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96화 (96/116)

# 96

변하는 사람들(1)

“음... 이걸 받아야 하나?”

동훈은 양지원 대표와의 대면에서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일단 투자금 규모가 조금 애매해요. 꼴랑 50억 투자하고 간 보겠다는 거잖아요.”

“그래도 50억이면 초기 투자자금치고 상당하지 않아요?”

“초기 자금이라고는해도 50억이면 간을 너무 보는 것 같아요. 그 정도 금액이면 우리도 그쪽을 신뢰할 수 없어요.”

양지원 대표는 당황스러운 표정이 되었다.

“그, 그런가요? 솔직히 전 괜찮은 제안이라고 봤는데. 영 아닌가요?”

“영 아니라는건 아닌데 이건 뭔가... 그 투자사 쪽이 착각을 한 거 같아요.”

“착각이라뇨?”

“돈이 없어서 투자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가까스로 받아낸 것 같아서 말이죠. 우린 돈이 부족해서 투자 받는게 아닙니다.”

“알죠.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찔끔찔끔 투자 받는다는건 우리가 뭔가 부족해서 기회 한번 달라는 식으로 비춰질 것 같아요.”

“그럼요?”

“전 제작비의 최소 80%를 투자 받기를 원해요.”

양지원 대표가 입을 떡 벌렸다.

“파, 팔십 프로요?”

“네.”

“그럼 최소 150억이 넘어갈 텐데요?”

“그 정도는 해야 우리도 이 파트너가 우리와 같이 갈 회사인지를 판단할 수 있죠. 50억 던져주고 간보는 회사라면 이번에 성적이 좋아 같이하게 되도 나중에 성적이 조금만 안 좋으면 얼마나 우리를 압박하겠어요?”

“한마디로 갑을 관계가 아니니 관심이 있으면 제대로 된 제안을 하라는 말씀이신거죠?”

“맞아요. 물론 제작기획서는 전과 다르게 제대로 만들어봅시다. 그거 보내주고 우린 돈 없어서 투자 받는거 아니라고, 헐리우드 영화 제작을 위한 발판을 위해 같이 손을 잡는거라고 정확히 알려주셔야 합니다. 이거 성공하면 너도 돈 벌테니까 서로 같이 힘 합쳐서 제대로 만들어보자고 말이에요.”

양지원은 작은 입으로 긴 숨을 토해내며 웃었다.

“하아... 알겠어요. 제가 확실히 인지시켜 놓을게요. 괜히 바쁘신데 오시라고 한 거 같아서 죄송해요.”

“아닙니다. 바빠도 직접 와서 할 건 해야죠. 어차피 심야 촬영 없어서 이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습니다.”

“감독님 시간 철저하신 거 아주 유명하죠. 아, 그리고 혹시 최근에 LS엔터에서 뭐 들으신거 없으세요?”

“LS엔터요? 아니요. 왜요? 뭐 있어요?”

지원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요즘 LS엔터에서 아직 입봉하지 못한 조감독이나 연출을 지망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오디션을 크게 준비한다는거 알고 계시죠?”

“네. 지상파랑 계약해서 오디션 프로로 엄청 크게 한다는거 알고 있습니다.”

“그거 장동훈 감독님 회사 잡으려고 하려는 의도인 건 알고 계시죠?”

동훈은 씨익 미소지었다.

“글쎄요.”

“알고 계시는구나. 그런데 그것도 알고 계세요?”

“어떤거요?”

“LS 최호성 대표와 WAS엔터 고은숙 대표가 손 잡았다는 거.”

“그래요? 어... 완전히 우리를 벤치마킹하는건가?”

“그렇지 않으면 굳이 둘이서 손잡을 이유가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알기로 WAS엔터에 소속된 수많은 배우들중에 고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배우는 절반도 채 되지 않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만약 이번에 LS와 손잡으면 일거리는 확보할 수 있을 거예요. 단지...”

“단지?”

“배우들 몸값이 떨어지겠죠. 그걸 감수하고 이러는걸 보면 애가 닳긴 많이 닳았나 본대요? 하하핫!”

지원은 방정맞게 웃고는 벙찐 표정의 동훈을 보고 정색하며 말했다.

“크흠... 어쨌든 두 거대 엔터사가 손잡고 감독님 잡으러 오고 있으니 대비 단단히 해두셔야 할겁니다.”

