데 들어보셨어요?”

“그게 뭔데?”

“쉽게 생각하면 화상으로 팬들과 만난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저도 그거 해볼려구요.”

동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거 잘못하다가 말 실수라도 하면 역효과 나. 진짜 조심해야 해.”

“믿어보세요. 저 확실한 사람이에요. 실수 안 한다구요.”

동훈이 김태현 실장을 돌아보자 그가 애매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게... 저도 굳이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게 잘 된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이득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마케팅 효과가 상업적으로는 잘 연결이 안 되는 것 같더라구요. 하여튼 요즘 많이들 하기는 합니다.”

“그래요? 흐음... 괜히 일 만드는거 아니야?”

“아니라니까요. 허락해주세요.”

그냥 거절하려다가 워낙 똘똘한 녀석이라 허락해주기로 마음먹었다.

“그래, 실수하지 말고 잘해.”

“넵! 알겠습니다.”

어디서 배웠는지 칼각을 잡고 경례하는 은정 뒤로 문이 열리며 유지은 팀장이 들어왔다.

“대표님, 회의 끝나셨어요?”

“네, 끝났어요. 무슨 일인데요?”

“여기 이것 좀...”

유 팀장이 굳은 표정으로 다가와 핸드폰을 내밀었다.

뭔가 해서 보니 연예 기사였는데 천천히 읽어보니 그 내용이 기가 막혔다.

[영화계에 또 터진 갑질 사태.

선배 감독을 향해 폭언을 내뱉은 감독, A모 제작사 대표의 횡포는 다수의 영화계 관계자들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면전에서 폭언, 욕설과 눈앞에서 자신의 시나리오가 찢기는 걸 본 모 감독은 그 충격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현재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감독의 충격적인 실상에 누구도 섣불리 해당 감독에 대해 입을 열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런 사태를 야기한 모 감독은 현재 연락이 되지 않고 있으며...]

“뭐야 이거?”

“전에 최순길 감독 왔을 때 말씀하셨던 내용. 바로 이거죠?”

최순길 감독이 그 사태를 벌이고 떠난 이후 다음날 동훈은 혹시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유지은 팀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아마 그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유 팀장은 기사를 보자마자 동훈의 이야기임을 알지 못했을게 분명했다.

“이거 내 얘기 맞는거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일단 제가 해당 언론사 기자 수배해서 바로 기사 내리라고 할게요.”

“반박보도 준비한거 있으시죠? 왠지 이대로 끝날 것 같지 않은데...”

뭘 노리고 이런 기사를 올렸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모 감독이 자신이라는 걸 의도할 수 있을 때까지는 계속 뭔가가 흘러 나올거라 생각했다.

“네. 그런데 막상 반박 증거라고 할 수 있는게 없으니...”

미리 녹취를 한다던지 해서 준비했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식의 증거가 없으니 이런 보도가 터지면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만큼만 해요.”

“걱정 안 되세요?”

“걱정이 안 되는건 아닌데 저쪽도 증거가 없는건 마찬가지니까요. 뭐 어쩌겠어요?”

“후... 알겠어요.”

유지은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가자 은정이와 같이 기사를 살펴본 김태현 실장이 물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런 식의 보도는 흔히 나오는건데 막상 증거가 없으면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건 그런데... 최순길 감독님 그렇게 안 봤는데 좀 실망이네요. 이 정도까지 할 이유가 있었나? 흐음...”

그러다 문득 박광효 감독 생각이 떠올랐다.

“일단 회의는 이걸로 종료하도록 하죠. 은정이 너도 나가보고.”

은정은 걱정된 마음에 뭔가 말을 하려 했지만 김태현 실장의 눈치를 보곤 고개를 끄덕이며 대표실을 나갔다.

동훈은 곧장 박광효 감독을 불렀다.

그는 양호민 감독과 같이 DH미디어가 임대한 사무실의 한 켠에 작은 공간을 마련해 작업실로 쓰고 있었다.

매일 출근하며 그 작업실에서 각본을 쓰고 유지은 팀장이나 그 밑의 직원과 같이 제작기획서를 쓰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불렀어?”

“혹시 최순길 감독하고 요즘 연락해요?”

“최 감독님? 왜?”

“여기 기사 좀 보세요.”

박광효 감독은 동훈이 내민 핸드폰을 한참동안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형이 왜 이랬지? 이럴 사람이 아닌데...”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솔직히 실망스럽긴 해요.”

“일단 내가 알아볼게. 이건 아니지. 나랑 호민이 형이 다 알고 있는데... 너무하네. 잠깐만, 내가 전화 좀 해볼게.”

박광효 감독은 바로 대표실을 나가며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한참 뒤 들어와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순길이 형이 그러는데 자기가 낸 기사는 아니래. 아무래도 유병세 감독이 낸 것 같다는데? 그리고 자기는 이렇게까지 얘기하지도 않았대. 자기도 기사 보고 완전히 놀라는거 같던데?”

“혹시 녹음 했어요?”

“응, 혹시 몰라서 순길이 형이랑 통화한거 녹음까지 했어.”

“잘 했어요. 그 파일 유지은 팀장에게 주시고 이제 신경 끄죠.”

“응. 그런데 유병세 이 새끼 손봐야 되는거 아니야?”

“하하하! 우리가 무슨 조폭이에요? 손을 보게?”

“아니... 그렇잖아. 이 새끼 하는게 꼭 양아치 같잖아.”

