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또 다른 도전을 위해(2)
“컷! 세연씨, 조금더 진한 연기 안 돼?”
“네. 죄송합니다.”
세연은 벌써 열 번 가까이 이어진 NG에 입술을 깨물었다.
감독의 디렉팅은 NG가 날 때마다 바뀌었다.
방금전에는 조금더 진한 연기를 원한다고 했지만 바로 전 NG에서는 표정을 풀고 가볍게 해보라고 했었다.
도무지 디렉팅에 일관성이 없었다.
이 정도로 중구난방인 디렉팅을 하는 감독이라는건 애초에 듣지도 못했을 뿐더라 심지어 스태프들까지 유병세 감독이 오늘따라 유난히 컷을 남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세연은 치밀어오르는 짜증을 가라앉히고 다시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병세 감독의 쇠긁듯 거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야! 씨발, 그럼 일찍 말했어야 할 거 아니야!”
세연은 또 무슨 일이 터졌나 해서 감독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 감독 앞에는 조감독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이 새끼야? 어쩔거야? 지금 촬영 접어? 어? 오늘 일정 펑크 낼까?”
“죄송합니다.”
유병세 감독은 들고 있던 대본으로 조감독의 머리를 후려갈겼다.
퍽! 퍽!
“죄송합니다라는 말 듣자고 내가 물어보는거냐고! 해답을 내놔. 어쩔거야? 어떻게 할 건데?”
짜증이 난 세연이 유 감독에게 다가갔다.
“뭐 때문에 그래요?”
“세연 씨는 신경쓰지 말고 감정에나 집중해요.”
유 감독이 시선도 돌리지 않고 손을 내젓자 끝내 빡친 세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감정에 집중하게 생겼냐구요?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왜 자꾸 디렉팅이 오락가락해요? 이러니 내가 감정에 집중할수 있겠어요?”
“뭐라구요?”
유병세 감독은 황당함에 입을 쩍 벌렸다.
감독에게 현장에서 대드는 여배우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 톱스타인 임현주 급이나 되어야 했고 그것도 스탭이 안 보는 곳에서 항의를 하곤 했다.
이렇게 스탭들이 다 보는 앞에서 대놓고 거칠게 항의하는 여배우는 처음이었던 거다.
지금 은정의 태도는 완전히 싸우자는 모습이 아닌가?
유병세 감독 뿐만 아니라 스탭들까지 일제히 놀라 굳은채로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감독님이 화내는 것 때문에 현장 얼어 붙은거 안 보이세요? 현장 분위기 이렇게 만들어놓고 제가 감정에 몰입하기를 바라시냐구요.”
아무리 요즘 흥행 실적이 별로였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유병세 감독은 충무로에서 상당히 인정받는 감독이었다.
어디 감히 그에게 이런 식으로 대드는 배우가 있었던가?
너무 화가 나면 말문이 막힌다고 유 감독은 뭐라 대꾸해야 할지 몰라 입을 열지 못했다.
오히려 당황한 조감독이 세연을 말렸다.
“세연 씨, 그게 아니라 제가 실수해서 촬영시간을 알려드리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런 거예요.”
현장은 전문 촬영장이 아닌 강남의 큰 빌딩중 한 층을 빌려 촬영하고 있었다.
“가서 여기 관리인한테 말해보면 되는거 아니에요?”
“건물 관리인이 10시 이후로는 절대 촬영 못하게 한다고 해서 그런 겁니다. 제 실수에요.”
세연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촬영시간 10시에 끝나는거 모르는 사람 있었어요? 나도 아는데? 알면서도 그냥 촬영 한 거잖아요. 아니었어요?”
조감독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유병세 감독을 앞두고 차마 그녀에게 당신의 말이 맞다고 어떻게 시인하겠는가?
그걸 시인한다는건 유병세 감독의 실력이 졸라 떨어져서 헤메느라 촬영시간이 늦었다고 여배우 앞에서 고자질하는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지금 내가 잘못했다는 거야?”
더이상 참을수 없어 유 감독이 나섰다.
현장 스태프 앞에서 여배우에게 밟히는 순간 그는 더이상 얼굴 들고 이 바닥에 있을 수 없다는걸 알고 있다.
그렇기에 분위기만 봐서는 당장이라도 세연의 뺨이라도 후려갈길 태세였다.
“누구 잘못을 떠나서 문제가 생겼으면 일단 해결부터 할 생각을 해야 하는거 아니에요? 무작정 조감독님 쥐잡듯 잡고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 말 틀렸어요?”