“변화하는 시장 흐름에 맞춰서 자신들도 변화해보겠다는걸 수 있어요. 날 잡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WAS엔터 사장은 그럴 수 있어요. 하지만 최호성 대표 생각은 다를걸요?”

“어떻게 그렇게 그의 마음을 잘 아십니까?”

“그는 공존이라는걸 모르는 인간이에요. 아니, 어쩌면 대기업 간부들은 다 그럴지도 몰라요. 조금만 이익 낼 건덕지가 생기면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혼자 독식하려고 들거든요. 그게 저들 본성이에요. 그러니 좋게좋게 생각하지 말고 철저하게 대비하는게 좋을 거예요.”

그녀의 진지한 충고에 동훈이 살짝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새겨 들을게요.”

“하하핫! 그렇게 진지하게 새겨들으실 필요까진 없구요. 그냥 ‘그는 그런 인간일 거다’ 이런 거죠. 하하하.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너무 오래 떠들었죠?”

“떠들다뇨. 회의는 말을 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인데. 어쨌든 늦은 시간에 우리 사무실까지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언제 회식이나 같이 해요. 감독님은 항상 바빠서 회식하자는 말도 못 꺼냈어요.”

“그래요. 촬영 끝나면 한잔 합시다. 그쪽 식구들이랑.”

“아휴, 좋죠.”

그녀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갈 때도 가벼운 발걸음으로 회사를 떠났다.

*

“컷! 오케이, 좋았어!”

유병세 감독의 외침에 맥이 풀린 세연이 털썩 주저앉았다.

유 감독은 그런 그녀를 힐끗 바라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곤 조감독에게 말했다.

“야, 현장 마무리하고 내일 늦지 않게 와.”

“어디 가십니까?”

“어. 일 있어서 먼저 가니까 현장 마무리 철저히 해라. 탈나지 않게. 알겠어?”

유 감독이 굳은 얼굴로 단단히 주의를 주자 조감독은 바짝 군기든 얼굴로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유병세 감독은 인사하는 스탭들과 배우들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하곤 자신의 차를 타고 서울로 달리기 시작했다.

1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곳은 청담동의 한 호텔.

“여~ 유 감독 왔구만. 여기야.”

“안녕하십니까.”

유 감독은 손을 흔들며 그를 반기는 사람을 보곤 90도로 꾸벅 숙였다.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예의바른 표정이라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40대 중반의 정장을 입은 남자는 박광효 감독에 비견될 만큼 상당한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앉아, 앉아.”

“제가 많이 늦지는 않았겠지요?”

“좀 늦긴 했는데 괜찮아. 한가한 내가 바쁜 우리 유 감독 기다리는게 당연하지 안그래?”

“아유, 또 왜 그러십니까. 하하하!”

유 감독은 너털웃음을 터뜨렸지만 내심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대원그룹의 차남이자 대원 파트너스의 대표인 김강우였기 때문이다.

몇 번이나 유 감독의 작품에 투자를 해온 대신 유 감독이 여배우 몇몇을 소개시켜주며 끈을 이어 왔는데 이번 작품을 끝으로 독립을 생각하고 있는 유병세로서는 더더욱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본래 가지고 있는 돈과 대출을 받아 회사를 차릴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연신 성공을 거듭하고 있는 장동훈을 보며 배알이 꼴린게 원인이 됐다.

조금씩 먹고 길게 가자는 생각을 버리고 크게 먹고 길게 가자는 생각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투자금을 유치하는게 필수인데 지금 이 사람만큼 좋은 투자자는 없다는 것이 유병세의 판단이었다.

“영화 촬영은 잘 되고 있고?”

“네. 오늘 촬영 끝내면서 거의 70% 이상 넘어갔습니다.”

“이야... 유 감독 답지 않은데? 왜 이렇게 빨라?”

유병세는 뜨끔했지만 표정을 관리하며 대답했다.

“저 원래 빨랐습니다.”

“뭘 빨라. 영화 촬영하면 촬영만 반년은 기본이었잖아. 후반기 작업 반년에 배급 조율하면 거진 1년반에서 2년 잡아먹는게 허다했으면서.”

“하하, 아무래도 연차가 쌓여가면서 경험이 늘다 보니까 촬영시간도 자연스럽게 줄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것보다는 제작사의 제작비 압박에 정신없이 찍어댄 덕분이 더 컸다.