“그렇긴 한데... 일단 그냥 둬봐요. 저렇게 무리하다가 언제 한번 된통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래, 그럼. 아, 그리고 잠깐만 있어봐.”

박광효 감독은 후다닥 대표실을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는데 그의 손에 들린 종이를 보니 각본이 분명했다.

“이것 좀 봐줘.”

“수정했어요?”

“응, 네가 말해준 기본 틀에서 내가 손을 좀 댔어. 헐리우드 영화 ‘머니볼’ 있잖아. 거긴 야구하는 장면이 그렇게 많지 않은데도 드라마를 끌고 가는 힘이 있어서 그 부분을 좀 고려해봤어.”

“머니볼요? 그건 이 작품이랑 분위기가 다른데?”

“아니야. 확 티가 날 정도로 방향을 틀지는 않았어. 대신에 야구하는 장면을 조금 줄이면서 긴장감을 넣는 방향으로 바꾼거지.”

“스토리로 긴장감을 살린다는 거죠? 쉽지 않은데...”

“일단 한번 봐봐.”

동훈은 각본을 처음부터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주인공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는 시작부분은 달라진게 거의 없었지만 프로선수가 되고 주인공을 선발로 끌어 올리는 부분에서의 개연성을 아주 적절하게 메꾼게 눈에 확 들어왔다.

부상과 컨디션 난조로 인한 우연이 겹치며 어쩔 수 없이 주인공이 중간계투로 올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제법 긴장감 있게 표현했다고 할까?

박광효 감독은 ‘머니볼’이라는 영화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했지만 머니볼이 떠오를 정도로 비슷한 부분은 없었다.

어쨌든 마음에 들었다.

“괜찮은데요?”

“정말?”

박광효 감독은 눈을 번쩍 뜨며 되물었다.

“네. 영화의 짜임새가 확 살아난 느낌이에요. 전에는 그래도 영화니까 이렇게 되는게 가능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만들어놓으니까... 나쁘지 않아요.”

“진짜 다행이다.”

박 감독은 자신의 넓직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대로 조금더 해보세요. 빈센트 리치 앤 컴퍼티에서 적극적으로 나오고 있는거 아시죠?”

“그럼. 나 요즘에 잠 세 시간 밖에 안 잔다. 진짜 노력하고 있어. 내가 이 정도로 노력해본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라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게 각본에서 보이네요.”

동훈은 왠지 박광효 감독과의 콜라보도 성공적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아니... 두 번째 준비한 거 있잖아.”

유병세 감독은 황당하기 그지 없었다.

아침에 기사를 띠울 때까지만 해도 하얗게 질릴 장동훈의 얼굴을 상상하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었는데 기사가 올라간지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기사가 내려갈거라는 소리를 들을줄은 몰랐었기 때문이다.

장동훈에게 제대로 똥 한바가지를 끼얹어 주려고 했는데 이렇게 쉽게 비껴나갈줄이야.

“안 됩니다. 그쪽에서 반박 증거 다 가지고 있다고 해요. 아니, 그것도 모르셨습니까?”

“무슨 반박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데?”

“최순길 감독님이 직접 말한 음성녹음 파일이라고 하는데 정확한건 말 안 합니다. 그런데 상황 딱 보니까 두 번째 꺼 터뜨리면 저 감당 못할 것 같아요. 이쯤에서 내려야겠습니다.”

“야, 이러면 안 되지. 나랑 제대로 해보겠다고 했잖아.”

“죄송해요. 저 이러다 법원 들락거릴수도 있습니다. 감독님이 저 대신 싸워주실거 아니시잖아요. 일단 두 번째 기사는 접겠습니다.”

유병세 감독은 전화기에 대고 버럭 소리질렀다.

“김 기자! 진짜 이러기야? 우리 사이가 그것 밖에 안 돼?”

“죄송합니다. 그리고 첫 번재 기사도 바로 내리겠습니다.”

띠... 띠...

“아, 씨발!”

유병세 감독은 한동안 전화기에 화풀이를 하다가 이내 소파에 털썩 몸을 던졌다.

“최순길이 씨발 뭐라고 했길래 녹음이 돼... 아... 증말...”

이때 그의 전화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유병세 감독은 발신자를 확인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네. 여보세요.”

[유 감독. 촬영은 잘 되고 있나?]

발신자는 대원그룹 대표의 차남이자 대원파트너스 대표인 김강우였다.

“아유, 그럼요. 일주일 정도면 거의 끝날 것 같습니다.”

[내가 기대가 커. 이번 영화 성패에 따라서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는지가 걸려 있으니까 잘 좀 해보라고.]

“그럼요. 이번 영화 분명히 성공할 겁니다.”

[그래그래. 내가 우리 유 감독만 믿는다니까. 그리고 촬영 끝나고 골프 한번 쳐야지. 시간 한번 내라고. 내가 요즘 몸이 너무 뻐근하고 해서 운동을 좀 해야겠어.]

유병세 감독은 욕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여자가 필요하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쇼. 촬영 끝나고 조만간 한번 찾아 뵙겠습니다.”

[그래그래. 기다리고 있을게]

“그럼 들어가십쇼.”

전화를 끊은 유병세 감독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래, 씨발 장동훈이 엿 먹이는게 중요한게 아니지. 이번 영화만 성공하면 내가 너 확실히 밟아줄테니 조금만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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