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
변하는 사람들(4)
[임현주 WAS와 재계약 불발! 2달 후 FA 된다]
동훈은 핸드폰에 뜬 기사를 보고 맞은편에서 명진이 따라주는 술을 홀짝홀짝 마시는 현주에게 물었다.
“결국 재계약 안하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나 거기 나올거라고.”
“음... 그래서 갈곳은 정했어요?”
현주는 막걸리를 마시다 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감독님 나 떠보는 거예요? 으음... 나 그런거 싫은데.”
“떠봤다기보다 아직도 우리쪽에 올 생각인지 묻는 겁니다.”
“그게 떠보는 거죠. 장 감독님, 나 머리는 나빠도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여자 아니에요. 마음을 먹었으니까 감독님한테 얘기했던 거고, 설사 그런 마음이 아니라고 해도 일단 입으로 뱉었으니 없던 걸로 뒤집지 않는다구요.”
“알겠습니다. 아니, 난 현주씨가 굳이 우리 회사에 올 이유가 있나 싶어서 그랬죠. 그리고 그거 아시죠? 일단 우리 회사와 계약한 배우들은 기본적으로 우리 회사에서 제작하는 작품과 우선적으로 협상해야 합니다. 물론 싫다는 작품 억지로 떠맡기지는 않을 테지만 그래도 최대한 성의를 가지고 협상에 임해야 하고 만약 시리즈물로 제작할 시에는 차후 연속되는 시즌에도 참여를 해주셔야 해요.”
“이미 명진 감독님에게 들었어요. 인기를 많이 끌어서 다음 시즌에 들어갈 때 출연료를 많이 올릴 수 없다는 것도요.”
“괜찮다는 거죠?”
“네, 상관없어요. 이미 벌어놓은 돈도 많고. 대신 출연료를 급격히 올리지는 않아도 최소한 제 몸값 정도는 주셔야 해요. 이건 돈의 문제가 아니라 내 자존심 문제거든요.”
“하하하,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당연히 기본적으로 현주씨가 받아가는 출연료는 깎을 생각이 없으니까.”
동훈은 미소를 띄우며 말했지만 사실 아직도 그녀가 왜 자신의 회사로 오려고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저 ‘명진이와 잘 되고 있으니 같은 회사를 다니려고 하나?’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이 바닥에서 경력이 몇 년인데 고작 남자 때문에 회사를 옮기지는 않을 것 같았다.
이때 옆에서 눈치를 보며 술잔을 홀짝이던 은정이 물었다.
“이번에 영화 흥행이 순조롭던데, 감독님은 얼마나 흥행할 거라고 생각하세요?”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니 괜히 놀리고 싶었나 보다.
역시나 명진이는 현주의 옆얼굴을 스치듯 보며 말했다.
“손익분기점은 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
“오오... 역시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완전 잘 됐으면 좋겠다. 감독님은 손익분기점 넘으면 뭐 할거예요?”
“나야 그냥 뭐 할게 있나? 다음 작품 구상하고 그런거지.”
“휴가는 안 가세요?”
“아니 뭐...”
이때 현주가 툭 내뱉었다.
“드라마 찍어서 잘 되면 스탭들이랑 다들 해외여행 가잖아요. 우리도 그렇게 가면 안 되나?”
“네? 그, 그건...”
명진이 우물쭈물하면서 시선을 동훈에게 돌렸다.
자신이 결정할 수 없는 문제라는 투였다.
반대로 동훈은 황당했다.
“해외여행은 좀... 돈 엄청 들어요. 스탭들까지 전부 가려면 장난 아닌데.”
“단체관광이라 싸게 갈 수 있지 않아요? 돈도 많으면서, 장 감독님 의외로 짠돌이시네?”
지금껏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한 이후로 누구에게 짠돌이라는 말을 듣고 살지 못했다.
항상 누굴 만나도 밥값과 찻값은 동훈이 계산했고 계약을 맺을 때도 남들보다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다.
최순길 감독에게서 좆같은 학벌에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을 들었을때도 감정의 동요가 없었는데 저 짠돌이라는 단어가 욱하게 만들었다.
“아니, 내가 무슨 짠들이에요? 나처럼 후하게 임금 주는 사장이 어디 있다고?”
“솔직히 짠돌이 맞죠. 이번 영화는 투자를 받은것도 아니고 전적으로 회사 자금으로 만든 거라면서요? 그럼 손익분기점만 넘으면 그게 다 회사 수익인데 고작 몇십명 해외여행도 안 보내주면 짠돌이 아니에요?”
