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93화 (93/116)

# 93

또 다른 도전을 위해(1)

유명진 감독이 연출한 ‘건축학 원론’이 후반부 작업에 들어갈 즈음 동훈의 ‘동네 아저씨’ 프리 프로덕션이 거의 마무리 되고 크랭크인을 앞두고 있었다.

기존에 최소 세 달을 생각했던 프리 프로덕션 기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근 두 달 만에 일을 끝냈는데 이는 동훈에 대한 평판이 상당히 많이 상승했기에 가능했었다.

오디션을 본다손 치면 홍보팀이 큰 노력을 하지 않아도 수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고 부족한 스탭들도 공고를 올리는 즉시 경력직들이 몰렸다.

로케이션 헌팅이나 구청에 허가를 맡는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장동훈 감독이 연출하는 영화라고 하면 다들 별다른 조건을 내걸지도 않고 굉장히 협조적으로 나왔다.

새로 들어온 조감독인 오원석 역시 처음 일하는 것치고는 손이 빠르고 센스가 있어 일을 쉽게쉽게 해나가는 편이었다.

이래저래 좋은 사람들과 운이 겹쳐 일이 빠르게 진행됐지만, 꼭 좋은 일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시는 우리와 같이 일 할 생각도 하지 않는게 좋을 겁니다!”

‘쎈 녀석들’의 차지훈 대표는 사무실로 직접 찾아와 계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에 대한 분노를 토해냈었다.

“계약이 파기됐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수고하신것에 대해서 충분할 만큼 지불한 걸로 알고 있는데요?”

당시 동훈이 반박했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은채 한동안 엄포를 해대고는 쌩하니 나가버렸다.

이후 기사를 통해 장동훈 대표의 DH미디어가 얼마나 불합리한 일을 저질렀는지 성토했지만 DH미디어의 반박기사를 통해 해당 논란은 슬그머니 들어가고 말았다.

이 바쁜 와중 유명진 감독은 동훈에게 SOS를 치며 막바지 편집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개봉을 앞둔 감독의 피말리는 심정을 잘 알기에 스케줄이 빡빡함에도 동훈을 억지로 시간을 쪼개 편집실을 들렀다.

이곳 편집실은 지금까지 계속 이용해왔던 곳으로 실력이 상당한 곳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와 있었다.

“임현주 씨?”

현주는 평소와는 다르게 티셔츠와 청바지로 수수한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화장을 진하게 하지 않았음에도 그 미모는 어디가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네요.”

“여긴 어쩐 일이에요? 왜 오셨어?”

명진에게 고개를 돌려 물어보니 명진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편집 과정을 좀 보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뭐, 안 될 것도 없다고 생각해서...”

동훈은 순간 ‘여기서 연애하려고?’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괜히 둘 사이가 더 어색해질까봐 가까스로 참았다.

“현주 씨까지 불러놓고 나는 또 왜 불러?”

“현주 씨와는 다르죠. 일단 앉으세요, 감독님. 마실거 뭐 드릴까요?”

“됐어, 여기 직원들 귀찮게 뭘 시키냐.”

동훈의 말에 이곳 편집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누가 들으면 저희가 감독님을 박대하는줄 알겠습니다.”

“아유. 무슨 말씀을요. 제가 정신없이 오느라고 빈손으로 온게 더 미안한데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데 어딜 봐달라고 부른거야?”

명진이는 잠시 미간을 찡그리다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몰라? 뭘 모르는데?”

“그냥 어찌어찌 잡긴 했는데 전체적으로 뭔가...”

어째 횡설수설하는걸 보니 왜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뭐가 부족한지 잘 모르겠다 그거지? 그런데 막상 이대로 가려니까 불안하기도 하고. 그렇지?”

“네. 맞습니다.”

“아이고야... 알겠다.”

심리적인 불안감은 누가 도와준다고 해서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가장 좋은건 몇 번의 성공을 통해 스스로 자신감을 찾는게 중요한데 어차피 재능이야 차고도 넘치기에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정말 편집에서 문제점이 발견되서 재촬영을 해야 한다거나 하는 일만 없다면 말이다.

편집기사가 첫 시작을 보여주기 위해 기계를 만지는 동안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현주는 조금 굳은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여보이곤 입을 열지 않았다.

뭔가 이상했지만 동훈은 묻지 않고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이제부터 일을 해야 할 시간이기 때문이다.

2시간 뒤,

“잘 했는데?”

아직 편집이 완료된 건 아니었다.

CG를 넣어야 할 부분도 있고 편집이 거칠어서 손봐야 할 부분도 있다.

그걸 모르는 편집기사와 명진이 아니었기에 동훈이 해야 할 일은 전체적인 영화의 흐름이 괜찮았는지만 보면 됐다.

