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변하는 사람들(3)
촬영을 마치고 사무실에 도착하니 시각이 정확히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늘은 이상하게 촬영이 힘들어서 집에 들어가서 푹 자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 없었다.
박광효 감독의 부탁 아닌 부탁 때문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자신의 선배가 찾아온다는데 차마 피곤하니 다음에 오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 왔어?”
페르소나에 발을 끊고 나서 본 최순길 감독은 예전과 달라진게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처럼 후줄근한 츄리닝 차림에 깍은 듯 만듯한 수염. 그리고 저 삼선 슬리퍼.
“오셨어요?”
사무실에는 남아있는 직원이라고는 자신이 올 때까지 기다려준 총무팀 막내가 유일했다.
당연히 동훈은 그 막내직원을 퇴근시키고 최순길 감독을 널찍한 회의실로 안내했다.
“사무실 엄청 좋다. 장난 아닌데? 나 이런 제작 사무실은 첨 봤어. 대기업 같다.”
“그냥 흉내만 낸 거예요.”
“흉내도 그럴듯하게 내면 그게 작품인거야. 알잖아. 영화도 얼마나 그럴듯하게 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거. 액션도 그럴듯하게, 스토리도 그럴듯하게. 그 ‘그럴듯하게’가 우리 일의 핵심이야.”
후배를 향해 조언하는 그의 모습이 왠지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았지만 동훈은 웃고 넘어갔다.
“암요. 알고 있죠.”
최순길 감독은 일어나서 회의실을 천천히 돌며 서랍장에 올려진 각종 영화 팜플렛과 잡지를 훑으며 말했다.
“너 완전 성공했다. 부럽다.”
“계속 노력하는 중입니다.”
“지금도 성공했는데 더 노력하면 어디까지 가려고?”
“하하, 그런가요?”
“광효한테는 말 들었어. 내가 지금까지 기사로 보기는 했는데 월급을 굉장히 많이 준다고 말이야.”
“굉장히 많은 정도는 아닙니다.”
“훌륭하다 훌륭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왜 없었을까?”
그는 별 의미 없는 넋두리를 늘어놓다가 아무 대꾸도 없이 잠자코 지켜보는 동훈의 시선을 느끼곤 슬그머니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이야기를 들으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일단 모든 감독들과 전부 전속계약을 맺는건 아닙니다.”
최순길 감독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조건이 있는거야?”
“조건이라기보단 가지고 계신 시나리오를 보고 같이 만들어 볼만 하다고 느끼면 그때 제의를 드리는 겁니다.”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을까? 감독 실력에 관해서 의문이 들 수는 있는데 이미 만들어온 작품이 있잖아.”
“그렇기는 한데 창작을 한다는게 사실 계속 없는걸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걸 써먹는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
“네. 왜 그렇잖아요. 초반에 좋은 소재와 새로운 시도로 반짝 뜬 감독이나 작가들이 후속 작품에서 줄줄이 무너지면서 사라지는거.”
“그렇기는 하지.”
“그래서 이전 작품에서 좋은 성적을 거뒀다고는 하더라도 앞으로 계속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지만 보는 겁니다. 꼭 당장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의 퀄리티까지 바라는건 아니구요. ‘어느 정도 다듬으면 괜찮겠다’ 싶을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어요.”
최순길 감독은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탐탁치 않을 표정으로 말했다.
“광효가 그 정도까지는 얘기 안 하던데?”
“박 감독님 같은 경우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낼 틈도 없이 대뜸 시나리오부터 들이밀었거든요. 그리고 박 감독님과 계약하면서 이런 생각들이 구체화된 겁니다. 박 감독님이 오셔서 시나리오를 주기 전까지는 양호민 감독님과 전속계약을 맺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어요.”
“역시 사람은 운이 좋아야 해. 박광효 걔가 안 그런 것 같은데도 운이 참 많아. 걔 집이 좀 사는거 알지?”
“어? 그랬었나요?”
“걔 부모님이 창원에서 유지야. 땅을 엄청나게 가지고 계시거든.”
“아... 네.”
동훈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그가 머쓱한지 콧등을 쓱 닥으며 말했다.
“그래서 일단 시나리오를 보고 싶다는 거지?”