앞의 말은 다 맞지만, 문제는 고작 몇십명이라는 단어였다.
“고작 몇십명이라고 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연출부는 기본이고 촬영팀, 조명팀, 미술팀, 특수촬영에... 거진 쉰은 훌쩍 넘을 것 같은데요?”
“어쨌든 백명 넘는거 아니잖아요.”
“와... 현주 씨 통 크네.”
동훈이 황당한 얼굴로 허탈하게 웃자 그녀가 싱긋 미소짓더니 다같이 술마시는데 여념 없는 스태프들을 향해 소리쳤다.
“장 대표님이 손익분기점 넘으면 해외여행 보내주신대요! 다 같이 박수!”
“우와아!”
“대박!”
“대표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저 멀리서 직원들과 같이 술을 마시다 놀라 달려온 유지은 팀장이 물었다.
“대표님 진짜에요? 괜찮으시겠어요?”
“아니... 아니 뭐 어떡해든 되겠죠. 별거 아니에요.”
“스태프가 몇 명인데 별거 아니에요? 인당 백만원만 잡아도...”
유 팀장이 머리를 짚고는 고개를 흔들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동훈은 한숨을 쉬고 현주에게 말했다.
“와... 회식자리에서 폭탄을 터뜨리시네. 너무한거 아닙니까?”
“나 계약금도 없다면서요? 이거 계약금이라고 생각하고 퉁치세요.”
“후... 그럽시다. 까짓거...”
동훈이 너무 쉽게 승낙해서 의외라고 생각했는지 현주가 눈을 똥그랗게 뜨며 물었다.
“우리 장 대표님, 쿨하시네?”
“이미 여행 같다고 스탭들한테 선언한 마당에 더 걸고 넘어가봤자 나만 진짜 짠돌이 되는거 아닙니까. 명진이 첫 연출작이기도 하고 손익분기점 넘으면 여러모로 의미가 있으니 갑시다. 까짓거. 그런데 동남아를 넘어가면 안 됩니다.”
현주가 피식 웃었다.
“아니 뭐 그럼 두바이라도 가자고 할까봐 그래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현주씨면 그럴 것 같아서요.”
“나 혼자 가는 거면야 몰라도 그 정도로 염치가 없지는 않아요. 아, 오늘 술맛 좋다.”
현주가 막걸리를 마시고 입맛을 쩝쩝 다시며 파전을 입에 가져갔다.
그런데 동훈의 핸드폰으로 톡이 왔다.
보낸 사람은 은정이었는데 내용이 놀라웠다.
[언니가 명진 감독님이랑 같이 여행가고 싶은듯요]
동훈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톡을 보냈다.
[진짜야? 너무 빠른거 아니냐?]
[언니도 서른 넘었는데 뭐가 빨라요? 당연한 거지]
[그런거야?]
[에휴, 우리 감독님 너무 둔하시다]
동훈은 막걸리를 마시며 남모르게 서로를 의식하고 있는 명진과 현주를 흘깃 쳐다보았다.
진짜 그런건가 싶어서였다.
이때 다시 톡이 왔다.
[감독님도 나랑 여행가니까 좋죠?]
동훈은 그제야 자신도 명진이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음을 다시 한번 자각했다.
“그럼 당연하지.”
동훈은 너무도 기쁜 마음에 바로 말해버렸고 순간 현주와 명진이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들의 시선이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
“왜 이것밖에 지원을 안해?”
LS엔터테인먼트 최호성 대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래도 300명이면 꽤 많이 지원했다고 생각합니다. 지원자들을 보면 대학생들도 많고 현자 조감독으로 현업에 종사하는 지원자들이 꽤 되는 편입니다.”
홍한규 실장의 대답에도 최 대표의 일그러진 눈살은 펴지질 않았다.
“감독 오디션인데 조감독들이나 관련학과 대학생들이 지원하는게 당연한 거지, 그게 뭐 대단하다고 열변을 토하면서 자랑하고 있어?”
“죄송합니다.”
홍 실장이 고개를 푹 숙이자 최 대표가 담배 하나를 입에 물면서 말했다.
“야, 홍 실장.”
“네.”
“난 항상 그게 궁금했어. 왜 중국인들중에는 대단한 축구선수가 안 나오는지 말이야. 신기하지 않아? 인구가 14억이 넘는데 손흥민 같은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4대리그에서 주전으로 뛰는 선수가 몇 안 되잖아.”
