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액션의 신기원(3)
“안녕하십니까! 오원석입니다.”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청년은 똘망똘망한 눈빛으로 동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 동훈이 공모를 낸 조감독 모집에서 직접 발탁한 인재였다.
조감독 지원에는 일체 서류 심사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력서야 받긴 했지만, 공모 요강에도 출신대학과 학과는 전혀 심사에 반영하지 않는다고 올려서 상당한 주목을 받았었다.
오직 자신이 제작한 단편 영화 하나를 받아 심사해 가장 높은 점수를 받은 사람을 뽑겠다고 했는데 무려 회사에 도착한 단편 영화만 2백여 편에 달했다.
“여기 찾아오느라 힘들지는 않았어요?”
동훈의 사무실은 이제 강남 대로변의 큰 건물로 이동했다.
인테리어가 끝난 사무실은 너무 깔끔하고 좋아 직원들과 한동안 일도 안하고 사무실에서 파티를 하기도 했었다.
지금도 사실 강화유리로 된 테이블과 멋들어진 장식품으로 꾸며진 회의실이 어색할 정도였다.
“아니요. 사무실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서 놀랐습니다.”
“우리도 놀랐어요. 우리도 이사 온 지 얼마 안 됐거든요.”
“정말 다른 제작사와 뭔가 다르긴 한 거 같습니다.”
LS엔터 같이 대기업 계열사인 제작사를 제외하면 DH미디어처럼 사무실을 이렇게 꾸민 회사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일단 다른 제작사에 비해 직원 규모가 월등히 많았다.
다른 제작사들은 영화가 들어가면 외부 스탭을 모집해 제작에 들어가지만 DH미디어 같은 경우는 스탭진들을 채용해서 그들로 제작에 들어가기에 직원 규모가 압도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직원이 상시 채용된 상태다보니 인건비가 많이 나갈 수밖에 없는데 동훈을 이를 감수하고 더 능력 있는 스탭을 아예 자신의 사람으로 가지고 있으려고 했다.
추가로 DH미디어가 제작사의 업무만 하는게 아니라 배우 매니지먼트 사업까지 진출하면서 배우 관리를 위한 직원들까지 채용하며 그 규모를 더 늘렸다.
현재 출근하지 않는 스탭을 제외하고 상시 출근하는 직원만 서른명을 넘을 만큼 회사는 하루가 다르게 커가고 있었다.
“마음에 들어요?”
“네. 물론입니다.”
“다행이네요.”
“말씀 편하게 하십쇼.”
“그럴까? 이제 채용이 결정됐으니까. 영화는 언제부터 찍기 시작한거야?”
“대학 다닐때부터 영화에 관심이 많아서 영화 동아리에서 활동했고 단편 영화를 찍은 건 대학 4년 차에 영화 동아리에 뭔가 남겨볼게 없을까 하다가 찍게 됐습니다.”
“그런 것 치고는 꽤 실력 있던데?”
“그런가요? 감사합니다.”
그는 쑥스러운지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 나와 3개 작품을 해볼 거야. 그동안 틈틈이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써 보도록 해. 중간중간에 나한테 줘보기도 하고. 그래서 내용이 괜찮다 싶으면 3개의 작품이 끝난 뒤에 연출봉을 잡게 해줄 거야.”
“감사합니다!”
오원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그는 그저 앞으로의 길이 순탄하게 펼쳐져 있기에 기분이 좋을 테지만 아마 이 조건이 얼마만큼 파격적인지는 모를게 분명했다.
이 바닥에 들어올 때 동훈이 제시한 것처럼 몇 편 끝나고 바로 상업영화에 대뷔시켜 준다는 제안을 받은 감독이 몇이나 될까?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모든 감독들은 아무 기약 없이 이 바닥에 들어와 연출부 막내부터 시작해서 성공에 대한 희망 하나로 묵묵히 고난을 버텨온다.
언제 연출봉을 잡게 될지 짐작도 하지 못하고 그저 자신에게 좋은 기회가 언젠가 오겠지라는 희망으로 버텨가는데 오원석은 언제 연출봉을 잡게 될지 알게 되니 이것보다 더 좋은 출발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 유지은 팀장한테 가서 프리 프로덕션 일정 준비 잡고 조연들 오디션 계획도 잡아. 이번주 금요일까지는 일정 확정해서 공고 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연신 허리를 숙이곤 회의실을 나갔다.
곧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은 팀장이 들어왔다.
“굳이 신인 조감독을 쓸 필요가 있어요? 연출할 때 피곤하실 텐데?”