“네. 시나리오 보고 계약한다는 이야기 정도는 들으셨죠?”
“뭐, 가지고 오긴 했지...”
그는 손떼가 많이 묻은 허름한 천 가방에서 시나리오를 주섬주섬 꺼냈다.
그런데 동훈은 그가 꺼낸 시나리오를 본 순간 내심 실망하고 말았다.
한눈에 봐도 만들어진지 꽤 오래된 종이였다.
최소한의 성의라도 있었다면 새로 프린트해서 가져오는게 당연한 것인데 얼마나 고이 모셔 두셨는지 종이 끝부분은 누렇게 떠 있었다.
“이거에요?”
“어. 혹시 봤나?”
“글쎄요.”
예전에 동훈이 잠깐 유병세 감독을 따라 페르소나에 왔을 때 본적이 있냐고 묻는 거였다.
거기에는 자신들이 쓴 시나리오를 돌려보며 평가해주는 것도 했었기에 몇 개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럼 한번 읽어 봐. 나쁘진 않을걸?”
그는 나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이미 동훈은 마음을 어느 정도 비운 상태였다.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면 이미 어느 제작사와 논의를 가졌어도 열댓번을 가졌을게 분명했으니까.
박광효 감독처럼 손익분기점 한번 넘어본 적 없는 B급 감독도 아니고 최순길 감독이라면 10년 전만 해도 나름 인정받는 감독이었다.
그런 감독이 5년 넘게 작품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느 제작사가 찔러보지 않았을까.
분명 그와 여러번 미팅도 하면서 이 작품도 봤을게 분명했을텐데 더 이상 진척이 없었다면 이 작품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어쨌거나 이건 시나리오를 읽기 전에 가진 선입견이라 여기며 그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물론 최순길 감독은 진지한 얼굴로 시나리오를 읽고 있는 동훈을 긴장한채 바라보았고 말이다.
10분여가 흘렀을 때.
“음...”
동훈은 입을 삐쭉이며 신음성을 내뱉었다.
작품이 너무 좋아 감탄의 의미로 낸 신음성이 아니었다.
거절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곤란함에 나온 탄식에 가까웠다고 해야 할까?
스토리는 이랬다.
결혼을 앞둔 여자가 결혼전 친구들과 파티를 하다가 벌어지는 소동극인데 노골적인 성적 대화를 통해 진짜 여자들의 마음을 들여다본다는...
개뿔 의미도 없고 재미도 없는 이야기였다.
정말 90년대에 개봉했으면 나름 신선하다고 평가해줬을만 했을텐데 이걸 요즘 시대에 개봉했다간 제작사와 투자사 깡통차기 딱 쉬웠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도대체 누굴 엿 먹일려고 이런 작품을 만들었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너무 별로였다.
“어때? 이 작품에 탑 여배우들 갔다 놓으면 완전히 이목이 집중되지 않겠어? 임현주 같은 애들이 여기에 나온 대사를 치면 관객들이 안 오고는 못 배길걸?”
마인드도 딱 90년대에 머물러 있었다.
그래도 10년 전에 한창 잘 나갈 때 작품은 이 정도까지는 아니어서 참으로 시나리오를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죄송한데 조금 어렵겠습니다.”
최순길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왜? 시나리오가 별로야?”
“음... 죄송한데 저희 회사와 맞지 않아요. 작품성에 치중한 작품이라...”
재미없다는 이야기를 최대한 돌려서 한 거였다.
그런데 최순길 감독은 탁상을 탕 때리며 말했다.
“너도 똑같네. 똑같아. 다들 이렇게 작품성 있는 작품은 안 만들겠데. 제작사들이 다들 돈만 쫓는다니까. 아니, 이 정도 벌었으면 좀 작품성에 공을 들일만 하지 않아? 하나같이 돈돈돈... 에이 씨.”
급기야 그는 시나리오를 탁상에 내리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동훈은 가만히 지켜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말 작품성에 치중한 작품이라는 말을 진심으로 생각해서 작품성은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건지, 아니면 원래 이렇게 될 줄 알고 땡깡 한번 피워보는건지 가늠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원체 연기를 잘하는건지 도무지 어떤 생각으로 저러는지 파악이 되질 알았다.
아무래도 진실을 알려줘야 할 것만 같았다.
