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0
변하는 사람들(5)
한 달여가 흘러 동훈의 촬영이 중반부를 넘어가고 있을 무렵 태평양 건너 미국에서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진짜 100% 다 투자하겠대요?”
동훈은 믿을 수 없는 얼굴로 물었고 양지원 대표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흔들었다.
“이것 보세요. 그쪽에서 대표님의 자신감을 나쁘게 보지 않은 것 같아요. 당연히 양호민 감독님의 ‘한강의 괴물’이랑 유명진 감독님의 ‘건축학 원론’의 흥행이 도움이 됐겠지만요.”
건축학 원론은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도 그랬지만 막 엄청난 흥행몰이를 하지는 못했다.
380만 관객을 동원하고 저번 주부터 IPTV시장에 풀렸으니까.
천만 영화인 한강의 괴물에 비하면 손색이 있다고 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손익분기점을 한참이나 넘겼고 영화 내적인 작품성도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았다.
첫 데뷔작품으로 이 정도 성적이면 아주 좋은 출발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거다.
물론 명진이는 얼마 전부터 아예 대놓고 현주와 데이트를 한다며 자랑질을 해대고 있었다.
어찌나 얼굴이 좋아 보이는지 거짓말 보태서 5년은 젊어 보이는 것 같았다.
“계약서에요?”
“계약서는 아니고 의향서라고 해야겠죠. 그쪽에서 원하는 조건을 정리해서 보내준 거예요. 추가적으로 투자와 제작, 배급에 관해서 조율해야 할 사항까지 들어 있구요.”
“음...까다롭다고 해야 하나?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좋은 방향이네.”
“그렇죠? 일단 딱 보기에도 분위기가 바뀌었어요. 전에는 그냥 투자하고 흥행수입에 비례해서 돈을 받아간다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이번 작품과 차기, 차차기 작품을 어떻게 투자, 제작하고 어떤 방향으로 배급할지에 대해 직접적으로 논의하자는 내용이니까요.”
“더 깊게 들어온다는 말이죠?”
“그런거죠. 대표님 말씀대로 진짜 파트너로써 대해 주겠다는 뜻이에요. 여기 부분을 보시면 더욱 확실해져요.”
그녀는 두 번째 장 세 번째 줄을 짚으며 말을 이었다.
“차기 투자부터는 모든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의 투자를 최소 50%로 제한한다고 돼 있죠.”
“어? 무조건 50% 이상을 자기네가 투자하겠다고 명시한거네요?”
“네. 어떻게 보면 우리와 한 배를 타겠다고 하는거 아니겠어요?”
동훈은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좋기는 한데... 조건이 갑자기 좋아지니까 확 신뢰도가 떨어지네.”
“저도 그래서 일단 우리가 그쪽 사정을 알아봤어요.”
양지원 대표는 서류 하나를 더 꺼내서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A&P쪽에 투자사들 동향 보고서를 알아보고 싶다고 하니 그쪽에서 보내준 거예요.”
“이런 걸 보내줘요?”
“몇년간 거래했던 신뢰 관계가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막 엄청난 비밀을 보내준건 아니에요. 보시면 아시겠지만...”
보면 알겠다고 했지만 볼 수가 없었다.
전부 영어로 되어 있었기에.
“이건 번역이 안 돼 있는데...”
“아, 죄송해요. 이것까지는 번역하지 못했어요. 나중에 번역해서 다시 보내 드릴께요. 일단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의 대표가 얼마 전에 바뀌었다고 해요.”
“대표가 바뀌어요?”
“네. 실적 부진으로 지금의 대표가 바뀌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저들도 뭔가 이전과는 다른 변화를 추구하는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 대표님의 제안은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헐리우드 제작사의 투자만을 고집했던 기존의 투자 기조를 바꿀 수 있게 해준 불씨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 어렵긴 하지만 대충 이해는 되네요.”
“어쨌거나 거부하지는 않으실 거죠?”
“물론이죠. 합작법인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지속적으로 투자를 하겠다는데 이것보다 좋은 조건을 생각할 수 없는거 아닙니까. 우리가 다 해먹겠다고 할 수만도 없는 거고...”
“그럼요. 혼자 다 먹으려고 하면 체하는 법이잖아요.”
양지원 대표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문득 생각났는지 고개를 들며 물었다.
“아, 그런데 어제 그 무슨 감독 오디션인가? 그런거 한다던데 보셨어요?”
