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97화 (97/116)

# 97

변하는 사람들(2)

두 달 뒤, 첫 언론시사회를 앞둔 명진은 관계자들 사이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그러고 계세요?”

유지은 팀장이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보고 물어보자 명진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닌게 아닌 것 같은데요? 많이 긴장하신거 같은데. 괜찮아요. 우리가 봤을 땐 영화 괜찮았어요.”

그냥 긴장을 풀어주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유지은 팀장은 정말로 영화가 괜찮게 나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로맨틱 코미디 장르임에도 이번 영화는 손익분기점을 넘을 수 있을 거라고 나름 기대하고 있는 중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대박을 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영화의 재미를 떠나서 아무리 재밌는 로맨틱 코메디 영화라도 일정 이상의 관객을 넘기기에는 장르 자체의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요? 후... 뭐, 저도 괜찮게 나온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긴 합니다.”

“하하, 감독님 지금 전혀 마음이 놓이는 표정이 아니신데요? 가서 우황청심원이라도 사다 드릴까요? 영화관에서 조금만 나가면 약국 있어서 금방 사다 드릴수 있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명진은 거절했지만 유 팀장은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그러다 이따가 기자들 질문 시간에 어버버 하시는거 아니에요? 옆에 임현주 씨까지 있어서 기에 눌리실 텐데?”

유 팀장은 명진과 현주 사이에 오가는 미묘한 감정을 아직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무실에서는 아직 동훈과 은정만이 알 뿐이었다.

그럼에도 유 팀장의 말이 찔렸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좀 부탁하겠습니다.”

“그래요. 잘 생각했어요. 하여간에 감독님도 그렇고 남자들은 약 준다고 하면 덮어놓고 싫다고 해서 문제라니까요. 일단 드셔보시면 한결 긴장됐던 마음이 가라앉을 거예요. 수험생들이 괜히 먹는게 아니라니까요.”

“네. 알겠어요.”

유 팀장이 사라지자 명진은 다시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누군가 그의 팔을 툭 쳤다.

“뭐해요?”

현주였다.

실크 블라우스에 검은색 타이트한 롱스커트를 입은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후반기 작업을 하면서 데이트 아닌 데이트를 하긴 했지만 오늘처럼 빡세게 꾸미고 온 날은 없었다.

물론 현주가 화장한 모습이야 전에도 많이 봤지만 내 여자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와 그저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을때와는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아 그냥...”

“떨려요?”

“좀 그렇네요.”

“보기보다 간이 작으시네.”

“간이 작아서가 아니라... 아니, 첫 상업영화 데뷔인데 안 떨리면 그게 사람입니까?”

명진은 변명하다가 그게 너무 구차하다고 생각해서 솔직하게 나갔다.

“난 안 떨렸는데.”

현주는 그게 왜 떨려야 하는 이유인지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하긴 저 모습을 보면 그녀는 당최 긴장이라고는 할 사람같이 않아 보이긴 했다.

“좋겠네요. 몸 전체가 간덩이로 만들어져서. 부모님께 감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당연히 감사해하고 있죠. 간덩이는 그렇다 치고라도 일단 이런 작품을 만들어 내는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요?”

그녀는 뻔뻔스럽게 한바퀴 휙 돌며 자신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훌륭하신 업적을 세운 분들이라는 건 확실히 알겠습니다.”

“좋은 자세에요.”

그녀는 명진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고는 싱긋 웃었다.

명진은 그 화사한 미소에 긴장됐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너무 쫄지 말아요. 그런데 배는 좀 가려야겠다.”

그녀는 살포시 나온 명진의 배를 툭툭 치고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지나갔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또 누군가 그의 머리를 툭 쳤다.

“아주 그냥 넋을 놨구만. 놨어.”

“아, 감독님.”

동훈이 한심한 표정으로 진명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렇게 좋냐?”

“솔직히 감독님 같으면 싫겠습니까?”

“좋겠지.”

“제 마음이 그렇습니다. 헤헤...”

실실 쪼개는 진명을 보고 동훈이 뇌까렸다.

“부럽다. 새끼...”

“촬영 일정 빡세실텐데 여기까지 와 주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첫 시사회인데 떨릴 거 아니야. 그리고 대표로써 나와 봐야지. 그런데 막상 와보니까 아주 그냥 좋아 죽더만? 괜히 왔어.”

“괜히 오긴요. 아까는 그냥 지나가면서 말 몇마디 하고 간 겁니다. 별 얘기도 안 했어요.”