그리고 동훈이 봤을땐 생각보다, 아니... 솔직히 김영웅 감독님이 계시던 곳의 작품보다 훨씬 더 괜찮은 작품이 나와 감탄하고 있었다.

과연 천부적인 재능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촬영일정을 고수하면서도 거의 완벽에 가깝게 완성도를 올린 것에 박수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진짜요?”

“솔직히 감탄했다. 정말 좋아. 편집이 거친 부분은 정리할 거니까 내가 말 안해도 되겠고, 내가 건드릴 부분이 없는데?”

“정말 괜찮은 거죠?”

“그렇다니까.”

“후... 감사합니다. 아...”

명진이 가슴을 쓸어내리자 편집기사가 웃으며 말했다.

“거 봐요. 내가 영화 끝내주게 나왔다고 했잖아요. 내가 영화 편집을 몇 년을 했는데... 내가 만진 영화만 오백편이 넘어요. 이건 진짜 잘 나온거라니까.”

“내가 기사님 실력을 못 믿어서가 아니라 불안하잖아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하하하.”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지 명진의 얼굴은 잔뜩 긴장했던 처음과는 달리 많이 풀려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고, 괜히 또 계속 고민하다가 쓸데없이 편집 망가뜨리지 마. 알겠지?”

“네. 알겠습니다.”

동훈은 살짝 현주의 눈치를 보았다.

보통 배우는 편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편집실에 들러 편집본을 확인한다던가 하는 일이 거의 없다.

그러고 싶다고 해도 감히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하는게 맞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여기 왔다는 건 그녀와 명진이 사이가 아주 매끄럽게(?) 잘 흘러간다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편집실에서 기사를 보내고 둘이서 알콩달콩(?) 데이트를 즐기려고 왔나 싶었던 거다.

그런데 편집본을 봤음에도 그녀의 살짝 굳은 표정은 풀어질 줄 몰랐다.

그걸 보니 동훈은 그녀가 명진에게 어떤 목적이 있어서 왔음을 알았다.

“그럼 난 이만 일어설게. 뭐, 둘이 할 이야기 있으면 하고. 기사님은 저랑 잠깐 커피나 한잔 하실래요?”

“아, 그럴까요? 저도 한참 앉아 있었더니 허리가 찌뿌둥해서...”

기사도 현주의 묘한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어색하게 기지개를 하며 일어나는데 현주가 말했다.

“감독님, 잠깐 할 이야기가 있는데...”

“네? 나요?”

“네. 감독님이요.”

동훈이 주춤거리는 사이 편집기사는 눈을 찡긋하며 얼른 편집실을 나갔다.

결국 동훈은 다시 자리에 앉고는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그렇게 보이세요?”

“분위기가 좀 그래 보여서요. 할 얘기가 뭔데요?”

현주는 잠시 동훈의 눈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심각한 이야기 아니니까 그렇게 무게 잡지 말아요. 그냥 영화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온 거예요.”

“그럼 왜 날 불러 앉혔어요?”

“그냥... 궁금한게 있어서요. 알다시피 전 감독님이 여기 오는지도 몰랐어요.”

그녀가 오는지도 몰랐다고 한 말에 옆에서 명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 저 모습이 마누라 말 잘 듣는 팔불출 같은 모습으로 보였다면 착각일까?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자꾸 빙빙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말 있으면 해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감독님네 회사 배우들 받는다고 했죠? 혹시 제가 가면 받을 거예요?”

“네?”

그녀의 제안에 놀란 사람은 동훈 뿐만이 아니었다.

명진이도 놀라서 그녀를 향해 휙 돌아앉으며 물었다.

“회사 나올 겁니까?”

“어차피 계약기간이 올해 말까지였어요. 연예인들 회사 옮기는게 직장인들 회사 옮기는 것처럼 큰일은 아니니까 그렇게 호들갑 떨 듯이 말하지 말아요.”

명진이는 민망함에 시선을 쓱 피했다.

“아, 네. 뭐...”

그게 또 미안했던지 현주가 덧붙였다.

“미안해요. 면박주려던게 아니라 그냥 상황이 그렇다는 거였어요.”

“괜찮아요. 어쨌든 그래서요?”

“그래서긴요? 그냥 회사 계약기간이 끝나가니까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거죠.”

동훈은 아무래도 이상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우리 회삽니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회사는 다른 매니지먼트 회사들보다 계약금을 더 주지도 않고 지원도 좋지 않아요. 특히 현주 씨처럼 많은 케어를 받았던 톱스타가 올만큼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지도 않습니다.”