“네. 봤어요. 재밌겠던데요?”
LS엔터에서 사활을 걸고 진행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홍보 방법이나 대상, 인재를 가려내는 과정 등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부분이 있었다.
“확실히 감독님이 회사를 세우고 과거와는 다른 정책을 펼치면서 시장이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거 같아요. 피부로 느낌 만큼요.”
“그렇게 바꿔 가려고 노력하는 중인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걱정이에요. 만약 감독님 회사가 휘청이면 지금까지의 노력들이 다 물거품이 되버릴지도 모르니까요.”
동훈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닐 겁니다. 이미 상황은 변화기 시작했어요. DH미디어가 타격을 받는다고 해도 한번 바뀐 사람들의 인식은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 하지 않을 겁니다.”
“과연 그럴까요?”
“뭐, 아니면 어떻습니까? 그냥 노력하면서 사는거죠.”
동훈이 어깨를 으쓱이자 지원은 가느다란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맞아요. 각자 노력하면서 사는 거죠. 대표님 말씀이 도움이 됐어요. 고마워요.”
“뭐가요?”
“후후, 그런 게 있어요.”
*
“아, 걱정하지마요. 오늘 내가 쏜다니까.”
유병세 감독은 일단의 무리들을 모아놓고 큰소리를 치고 있었다.
이들은 최소 한 편 이상의 히트작을 연출한 적 있는 감독들로 충무로에서 나름 인지도와 인기가 있는 이들이었다.
쉽게 말하면 어느 제작사를 들어가 시나리오를 내밀어도 담당자가 호의를 가지고 맞아주는 감독들이라고 해야 할까?
“선배님, 갑자기 왜 이래요? 해외판권이라도 터졌어요?”
‘닥치고 헤드샷’이라는 액션영화로 인정받은 감독이자 그리고 학교 후배인 김나운 감독이 물었다.
“해외판권은 무슨... 원래 이렇게 자주 모였잖아. 요즘 뜸해서 모이라고 했지. 이제 촬영도 거의 막바지에 접어 들었고.”
“벌써요?”
“요즘 촬영 오래하면 좋은 소리 듣기 힘들잖아. 나도 노력 많이 한다.”
“하하하! 맞아. 요즘 장동훈 감독 때문에 많이 바뀌긴 했지. 아우, 나 그것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어.”
김나운 감독이 궁시렁거리자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터져나왔다.
“야, 나도 죽겠다. 요즘 그것 때문에 제작비 많이 올랐다고 영화도 잘 안 만들어 주려고 한다니까?”
“말도 마. 요즘 1박2일 촬영하면 아주 스탭들이 지랄지랄한데. 세상이 아무 미쳐 돌아가는거지.”
“배우 모시고 촬영하는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이제는 스탭까지 모시고 촬영해야 한다니까? 아니, 시발 감독이 제일 힘이 없어. 에이, 시발...”
유병세 감독은 그들이 불평하는 미소지으며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장동훈이 그래도 대단하긴 한가봐요. 여기 선배님, 후배님들 골치아프게 하는 것도 그렇고 사고도 터뜨리고 다니고...”
유 감독이 말꼬리를 흐리자 이 자리에서 가장 나이 많은 한진태 감독이 물었다.
“사고? 무슨 사고?”
“아... 이거 괜히 고자질하는 모양새라 제 입으로 꺼내기는 좀 그렇습니다. 하하, 그냥 다른 얘기 해요.”
“하던 얘기는 계속 해야지. 뭔데 그래? 너 이러면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잠 못 자.”
한진태 감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유 감독은 내심 웃음이 나오는걸 참으며 말했다.
“괜히 뒷담화 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괜찮아. 뭔데 그래?”
“실은 얼마 전에 최순길 감독이 장동훈이를 만난적 있었대요.”
“최순길? 걔 너랑 같이 페르소나 멤버잖아.”
“네. 그리고 아시죠? 페르소나 멤버 중에 박광효 감독 있었던 거.”
“알지. 그럼... 걔 요즘 뭐하고 지낸다냐?”
“걔 장동훈이 회사 들어갔잖아요. 얼마 전에 기사도 났었는데.”
“그랬어? 난 몰랐지. 그래서 작품 계약 한 거야?”