이때 누군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세연의 앞을 막아서며 유병세 감독에게 넙죽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우리 세연이가 오늘 좀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죄송합니다. 제가 가서 잘 타이르겠습니다. 아니, 가서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그는 세연의 매니저였다.
“이봐요, 내가 지금...”
“죄송합니다. 제가 가서 단단히 주의 주겠습니다.”
세연의 매니저는 유병세 감독의 말이 다 이어지기도 전에 다시 한번 허리를 넙죽 숙이고는 세연의 손목을 잡고 도망치듯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비상구로 빠져나갔다.
“와... 씨발 이제 아주 새파란 신인 여배우까지 나를 밟으려고 하네? 좋냐? 야. 좋냐고.”
“아닙니다.”
“왜? 씨발 저렇게 예쁜애가 네 편 들어주니까 아주 좋아 죽겠잖아.”
“아닙니다.”
유병세 감독은 조감독의 머리를 대본으로 툭툭 때렸다.
“너 때문에 이게 뭐야? 현장 분위기가 이게 뭐냐고?”
“죄송...”
그때 갑자기 사무실 입구 자동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귀엽고 사랑스러운 외모로 한창 떠오르고 있는 신은정과 그 뒤로 여러명의 남자가 각기 한 짐을 품에 안고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들어서다 멈칫하며 주변을 살폈다.
하지만 아무리 돌아보아도 언니인 세연이 보이지 않자 옆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조명 스탭에게 목소리를 아주 낮춰 조심스럽게 물었다.
“언니 어디 있어요?”
“방금 내려갔습니다. 매니저랑 같이... 그리고 지금 감독님 심기 많이 불편하니까 말 걸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혹시 감독님 심기 불편하신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언니는 아니죠?”
“음... 언니분이 크게 일조하시긴 하셨는데...”
“아! 그렇구나. 알겠습니다. 가져온 도시락하고 간식 맛있게 드세요. 감독님께는 잘 말씀드려주시구요.”
“그래도 직접 말씀하시지.”
“아니에요. 괜히 일 더 커질거 같으니까 조용히 놓고 갈게요.”
은정이 짐을 나르는 직원들에게 몇 가지 일러주고는 조심스럽게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멀리 갈 필요없이 바로 세연의 밴이 보이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두들겼다.
“언니, 나야.”
벌컥 열리는 문.
“뭐야. 너 왜 왔어?”
“언제고 한번 들러서 간식 쏘라며? 그래서 간식 쏘려고 왔지.”
은정의 혹시나 언니가 울었나 해서 얼굴을 살폈다.
역시나 눈물 한 방울 흘린 티가 안 난 걸 보고 안심하며 차에 올랐다.
“하필 오늘 오고 그러니?”
“올라가보니까 아주 분위기 난리도 아니던데?”
“유 감독 길길이 날뛰고 있던?”
“멀리서 대충 보니까 조감독 잡고 있는 것 같긴 하더라. 왜 그런거야?”
“몰라. 오늘 아침 촬영부터 히스테리를 엄청 부리더니 별 문제도 없는 것 같은데 찍은거 또 찍고, 또 찍고... 사람이 좀 달라진 것 같더라니까.”
“난 저 감독 처음 볼 때부터 별로더라. 영화도 내 스타일 아니고. 그러게 이거 왜 골라가지고 그래?”
“지금에 와서 그게 할 말이니? 그러게 나 작품 고를 때 좀 도와주지 그랬어?”
“아니 뭐... 언니가 알아서 잘 고를거라 생각했지. 그리고 어차피 내 말 안 들었을 거잖아. 언니 남친 말 들었겠지.”
“정정해줄래? 남친이 아니라 전남친이야.”
“아이고, 예~ 알겠습니다.”
세연은 그 때 그 사단 이후 한종혁을 다시 보게 됐다.
이후 항상 그녀를 젠틀하게만 대하던 종혁은 본색을 드러내는 것처럼 무서운 성격을 드러냈고 충격을 받은 은정은 종혁에게 이별을 통보했는데 그게 일주일 전이었다.
“그래서... 언제 유 감독 화 풀어줄 거야?”
“내가 풀어줘야 해? 왜?”
너무도 당당한 말에 은정이 아닌 운전석에 앉아 있던 매니저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세연아. 성질 좀 죽이자. 감독이랑 싸워서 득 될 거 없잖아. 우리 이러지 말자.”
“오빠, 내가 정말 이러려고 그런게 아니라... 유 감독이 너무 한거 아니에요? 오빠도 현장에서 봤잖아.”