동훈은 명진을 빤히 보더니 슬쩍 그에게 다가가 아주 조그맣게 물었다.

“야, 진짜 이번 영화 잘 되면 사귀는 거냐?”

“아마도...”

“현주 씨가 그러재?”

“말은 없지만...”

“그러다 나중에 딴소리 하는거 아니냐?”

“설마 그러겠습니까?”

“아니야.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랑 현주랑은 그... 아닌거 같아. 안 그래?”

“그럴까요?”

시무룩해지는 명진을 보며 동훈이 내심 흡족해하는데 누가 동훈의 등짝을 때렸다.

짝!

“아!”

“명진 감독님 놀리지 마세요.”

알고 보니 은정이었다.

원래도 회사 일에 관심이 많은 그녀였지만 오늘은 자신이 출연하는 영화 시사회인만큼 당연히 참석해야 했다.

그러다 동훈과 명진이 함께 있는걸 보고 몰래 다가갔다가 둘이 하는 이야길 듣고 나선 거였다.

“놀리긴 뭘 놀렸다고 그래. 그리고 어느 배우가 감독 등짝을 때리냐?”

은정은 신경도 안 쓰고 유명진 감독에게 말했다.

“명진 감독님, 신경 쓰지 마세요. 동훈 감독님이 그냥 명진 감독님 잘 되는거 보고 놀리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

은정의 말에 순간 명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감독님은 오셨으면 연락 좀 하시지.”

동훈은 혹시 누가 들을까 싶어 주변을 살펴본 후 말했다.

“뭘 연락을 하고 오냐. 사장인 내가 시사회에 오는게 당연한 거지. 밥은 먹었고?”

“어떻게 먹어요? 오늘 딱 달라붙는 원피스라 어제 저녁부터 쫄쫄 굶었어요. 나 배고파요.”

“그래? 끝나면 뭐 사줄까?”

“네. 나 곱창 먹고 싶어요.”

“곱창은 내가 별론데.”

“그럼 간장게장.”

“하여튼 입맛은 비싸가지고... 알았어. 내가 포장 주문해 놓을게.”

“앗싸!”

은정이 양 손을 흔들며 지나가자 명진이 낮은 목소리로 급히 말했다.

“감독님이 절 부러워하실 상황이 아닌 것 같은데요?”

“그래도 부러운건 부러운 거야. 됐고, 나가서 잘해. 영화는 괜찮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알겠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동훈의 칭찬이 가장 믿음직스러웠는지 명진은 한결 안심이 되는걸 느꼈다.

잠시 후, 유지은 팀장이 와서 명진에게 우황청심원을 건네주자 명진은 한입에 털어넣고 관람석으로 들어갔다.

동훈은 남아있는 유 팀장에게 말했다.

“준비는 어때요?”

“상영준비 문제 없는거 체크 했구요. 기자들 빠짐없이 체크했어요. 상영 끝나면 질문시간 받고 이후에 보도자료 뿌릴 것까지 준비 끝냈어요.”

“경쟁작들이 강한거라 조금 걱정되긴 하네.”

빛그림과 같이 개봉시기에 관해 여러차례 회의를 거듭하고 나서야 정한 시기였지만 신이 아니다 보니 모든 상황을 다 예측할 수는 없었다.

잘 안될 것 같아 보였던 영화가 뜻밖에 대박을 치는 상황도 가끔 일어났고 흥행이 문제없어 보여 긴 시간 스크린을 독점할 것 같았던 영화가 1, 2주일도 안 돼 내려가는 일도 가끔 일어나긴 했다.

그런데 하필 딱 이번이 그랬다.

이름도 몇 번 들어보지 못했던 중소 제작사가 만든 공포영화 하나가 대박을 치고 말았던 거다.

그것뿐이 아니다.

해외에서 그렇게 흥행하지 못했던 헐리우드 영화 하나가 국내에서 입소문을 타고 흥행몰이 중이었다.

동훈도 애상하지 못했던 상황이라 누굴 탓할 것도 없었다.

일단 일정이 잡힌 상황이기에 꼼짝없이 정면대결을 해야 할 상황이라서 명진이 저렇게 긴장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긴 했다.

“어쩔수 없죠. 그래도 전 손익분기점은 확실히 넘을 것 같던데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대박은 바라지도 않았다.

어차피 ‘한강의 괴물’로 돈은 넘칠 정도로 벌어놨기에 이번 명진의 영화는 그저 손익분기점만 넘어 대외에 유명진이라는 감독의 이름만 확실히 각인시킬 수 있다면 그걸로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지금 염려되는건 딱 하나, 손익분기점만 넘겨줄 수 있느냐다.