아무래도 일을 새로 가르쳐야 하기에 노련한 조감독들보다 훨씬 손이 많이 갈 걸 염려하는 거였다.
그녀의 걱정이 일리가 있었지만 동훈은 그런 그녀에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하하, 괜찮아요. 당연히 힘들거라는거 알고는 있는데 기존에 다른 감독들하고 호흡을 맞춰던 조감독들보다는 그냥 때 묻지 않은 백지같은 친구를 원했어요. 노련한 조감독이 일은 잘하겠지만 이미 머릿속에 자신만의 연출이 어느 정도 잡힌 사람들이라 내가 가르쳐줘도 받아들이기도 힘들고 우리가 지원해준다고 해서 더 나은 작품이 나오리라는건 기대하기 힘드니까.”
“하긴, 그러니까 박광효 감독한테 공동 연출하자고 하셨겠죠.”
“그래도 박광효 감독은 그나마 좀 머리가 열려있는 편인거 같아요. 전 솔직히 박광효 감독이 내 제안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전에 양호민 감독도 대표님의 제안을 받았잖아요. 심지어 대표님이 각본에 손대지 못하면 아예 계약을 안 하겠다고 하셨는데 그것도 수긍하셨구요.”
“그것과는 달라요. 양호민 감독님과의 거래는 단순히 각본에 손을 대느냐 마느냐였지만 박광효 감독은 연출에 개입하느냐였잖아요. 연출에 개입한다는건 각본에 손을 대는 것과 차원이 다른 문제에요. 완전히 자신을 내려놓지 않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거든요. 나이도, 경력도 한참이나 어린 후배가 연출에 손을 대겠다는데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그게 쉽게 되는게 아니에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당시에.”
“그랬구나.”
“연출이라는것도 일종의 경험과 지식의 산물인데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을수록 자신만의 생각이 굳어지니까 가르치는 입장에서는 답답할때가 많아요.”
유지은 팀장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대표님은 지금까지 많은 조감독과 같이 일해보시지도 않았는데 그걸 다 어떻게 아세요?”
동훈은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지금 유 팀장에게 말한 내용은 온전히 동훈의 지식이라기 보단 김영웅 감독의 지식과 경험이었기 때문이다.
“그냥 아는 거죠. 하하하. 어쨌든 수고 좀 해주세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가르쳐야 할 겁니다.”
“원래 가르치는 건 제 전문이에요. 제 밑에서 배운 애들 밖에 줄 세우면 인도가 막혀서 사람들 돌아다니지도 못할 걸요?”
“아... 유 팀장님 허풍이 좀 군대 스타일이신데?”
“어머, 허풍이 아닌데?”
유 팀장은 새침하게 웃으며 회의실을 나갔다.
*
“으흥~”
현주가 콧노래를 부르며 잡지를 뒤적이는 걸 보는 고은숙 대표의 속은 조금씩 끓어올랐다.
“좋니? 촬영 끝나니까 좋아?”
“좋지요~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네.”
“장동훈 감독 회사가 매니지먼트 회사까지 한다더라? 얘기 들었니?”
현주는 고 대표의 물음에 여전히 잡지에 시선을 고정하고 대답했다.
“응, 우리 촬영장 막내가 얘기 하더라구요.”
“막내? 막내 누구?”
“은정이. 걔가 우리 촬영장 막내거든요. 아주 예뻐. 말하는 것도 예쁘고. 하는 짓도 예쁘고.”
“너 되게 의외다? 나 너 후배 여배우 칭찬하는거 처음 듣는거 같아.”
“허, 내가요?”
현주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지었지만 고 대표는 팔짱을 끼며 계속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너 아무리 예뻐도 예쁘다는 소리 안 하잖아.”
“나도 나이가 들었나보죠. 어린데다가 싹싹하니까 그냥 예뻐 보이더라구요.”
“너 유명진 감독이랑 수상하더던데?”
순간 잡지를 넘기던 현주의 손길이 멈칫거렸다.
하지만 이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평소의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설마 내가 그... 덥수룩하고 뭔가 정돈되지 못한 그런 비쥬얼의 남자랑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거에요?”
고 대표가 생각해도 그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는지 손을 휘저었다.
“아님 말고.”
“뭐야 그게? 나 지금 놀려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흘리고 다녀? 석태에요? 석태 맞구나?”
현주의 쌍심지가 하늘로 솟구치자 고 대표가 얼른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냥 물어보니까 제 딴에는 걱정된다는 식으로 말한 거지. 너 쓸데없이 석태 잡지 말어. 걔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게 일하는지 아니?”