“그렇죠.”
“난 항상 불안해. 중국이 우리나라를 축구로 발라버리는 사태가 벌어질까봐. 저 많은 인구들 중에 축구 천재 하나 없겠어? 없는게 이상한거야. 지금도 분명히 있다고. 없을수가 없지. 하나가 뭐야? 손흥민 같은 인재가 못해도 백을 넘을걸? 중국인이 유전적으로 체육에 열등한 민족인가? 아니란 말이야. 분명히 있는데 못 찾았거나, 찾았어도 제대로 키워내질 못하는거야.”
“대표님 생각이 맞는 것 같습니다.”
“내가 왜 이런 얘기 하는지 알아?”
“잘 모르겠습니다.”
“숫자가 그래서 중요하다는거야. 숫자가 많으면 분명히 그중에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있어.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재능. 그리고 그런 재능은 이상하게 전혀 엉뚱한 사람에게서 나오기도 한다고. 영화와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 있잖아. 왜 한의사라던가 아니면 에어로빅 강사라든가... 전혀 쌩뚱맞는 사람들.”
홍한규 실장은 그제야 최 대표의 생각이 뭔지를 알았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현재 직업과 학과에 신경쓰지 않고 그저 영화가 좋았던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방향을 연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이제야 내 말을 알아 듣네. 여기 지원자격란에 현재 직업이나 학과 다 없애버려. 그런거 안 본다고 해. 그리고 상금을 조금더 높여라. 요즘 1억이 뭐 큰 돈이냐?”
“그럼 얼마나...”
최호성 대표는 담배를 한모금 깊게 빨아들였다가 내쉬며 말했다.
“후... 5억으로 가자. 로또 수준이면 위에서 너무 금액이 크다고 말이 나올 거 같고 일단 시선을 집중시키려면 상금이 커야해. 5억 정도면 당장 내가 하는 일 멈추고 한번 도전해 볼만 하지 않겠어?”
“그렇습니다. 다른 직업을 하고 있다고 해도 5억이면 한번 도전해 볼만한 것 같습니다. 게다가 지원 자격도 아예 없으니 누구라도 도전해 볼만 하겠네요.”
“그리고 WAS에서는 누굴 대준대?”
“본선부터 WAS엔터 소속 배우들 중에 스케줄 되는 배우들은 적극 지원하겠다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김우진이 최종 라운드에서 배우로 쓸 수 있게끔 하겠다고 합니다.”
“김우진이를? 이야... 고은숙 대표가 마음 단단히 먹었네. 임현주가 FA 된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런가? 되게 적극적이네. 어떻게 생각해?”
홍한규 실장은 잠시 생각을 정리한 후 말했다.
“WAS엔터가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꼽는 대형 기획사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간판은 김우진과 임현주 투톱이었습니다. 그런데 임현주가 나가면서 두 개의 얼굴 중 하나가 날아간 상황이라 안정적인 수입원 확보가 필요한 상황입니다. 특히 톱스타급 이하의 배우들의 작품 계약을 보면 그리 안정적이지 않은 실정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지속적인 계약을 유지하려고 하는건 뭐 추측을 할 것도 없는 현실인지라...”
“그게 목적일텐데... 난 그렇게 해줄 생각이 없거든?”
“네?”
“우리가 왜 한 회사에서 일방적으로 계약을 맺어줘야 해?”
“그럼...?”
“생각해봐. 이거 잘 되면 여기서 스타 감독이 몇 명이나 나오겠어? 홍 실장, 그 프로듀스인가 뭔가 하는거 봤지? 무려 데뷔 멤버가 열명인가 열한명이가 그렇잖아. 우린 못해도 최소 3명의 스타 감독은 만들어야 해. 그게 최소한의 목표라고.”
“세 명의 감독이면...”
“감독 셋이 연출하는 작품을 찍으려면 최소 A급 배우로 십수명이 필요해. 그걸 WAS엔터에서 다 공급하겠다고? 그건 너무 놀부 심보 아니야?”
홍 실장은 내심 최 대표가 더 놀부 심보라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맞습니다. 다 먹겠다는건 놀부 심보죠.”
“적당히 계약서 만져. 너무 노골적이게는 하지 말고.”
홍 실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알겠습니다. 법무팀에게 확실하게 말해놓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