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또 다른 도전을 위해(3)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동훈이 연출하는 ‘동네 아저씨’는 크랭크인에 들어가 촬영을 시작했고 조감독이었던 유명진의 첫 연출작인 ‘건축학 원론’은 후반기 작업을 마무리한 상황이었다.
당연하게도 개봉을 앞둔 DH미디어의 분위기는 기대반 걱정반으로 배급사 빛그림을 서포트하는 것과 동훈의 연출을 서포트 하는데 일을 집중하고 있었다.
“아니야. 이렇게 되면 세트 제작비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구. 다른 방법 없을까?”
“그럼 경기장을 통째로 빌리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정 뭐하면 아예 CG로 싹 발라버리는 수도 있구요. 연기하는데 조금 집중이 어려울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해버리면 차라리 깔끔한 영상을 잡는덴 훨씬 좋을 겁니다.”
“흐음...”
박광효 감독은 두툼한 턱을 매만지며 고심에 잠겼다.
동훈이 크랭크인에 들어가면서 박광효 감독에게 미션을 내려 주었다.
별다를 건 없었다.
다음 작품을 천천히 준비해보라는 거였는데 이게 당연한 거긴 하지만 박광효 감독에겐 무척이나 어렵고 긴장되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지금 미술감독인 차철기 감독과의 회의를 지켜보는 수많은 직원들의 눈초리에는 과연 동훈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는 사람인지 궁금함이 가득했다.
박 감독은 그런 사람들의 기대와 의심을 잘 알고 있기에 어떡해서든 이번 작품은 보란 듯이 성공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특히 양호민 감독이 대박을 터뜨린 지금 차기 개봉을 기다리고 있는 유명진 감독의 작품도 벌써부터 편집본이 너무 좋다며 다들 기대하고 있기에 더더욱 부담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워낙 큰돈이 들어가는 일이니까 세심하게 결정하는게 맞지만 어차피 이번 결정으로 아예 픽스시키는 것도 아니고 너무 깊이 생각하면 진도 못 나갑니다. 이번주내로 견적 잡아야 그 다음에 털건 털고 넣을건 넣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 그럼 일단 요 부분은 완전히 CG로 발라버리는걸로 하고 뒤에 씬 35번부터 41번까지는 경기장을 빌리는 쪽으로 생각해보자.”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때 회의실 문이 열리면서 유지은 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감독님, 죄송한데 빛그림 양지원 대표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감독님하고 통화를 하고 싶다는데요?”
“양지원 대표가요? 왜요?”
“모르겠어요. 일단 나가서 받아 보실래요?”
“알겠습니다.”
박광효 감독은 영문도 모른채 어기적거리며 회의실을 나가 사무실 전화를 받았다.
“전화 바꿨습니다. 박광효입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저 빛그림 양지원이라고 해요. 전에 인사 한번 했었죠?”
“아, 네. 기억납니다.”
당시 사무실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을 때 만났었는데 당시 박 감독은 너무도 예쁜 양지원을 보고 한 마디 말도 못 걸었었다.
“원래 장동훈 대표님과 의논을 해야 하는데 대표님이 지금 촬영중이라 감독님께 먼저 연락드리는 거예요.”
“뭔데요?”
“사실 장동훈 대표님이 차후 DH미디어에서 제작하는 영화를 투자받으려고 헐리우드 쪽 투자자들을 컨택하려고 했어요. 이건 아시는 내용이죠?”
“네. 들어본 적 있습니다.”
듣기만 하고 흘려버렸던 내용이었다.
해외 투자자들과의 제작, 투자는 몇 번의 만남으로 후다닥 결정되는게 아니라는 정도는 알고 있어서 투자를 받는다고 해도 몇 년 후의 이야기일거라 생각했기에 듣고도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우리 쪽에서 몇몇 투자사와 컨택을 해봤는데 의외로 반응이 나쁘지 않았어요. 실제 두 군데 투자사에서는 장동훈 대표님의 작품을 보고 조금 더 진전된 논의를 원했구요. 그래서 장동훈 대표님께서 시나리오 하나를 우리쪽에다가 번역해서 넘겨달라고 하셨어요.”
“설마...”
“네. 그 설마가 맞아요. 장동훈 대표님께서 넘겨준 시나리오가 감독님 작품이었어요.”
“말도 안 돼...”
박광효 감독은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예전에 장동훈 대표와 헐리우드 자본으로 이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해서 의논한 적이 있었다.