“나도 알지. 그런데 원래 유 감독 스타일이 저래.”
“뭘 저래. 스탭들도 저런거 처음 보는 거 같던데. 다들 놀라서 얼어붙은거 안 보였어요?”
“어쨌거나 이따가 올라가서 유 감독한테 사과해. 감독 위신 떨어지면 영화도 쫑나는거야. 너, 영화 하차하고 싶어?”
“하차 시키라지.”
세연이 쌩하니 고개를 돌리자 매니저는 애가 닳은 얼굴로 달랬다.
“너도 갑자기 왜 그러냐? 너 안 그랬잖아. 유 감독도 그렇지만 너도 요즘 좀 너무해. 신경질도 잘 내고.”
“내가 그랬다고요?”
“그래. 너도 요즘 좀 그래. 내가 이런말하기 그렇지만 대표님하고 그렇게 된 이후부터 너 좀 이상하긴 해.”
“아... 모르겠어. 어쨌든 유 감독한테 사과하는건 좀 생각해볼게요.”
“후... 알겠다. 나 잠깐 밖에서 담배 좀 피고 올게.”
“네.”
매니저가 차에서 내리자 은정이 물었다.
“진짜 전남친 때문에 그러는거야?”
“모르겠어. 아니, 솔직히 그것 때문에 일이 손에 안 잡히긴 해. 내가 너무 바보같고 그래.”
“그러게 우리 장 감독님한테 딱 붙어있었으면 이런일 없었지.”
“나 놀리는 거야?”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는... 그래서, 진짜 유 감독한테 사과 안 할거야?”
“그놈의 사과, 사과... 지겹다. 됐고, 넌 요즘 한가해? 언제고 온다고 하기는 했지만 벌써 올 줄은 몰랐는데.”
“나 오늘 후시도 끝냈어. 당분간 한가해.”
은정은 어깨춤을 덩실거렸다.
“좋겠네. 그럼 이제 뭐 할거야?”
“글쎄...”
세연은 은정의 얼굴에서 미소가 어리자 혹시나 하며 물었다.
“너 연애해?”
“어? 갑자기 무슨 연애?”
“너 좋아하는 남자 생기면 그렇게 비비꼬면서 실실 쪼개잖아.”
은정은 순간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는 아차 싶었는지 자세를 바로했다.
“내가 그랬던가?”
“누군데? 너 혹시 상대배우야? 그러면 안 돼. 얼굴만 보고 쉽게 만났다가는 큰일난다.”
“흥, 언니가 할 말이 아닌거 같은데?”
“난... 그래. 네 말이 맞다. 내 주제에 무슨 충고를 하겠니. 그래서 누군데?”
은정은 쓱 시선을 피했다.
“비밀이야.”
“뭐야. 진짜 상대배우야? 상대배우가 누구였지? 아, 김시훈, 맞지? 아역배우 출신 걔. 걔가 잘생기긴 했지.”
“걔 아니야.”
“아니야? 그럼 누구?”
“큼... 들으면 놀랄텐데.”
“아 씨. 또 사람 감질나게 하네. 누군데? 빨리 말해봐.”
은정은 차 밖을 바라보며 매니저가 아직 담배를 피고 있는 걸 확인하고는 입을 열었다.
“미쳤다고 등짝 때리기 없기.”
순간 세연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걸 느꼈다.
“너, 뭐야. 누구 만나는데? 재벌 늙다리는 아니지?”
“그런거 아니고...”
“그럼?”
“일단 먼저 약속해. 등짝 때리기 없기.”
은정은 어쩔 수 없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지장을 찍어주었다.
“알았어. 약속할 테니까 얼른 말해봐. 누군데?”
“큼... 장동훈 감독님.”
“뭐!”
은정은 훌쩍 상체를 뒤로 내뺐다.
“때리기 없기야.”
“너, 진짜야? 장동훈 감독님이랑 만난다고?”
“아직 정식으로 만나는건 아니고... 그냥... 썸?”
“미친년. 장동훈 감독님 나이가 얼만지 알고 그러는거니?”
“나이가 무슨 상관이래? 내가 좋아하는데?”
“네가 먼저 좋아한다고 덤볐어?”
“덤볐다기 보단 꼬리를 좀 치긴 했지.”
은정은 손바닥을 세워 살랑살랑 흔들어보였다.
이제 세연이 번개처럼 달려들어 그녀의 허벅지를 냅대 후려쳤다.
“이 미친년! 미친년!”
“아! 아프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