첫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긴 감독과 그렇지 못한 감독은 일단 사람들의 인식부터 달라지게 된다.

투자해도 될 감독과 투자하기 껄끄러운 감독.

영화가 아예 폭망하면 투자하면 안 될 감독이 되겠지만 그렇게는 되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 부디 손익분기점만 넘겨주길 바랐다.

“기자들은 보고 가실 거예요?”

“한 두명만 따로 만나죠. 어차피 단체로 만나는건 시선이 분산되니까 좀 그렇고.”

“당연히 그래야죠. 오늘 주인공은 유명진 감독이니까요. 그럼 영화 끝나고 2시쯤에 ‘뉴스원’의 기자랑 인터뷰 잡아 놓을게요.”

“그래요.”

그렇게 이야기를 끝낸 동훈은 음영이 짙게 드리워진 통로에 서서 조금씩 들어차고 있는 기자들을 바라보았다.

과연 오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

“유 감독이 찍고 있는 그거, 잘 나오고 있대요?”

콩국수를 후루룩 들이키는 최순길 감독에게 슬쩍 물었다.

같이 페르소나 사무실에서 지냈던 둘인데 유병세 감독의 눈치 때문에 차마 사무실에서는 만나지 못하고 밖에서 만나는 중이었다.

“언제나 그렇지. 항상 자신만만하잖아.”

“하긴... 걔는 항상 그랬죠.”

박광효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며 빈 그릇을 슬쩍 훑었다.

한 그릇 더 시킬까 하는 생각에 자리에서 일어나 주문을 하려는 찰나 최순길 감독이 입을 열었다.

“너는 어떻고?”

“나요? 그냥저냥 준비하고 있죠.”

오늘 만남은 최순길 감독이 얼굴 한번 보자며 불러낸 자리였다.

유병세 감독이나 자신보다 연배가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평소에 박광효 감독과 잘 지내서 거리낌 없이 나온 거였다.

“너 장동훈이랑 전속 계약하고 유병세 그 인간이 배 많이 아파하더라.”

“하하, 전속이라고 해봤자 별거 아니에요. 영화 준비하는건 똑같아요. 꼬박꼬박 출근해야하기 때문에 더 귀찮기도 하고...”

“대신 월급 준다며?”

“그건 그렇죠.”

“우리처럼 고정적인 수입이 없이 사는 사람한테 단돈 몇십이라도 꼬박꼬박 나온다는게 어디냐. 대단한거지.”

박광효 감독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걸 말해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데 그걸 보고 최순길 감독이 물었다.

“왜?”

“아, 아니에요.”

“뭔데? 내가 너 하루이틀 보냐? 빨리 말해.”

“아니에요. 진짜...”

“야, 인마. 새끼가...”

박광효 감독은 어쩔 수 없이 털어놓았다.

“아니... 자랑하는것도 아닌데 괜히 그래서...”

“왜? 몇십이 아니야?”

“네.”

박 감독은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하게 대답했다.

“그럼 얼마나 주는데?”

“한 이백정도...”

“이백? 세금 떼면?”

“세금 떼고 이백 조금 넘어요.”

“와...”

최순길 감독이 입을 떡 벌렸다.

사실 지금까지 외부에 감독들과 전속계약을 한다는 말은 알렸지만 그 금액에 대해 외부에 알린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양호민 감독이나 박광효 감독이 정확히 얼마를 받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회사 직원들, 그리고 그 외에 몇몇 밖에는 없었다.

“유 감독이 그랬어요? 몇십만 원이라고?”

“그래. 그 인간이 아마 오십만 원도 채 못 받을거라고 하더라.”

“아... 그렇구나.”

“그럼 양호민 감독은?”

“저도 잘 몰라요. 양 감독님은... 그런데 아마 저보다 훨씬 많이 받을걸요?”

“큼... 그래? 혹시... 다른 감독 더 채용 안하냐?”

박광효 감독은 이 자리에 나올때부터 혹시나 이런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건 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저도 그냥 막무가내로 찾아가서 계약한거라 아마 선배님도 찾아가면 뭐가 되도 되지 않을까요?”

“그럴까?”

최순길 감독은 고민하다가 결국 마음을 굳혔다.

장동훈 감독에게 찾아가기로.

“그런데 내밀 작품은 있어요?”

“내가 그런게 어딨냐? 일단 계약하고 만들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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