결론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
한국 감독이 메이저리그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는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는데 서로 동의했었다.
“하하하, 너무 감동하신거 아니에요? 그런데 기대하시는 거랑 내용은 조금 달라요.”
“어떤 부분이 다른 겁니까?”
“일단 저쪽에서 영화에 투자하고 싶다는 뜻을 보낸건 맞는데 감독님 영화를 미국에서 찍겠다는 건 아니라구요.”
“아... 그냥 투자만 하겠다는 거네요?”
“그렇죠. 그런데 상황이 꼭 나쁘지만은 않은게 일단 저쪽에서도 미국내에 인지도가 전혀 없는 감독을 헐리우드 배우를 쓰면서 제작한다는게 어렵다고 해요. 그러니까 자기네 돈으로 영화를 일단 성공시키면 헐리우드 배우를 써서 영화 제작하는걸 고려해보겠다는 이야기를 하네요. 물론 그냥 이야기일 뿐이지 실제 그렇게 진행될지는 미지수에요.”
양지원 대표의 말에 잔뜩 가슴이 부풀어 올랐던 박광효 감독은 바람빠진 풍선처럼 기대감이 쉬이익 빠져나가는걸 느꼈다.
“아... 그냥 아직은 말뿐인 거네요.”
“그럼요. 일종의 립서비스?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면 마음 편하실거예요.”
“립서비스...”
“하하핫! 실망하셨어요? 그런데 감독님 실망하지 말라고 립서비스라고 하긴 했어도 아예 없는말은 아닐 거예요. 굳이 자기네 입으로 그런 이야기를 먼저 꺼낼 이유가 없으니까.”
“그럼 굳이 그런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있는 건가요?”
“음... 요즘 헐리우드에서 영화 성공시키기가 조금 힘들긴 해요. 아무래도 그런 영향 때문에 우리쪽을 한번 건들어 보는 것 같아요.”
“성공시키기 힘들다뇨? 요즘 세계적인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양지원 대표가 말을 끊는다.
“마블 시리즈요?”
“네.”
“마블 시리즈는 대박이죠. 그런데 그 시리즈 판권을 가진 쪽은 디즈니잖아요. 나머지 회사는요?”
“아... 그게 그렇게 되나?”
“디즈니가 헐리우드 제작사를 몇 개나 먹어 치웠는지 아세요? 말도 못해요. 완전히 공룡이 돼버렸어요. 디즈니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제작사는 그만큼 경쟁력을 가지지 못한 회사라는 뜻이 될 정도로요. 이렇게 되니 막상 디즈니와 선이 닿지 않은 투자사들은 믿고 투자할만한 감독과 제작사가 줄어들게 된 셈이에요.”
“같이 투자하면 되는거 아닙니까?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면 부족한 돈도 많아질거잖아요.”
“생각해보세요. 마블 시리즈에 투자했다가 엄청난 대박을 냈던 투자사가 이 좋은 투자대상에 다른 투자사를 섣불리 껴주려고 하겠어요?”
“그렇구나.”
“어쩌면 그래서 우리한테 기회가 온 걸지도 몰라요. 이번 기회를 잘 잡아야 할 이유죠.”
“그럼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별거 없어요. 지금 우리가 낸 시나리오를 조금 더 탄탄히 다듬어서 다시 보내야 해요. 쉽게 생각하면 제작기획서를 영어로 만든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나머지 자세한 내용은 장동훈 대표님과 상의할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럼 언제까지...”
“미국 애들이 우리처럼 빠르게 일을 진행하는게 아니라서 빠른 결과를 보고 싶다면 감독님쪽에서 최대한 빠르게 끝내셔야 할 거예요. 따로 언제까지 해달라는 기한은 잡지 않았어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하하! 넵. 그럼 부탁드릴게요.”
전화를 끊은 박광효 감독은 양손을 번쩍 들었다.
“만세!”
“어머, 무슨 일인데 그래요?”
유지은 팀장이 물어보자 박 감독은 방금 전까지 들었던 내용을 신나게 읊어대기 시작했다.
*
언제나 차분한 모습으로 사람을 상대하던 고은숙 대표의 표정은 얼음 마녀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래서, 진짜 옮길거야?”
고 대표의 맞은편에 앉은 현주는 언제나처럼 예뻤지만 오늘만큼은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고 대표의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못하고 조금은 긴장한듯한 그녀의 모습은 낯설기까지 했다.