“저기 감독님...”
“왜?”
“제가 너무 돌려서 말씀드린거 같습니다. 사실 이 작품 손댔다가는 백프로 망할 것 같아요. 그래서 거절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뭐, 뭐? 아니 그러니까 작품성이 있는 거니까 한번 만들어보면 DH미디어도 인정받지 않겠냐는...”
또 딴소리를 늘어놓으려고 하는 최순길 감독에게 동훈이 말을 자르고 나섰다.
“그게 아니라... 솔직히 작품성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아요. 이런 유형의 작품 너무 많아요. 그렇게 새롭지도 않고 성적인 이야기를 노골적으로 늘어놓는다고 대단히 특별하지도 않구요. 작품성이 있으려면 뭔가 영화적인 메시지가 있어야 하는데 메시지도 없어요. 초반부에는 남자가 여자 비난하고, 또 여자는 남자 비난하고... 그러다가 후반부에는 또 해피엔딩. 결혼을 하라는 말인지 말라는 건지 알 수가 없어요. 이럴거면 그냥 후반부에 서로 치부 다 보이고 터뜨리면 인상이라도 깊게 남을텐데 결론이 이래 버리니까 ‘이게 뭐야’ 되잖아요.”
“...”
최순길 감독은 꿀먹은 벙어리처럼 대꾸를 하지 못했다.
“이러면 안 돼요. 영화는 관객이 보고 싶은걸 보여주던가, 아니면 관객이 생각지도 못한 걸 보여줘야 해요. 그런데 이건 보고 싶은것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도 아니에요. 관객이 돈주고 보러갈 이유가 없어요. 톱스타로 이목을 끌어보는거? 그것도 개봉 하루, 이틀이 지나면 약발 떨어져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 작품 하겠다는 여배우도 없을 겁니다. 어느 여배우가 이거 찍어서 자신의 배우 커리어와 연기력에 도움이 될 거라 생각할까요?”
처음 당당했던 모습과 달리 생각지도 못한 후배의 혹평에 그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아마 이 정도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최순길 감독에게 이렇게 심한 혹평을 하진 않았을 거다.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충무로에서 그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었고 나름 경력도 됐었기에 면전에서 이런 혹평을 해줄 사람이 없었을 거다.
“그렇게 최악이냐?”
“죄송해요. 이렇게 심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런 말씀드리면 건방지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선배님 향후 작품활동을 생각해서라도 진실을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앞으로 더 나은 작품이 나올 테니까요.”
“하... 시팔...”
그는 천장을 올려다보며 허탈해하다가 탁상위에 널부러진 시나리오를 천가방에 주섬주섬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너 잘났다.”
“선배님...”
최순길 감독은 열이 올랐는지 소리를 질렀다.
“선배 소리 집어쳐, 새끼야! 넌 선배 작품한테 그런 소릴 내뱉냐? 하긴 씨발 학벌도 좆같은게 어디 진짜 선배가 있기는 하겠어.”
“하...”
동훈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잘 먹고 잘 살아라. 퉤!”
최순길 감독은 사무실 바닥에 침을 뱉고는 쾅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문을 열어젖히고 떠났다.
동훈은 바닥에 떨어진 침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화장실에서 대걸레를 가지고 와 닦았다.
이상하게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최순길 감독의 인생이 불쌍할 뿐.
아마 저 작품을 쓰고 더 이상 머리에서 나오는 작품이 없었을거다.
안 나오면 더욱 치열하게 고민해서 나오게끔 해야 할텐데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 때문인지 그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테고 그저 세월만 흘러 보냈을거다.
그런 감독이 과연 최순길 감독 하나일까?
이제 새까만 후배에게 정신이 번쩍 나도록 후드려 맞았으니 그 충격이 대단히 크긴 할 거다.
그렇다고 학벌이 어쩌고 한 말이 용서가 되는 건 아니지만 어쨌건 앞으로 볼일이 없을 테니 동훈이 아쉬울건 없었다.
“어디서 또 뒷담화 신나게 까시겠구나...”
이게 좀 짜증날 뿐이었다.
마음이 씁쓸한게 괜히 은정이 보고 싶어졌다.
언제나 환하게 웃어주던 그 아름다운 모습이 왜 계속 떠오르는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