“시스템 뭐 이런거 상관하지 않아요. 지금에서야 느끼지만 사실 그런 시스템보다 더 중요한게 어느 작가와 어떤 작품에 날 연결시켜 줄 수 있을지가 더 중요한 것 같거든요. 그리고 다른건 몰라도 감독님이라면 나중에 내 뒤통수 칠 것 같지는 않아 보여서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대략 짐작이 갔다.

“누가 당신 뒤통수 치던가요? 설마 고은숙 대표가?”

“지금 이 자리에서 고 대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내가 처리할 문제고 누구 도움을 받고자 하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난 감독님이 이 자리에 있는 김에 한가지 확답을 받아 보려는 거예요. 회사를 나올 때 최소한 갈데는 있어야 하잖아요.”

더 이상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았다.

“일단 우리야 현주 씨처럼 톱스타가 오면야 좋긴 합니다.”

“그렇죠? 나 정도면 얼굴마담으로 괜찮잖아.”

“얼굴 마담까지야...”

“어쨌든 고마워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어색한 침묵.

보아하니 이제 할 말 다 끝났다는 것 같았다.

여기서 자리에 죽치고 있으면 눈치없다는 소리를 들으니 얼른 엉덩이를 뗐다.

“그럼 수고하고.”

“옙! 감사했습니다.”

“시사회 전에 밥이나 사라.”

“이를 말씀입니까.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동훈이 문을 닫고 나가자 명진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현주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언제 일 끝나요?”

“일은 다 끝났어요. 내일 다시 와서 편집 다시 맞춰가면 됩니다.”

“그럼 나가서 밥 먹어요. 나 배고파요.”

“지금요?”

“왜요? 나랑 밥 먹는거 무서워요?”

“아니, 무서운게 아니라... 갑시다. 혹시 꽃게 좋아해요? 마장동 쪽에 꽃게찜 기가 막히게 하는데 아는데.”

현주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따라나섰다.

*

만면에 미소를 띠며 자신들의 아지트인 페르소나 사무실로 들어온 유병세 감독은 순간 멈칫하더니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왜 오셨어?”

“아... 짐을 정리하러. 내가 좀 지저분하게 썼지?”

박광효 감독이 어쩔줄 모르며 황급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 안 마주칠려고 이 시간에 왔구만?”

“아니, 그런게 아니라 괜히 낮에 오면 나 짐정리하느라 부산스럽게 하니까 지금 왔지.”

박광효 감독이 DH미디어와 계약한 직후 얼마나 화를 냈는지는 이 사무실을 다니는 감독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아래층 사무실을 쓰던 사람이 혹시 싸우는거 아니냐고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묵묵히 그 화를 다 뒤집어 쓰던 박광효 감독은 짐을 빼서 나가겠다고 했고 유병세 감독은 박 감독에게 일주일의 시간을 줄테니 그 안에 짐을 안 빼면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는다고 했었다.

“웃기고 있네. 아씨 오늘 회식하고 기분좋게 왔더니...”

유병세 감독은 성질을 부리며 커다란 소파에 몸을 던졌다.

멀리 떨어졌지만 그에게서 진하게 풍겨오는 술냄새를 보니 얼마나 퍼마셨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럼 조용히 정리할게.”

박 감독은 그의 눈치를 보며 움직임을 빨리 했다.

이미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왔기에 버릴건 그 안에 버리고 컴퓨터 같이 꼭 써야 할 건 박스에 담았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보고 있던 유 감독이 툭 내뱉었다.

“야구 영화라며? 그게 성공할거 같아?”

“그냥 해보는거야. 아무것도 안 찍을수는 없잖아.”

“잘 생각해. 그런 영화 한번 잘못 만들면 나중에 개폭망한 감독이라고 찍혀서 아무것도 못 찍어.”

“동훈이가 이거 망해도 기회 준다고 했어.”

“지랄...”

유 감독은 코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참 뒤, 박광효 감독이 정리한 짐을 차에 싣고 쓰레기까지 말끔히 정리하고 나가려고 할 때 언제 눈을 떴는지 유 감독이 또 말을 걸었다.

“나중에 나서 후회하면서 다시 오고 싶다고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난 깔끔한게 좋거든.”

“그럼 당연하지.”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리던 박 감독은 유 감독에게 몸을 돌리고 말했다.

“어지간해서는 이런말하기 싫은데, 장동훈 감독한테 네 시나리오 보여줬거든.”

“뭐? 미친 거야?”

“어차피 다 돌아다니는 거잖아. 그런데 장 감독이 그거 보고 씁쓸하게 웃더라. 너 안 됐다고.”

“허... 이런 씨발...”

“나보다 네 걱정을 더 해야 할 것 같아. 그럼 잘 있어라.”

사무실을 나서는 박 감독의 발걸음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무척 가벼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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