“원래 그런 거잖아요. 이 바닥이... 솔직히 나 정도면 되게 의리있었던 편 아닌가?”
“그건 네 말이 맞지. 그래서 우리도 쿨하게 보내 주려고 하잖아.”
“보내준다는 데가 ‘에이블 컴퍼니’에요? 거기 대표 케빈 박이 대표님 사촌이잖아요. 회사 지분도 대표님이 상당 부분 가지고 계시다고 하던데.”
고 대표가 코웃음을 쳤다.
“너 많이 알아봤다?”
“이직할 회사일지도 모르는데 뭐하는 회사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내가 머리가 나쁘긴 해도 뭐가 중요한지는 알거든요.”
“하하, 내가 우리 현주 이렇게 똑똑한걸 왜 몰랐을까?”
“...”
현주는 매섭게 노려보는 고 대표의 시선을 피하며 대꾸하지 않았다.
최대한 고 대표의 심경을 거스르지 않고 깔끔하게 계약을 정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못 가겠다?”
“지금까지 많이 벌어줬잖아요. 그러니까 나 이제 놔줘요.”
고 대표는 팔짱을 끼며 냉랭하게 말했다.
“미안하게 됐는데 회사 사정이 안 좋아. 재계약 한 번만 더하자.”
“아뇨. 재계약은 없어요.”
“왜 이렇게 단호해? 우리가 고작 이런 사이였어?”
“대표님이 나 케빈 박한테 팔아 넘기려고 하지 않았다면 나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어요.”
“뭘 팔아넘겨? 네가 팔아넘긴다고 팔아지는 애니?”
“대표님이 가지고 있는 내 계약 서류들까지 전부 케빈 박한테 줬잖아요. 그게 팔아넘긴게 아니면 뭐에요?”
“계약금만 5억이야. 나머지 조건은 현재 우리 회사랑 똑같아. 계약서 못 봤어? 설마 더 달라는 거니?”
“돈은 필요 없어요. 그냥 다른 곳에서 시작하고 싶어요.”
“그게 장동훈이네 회사야?”
“장 대표님네 회사 아니라 어느 곳이든...”
“장 대표님? 언제 장 대표한테 꼬박꼬박 님자 붙이셨어? 그새 홀랑 붙어먹었니? 아니다. 유명진 감독이랑 붙어 먹은거야?”
현주는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대표님... 지금 말 선 넘은거 아시죠?”
“내가 이 와중에 너한테 선 지켜가며 말해야겠니?”
“알겠어요. 깔끔하게 정리하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네요. 이만 일어날게요.”
현주는 자신의 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향해 나가려다가 멈칫하곤 고 대표를 향해 말했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에요? 우리 이런 사이 아니었잖아요.”
“난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야. 언제나 회사의 이익만 생각해.”
“그 회사의 입장이... 아니에요. 그만해요.”
현주는 그대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잠시 후, 박대진 상무가 후다닥 들어왔다.
“쫑난 겁니까?”
“그래. 쫑났어. 넌 도대체 일을... 하... 누가 쟤한테 얘기한거야?”
“모르겠습니다. 분명 조용히 계약을 진행한다고 했는데...”
“누가 얘기한거 아니면 도장 찍기 전에 왜 쟤가 자기 인감을 찾아? 은행에서 통장정리도 못하는 애가 인감 찾을 일이 어딨어? 누가 알려주지 않았으면 쟤가 어떻게...”
고 대표는 말을 하다 말고 이마를 짚었다.
“죄송합니다.”
“일단 CF 땡길건 최대한 땡겨. 계약만료 전까지 최대한 뽑아먹어야지. 그리고 LS엔터에 연락해.”
“LS엔터에는 왜...?”
“걔들 장동훈이 때문에 발등에 불 떨어졌잖아. 지금 감독 오디션한다 뭐한다 하는데 우리랑 손잡자고 해야지.”
“손잡으면요?”
“장동훈이가 전속 배우 만드는 이유가 뭐야? 자기네 작품 고정적으로 뽑아먹겠다는거 아니야? 그럼 우리가 배우 대준다고 하면 좋아라 하지 않겠어?”
“그건 그런데... 장동훈 감독은 시리즈 물을 만들 때를 대비해서 그런다고 치지만 만약 LS엔터에서 장편 시리즈물을 만든다고 하면 차기 출연료 협상에서 굉장히 손해를 볼 텐데요?”
“그 정도 손해는 감수해야지.”
고 대표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