“내가 뭘?”
“걔가 너랑 일한 다음부터 원형탈모 생겼었잖아. 몰라?”
“그게 언제적 일인데? 하여튼 생긴건 산적같이 생겨가지고 입은 어찌나 싼지... 그래서 걔가 나랑 유명진 감독이랑 그렇고 그래 보인데요?”
“그건 내가 실수했다고 치자.”
“칫.”
현주가 입을 삐죽이며 다시 잡지에 시선을 돌리자 고 대표가 은근한 얼굴로 물었다.
“너, 재계약 언제 할거야?”
현주가 잡지를 덮으며 씨익 미소짓는다.
“재계약? 왜? 나 잡고 싶어요?”
“아니... 서로간에 분명히 정할건 정해야 우리도 계획이라는걸 세우잖니.”
“생각 좀 해보구요.”
“생각할게 뭐 있어?”
“솔직히 고 대표님이 전에 말했잖아요. 나 데뷔해서 지금껏 계속 대표님이랑 같이 해왔으니까 이제는 다른곳 찾아가도 된다고. 그때도 별생각 없었고 지금도 없긴 한데 대표님이 물어보니까 생각 좀 해봐야겠네요.”
“너는 그렇게 사람 놀리면 재밌니?”
“재밌지~ 히히.”
고 대표는 현주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했다.
“너 어딜 가더라도 단 한 군데, DH미디어는 안 돼.”
“왜요?”
“거긴 선을 넘었어. 제작사면 제작에만 몰두해야지 왜 매니지먼트에 손을 대? 이건 아닌 거야.”
현주는 고 대표가 정색하며 말하자 진심으로 하는 말임을 알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운채 물었다.
“그럼 장동훈 대표한테 항의해봤어요? 왜 매니지먼트 사업에 손을 대냐고?”
“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일인데 내가 거기 가서 항의하면 내 꼴이 뭐가 되겠니? 양아치 밖에 더 돼?”
“그렇긴 하네.”
“법적으로는 문제없지만 상도의라는게 있는 거야. 구멍가게 옆에 마트 생기면 구멍가게는 망하라는 얘기 아니니?”
“WAS가 구멍가게였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지금 하는 걸로 봐서는 아예 자기네가 제작하는 작품의 배우는 자기네가 알아서 공급하겠다는 마인드 같은데 이거 완전히 대기업 마인드잖아.”
“음... 일리가 있네.”
현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고 대표는 다시 단단히 일러두었다.
“행여 가더라도 거기는 안 되는거야. 알겠지?”
“알겠어요. 내가 다른 기획사 가더라도 거기는 안 갈게요. 그것 때문에 아까 그렇게 떠 본거예요?”
“아니... 석태가 한 말이 설마 싶기도 했고...”
“석태 이 새끼를 진짜...”
다시 석태에게 불똥이 튀려 하자 고 대표가 얼른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너 다음 주에 두바이 다녀올래?”
“두바이? 갑자기 웬 두바이?”
“프라다 잡지 화보 촬영 장소를 두바이로 잡았거든.”
“그거 한 달 뒤 아니었어요?”
“일정이 당겨졌대. 호텔 좋은데 잡아줬다고 하니까 촬영도 하고 쉬다 와.”
“오~ 나야 좋지. 그런데 좀 애매하네?”
“왜?”
“후시 녹음 일정 아직 안 나왔거든요. 거기 일정 나와야 나도 편하게 쉬다 오든가 할 텐데.”
“얘가 오늘 진짜 이상하네? 너 원래 이런거 안 빼잖아? 후시 일정이야 너 빼고 다른 사람 잡고 너만 따로 하면 되는걸.”
현주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까 그게 다 민폐더라구요. 나이도 먹었는데 이제 나도 남한테 피해는 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디가? 저녁 같이 안 먹어?”
“나 피부 예약 잡았어요. 오늘 저녁은 굶을 거야.”
“허이구? 촬영 끝났는데도 다이어트를 이어간다고?”
“나 원래 평소에도 관리 많이 했어요. 뭘 새삼스럽게... 나 가요~”
현주는 고 대표를 향해 손을 흔들고는 대표실을 나갔다.
고 대표는 대표실 문을 한참 바라보다가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 나야. 이게 재계약을 안 할 모양인데? 아직 한다, 안 한다 확답은 안 하는데 느낌이 그래. 애가 내 눈을 피해.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 어. 일단 서류 준비하고 케빈 박한테 토스해. 그래.”
전화를 끊은 고 대표의 얼굴은 서리가 내린 것처럼 냉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