게다가 요즘 충무로에선 촬영 전 업무시간에 관한 계약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자신의 고집대로 ‘더, 더’를 외치다간 모든 스탭들이 다 떠나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렇기에 이번 영화부터는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촬영 일정을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는데 사실 그것 때문에 내심 불안한 부분도 없지 않았다.

평소와 다른 패턴으로 촬영을 하고 있으니 불안하지 않으면 더 이상할 수밖에.

어쨌거나 제작사는 제작비 오버를 줄이고 스탭들의 불만을 줄이고 있는 이 상황을 굉장히 반기고 있을 거였다.

“흠... 그래? 좋은 상황이네.”

“그럼요.”

“그럼 이번 영화 성공하겠어?”

살이 많아 안 그래도 눈이 작아 보이는 김강우가 더욱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유병세 감독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 태연히 대답했다.

“그럼요. 이번 영화는 현장 편집부터 분위기가 달라요.”

“그래?”

“전에 영화가 크게 성공한 영화를 현장 편집하면서 딱 느꼈던게 이런 느낌이었거든요. 독특하면서도 끌린다. 제가 찍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고 편집기사도 계속 느낌이 좋다고 합니다.”

김강우는 그제야 그 얇은 눈으로 호선을 그렸다.

“그거 마음에 드네.”

“하하, 어차피 대표님은 이번 영화에 투자도 하지 않으셨잖습니까.”

“아니, 더 큰 투자물건을 가지고 왔는데 그 전에 지금 투자 물건이 어느 정도나 값어치가 있을지 봐야 하는게 당연한 거잖아. 가장 중요한게 자네 실력이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금액이 얼마야?”

유병세 감독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대답했다.

“50억 정도면 번듯하게 세팅 가능할 것 같습니다.”

“지분은 얼마나 가질거고?”

“제가 51% 가지겠습니다.”

“그러니까 49%를 50억에 사라? 야, 너 너무 막 던지는거 아니야? 50억이 뉘집 애 이름이야? 네 돈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하는거 같아.”

“그렇지 않습니다. 사실 은행 대출만 받아도 10억은 땡길 수 있는거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인맥과 실력이 50억 값어치도 안 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제가 대표님한테 벌어다 드린 수익만 해도 50억은 되지 않습니까?”

“아니야. 정확히 30억이 조금 넘어. 마지막 영화 별 재미 못 봤잖아.”

“아, 그런가요? 어쨌든 그래도 30억이 넘잖습니까.”

김강우는 자신의 앞에 놓인 와인잔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고 유 감독은 아무 말 없이 그가 고민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요즘 바빴어? 연락이 좀 뜸했서 섭섭해어. 내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였지만 유 감독은 그가 무슨 말을 꺼내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죄송합니다. 요즘에 제가 정신없었습니다.”

“섭섭해 아주.”

“하하하, 그래서 제가 아주 신선한 마스크를 몇몇 봐 뒀습니다.”

“마스크만 신선하면 뭐해. 또 배나온 늙다리라고 싫어하는거 아니야?”

유 감독은 너무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그때는 걔가 뭘 몰라서 그랬습니다. 다음에는 확실히 니즈가 있는 애들로 준비하겠습니다.”

여배우 스폰서도 배우가 원하지 않으면 절대 이루어질 수 없었다.

그런데 전에 유 감독이 이어주려고 했던 배우가 이미 다 약속하고 만남의 자리를 가졌건만 김강우의 모습을 보곤 그만 뺀찌를 놓는 참사가 벌어지고 말았었다.

지금 김강우는 그 때의 일을 말하는 거였다.

“나 요즘 마음이 쓸쓸해. 사는 의미가 없어. 마누라는 어떤 새끼랑 바람을 피는지 도통 집에서 볼수가 없고 자식새끼들은 지 혼자 큰줄 알고 애비를 지 방 컴퓨터 만큼도 생각하지 않아.”

“걱정하지 마십쇼. 제가 제대로 세팅하겠습니다.”

“그래, 좋아. 그럼 일단 우리 법무팀이 보낼테니까 한번 잘 만들어보라고.”

유병세 감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김강우는 꾸벅 숙인 유 감독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 잘 돼서 우리 인연 길게 가보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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