“작품 계약인지 뭔지... 하여튼 걔가 장동훈이랑 계약한 다음에 최순길 감독을 꼬셨나봐요. 시나리오 들고 한번 가보라고... 최순길 선배 상황 어려운거 아시죠?”
“작품 못한지 꽤 됐지?”
“오래됐죠. 그래서 계속 고민하다가 한번 가봤는데 아주...”
유 감독은 말을 끊고 앞에 가득 담긴 막걸리를 원샷으로 들이키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더욱 궁금해진 한진태 감독이 유병세 감독을 채근했다.
“아주 뭐? 어땠는데?”
“장동훈이가 아무리 요즘 잘나간다고 해도 최순길 선배에 비하면 새파란 후배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데 면전에 대고 최 선배 시나리오를 북북 찢으면서 이런 개쓰레기 같은 시나리오를 아직도 들고 다니니까 아직도 이꼴을 면치 못하는 거라고 하더랍니다.”
유병세 감독의 말이 너무 충격적이었는지 다들 입을 떡 벌리며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짜야? 진짜 그랬다고?”
“최 선배가 그랬다고 하더라고요. 너무 치욕스러워서 사무실에서 내새 술만 드시고 계십니다. 지켜보는 제가 너무 괴롭더라구요.”
이렇게 되니 장동훈 감독을 욕하지 않는게 이상한 상황이 됐다.
“와... 그 새끼 아주 미친새끼네.”
“좀 뜬다고 눈에 뵈는게 없구만. 이거 어떻게 할 방법이 없나?”
“그런 인간은 이 바닥에서 아주 매장을 시켜야 되는데...”
“온갖 착한척, 정의로운척은 다 하더니 쓰레기구만, 쓰레기야.”
한동안 장동훈 감독에 대한 비난이 이어졌고 그 과정을 느긋하게 지켜보던 유병세 감독은 적절하게 분위기가 올라왔다 싶자 다시 나섰다.
“그만하시죠. 솔직히 저도 한방 먹여주고 싶은데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연출자 아닙니까. 더 좋은 작품 연출하는게 제일 좋은 복수 같아요.”
한태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 그게 어른스러운거지. 네 말이 맞어.”
“그래서 말인데... 제가 이번 영화를 끝내고 회사를 하나 세우려구요.”
모든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유병세 감독에게 향했다.
“회사? 제작사 말하는 거지?”
“네.”
“이야... 병세가 이제 대표 되는거야?”
“하하, 누가 대표가 되든 그건 신경쓰지 않습니다. 그저 작품을 꾸준히 만들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싶어서 하나 세우려구요. 우리도 언제까지 투자자들이랑 제작사들한테 눈치만 보면서 시나리오 보여주고 굽신댈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장동훈 감독의 지론을 마치 자신의 평소 지론인 양 말하면서도 유병세 감독의 얼굴은 뻔뻔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렇긴해. 장동훈이도 그렇게 성공시킨 거잖아.”
“비슷한데 방향이 다르긴 합니다. 장동훈이는 무조건 흥행작품을 제작해서 돈 벌어보겠다는 욕심으로 세운 회사니까요. 전 다릅니다. 흥행할 작품이면 좋겠지만 흥행과는 조금 먼 작품이라고 해도 최대한 회사에서 지원해서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으니까요.”
“오... 정말? 그게 가능해?”
이 자리에 참석한 감독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흥행에 상관없이 작품을 만들 수 있게 한다니...
모든 감독들에게 있어 꿈의 제작사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저 혼자서는 힘들겠지만 여기 계신 분들께서 도와주시면 가능할 것 같아요.”
“어떻게?”
“이렇게 좋은 선배님들과 후배님들이 좋은 작품으로 회사를 이끌어주시면 흥행작품으로 난 수익으로 작품성은 있지만 부족한 흥행성 때문에 난 손해를 메꿀수 있게 되니까요. 제 결론은 이렇습니다. 결국 중요한건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내는 것. 게다가 국가 지원금으로 지원을 좀 받으면 충분히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요?”
유병세 감독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음... 일리가 있어.”
“그렇겠네. 그럴수 있겠어.”
유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망에 부풀어 오른 감독들을 보며 내심 그들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었다.
작품을 하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그저 잘 될 수 있다는 자신의 말에 허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발견하고 싶지 않은게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저들은 회사가 망하든 흥하든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줄 곳만 찾는 사람들이니까.
서로가 서로를 보며 호구라고 여기고 있는 이 상황이 그저 웃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