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액션의 신기원(2)
갑작스럽게 꺼낸 미션이라 잘할까 싶기는 했다.
데니스 창은 팀원이랑 몇 번 어떻게 할지 합을 맞추고 난 뒤, 잠시 숨을 고르다가 달려들었다.
파박!
막고 찌르다가 팔을 꺾어 제압하는 장면까지.
짧은 공방이라 뭐가 어떻게 진행된건지 정확히 알지 못했지만 뭔가 되게 박진감 있었다는건 확실했다.
“와... 멋있네요.”
“하하하! 그런가요? 감독님께서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일단 저희가 원래 다른 무술팀하고 계약이 된 상태에요. 그런데 몇 개 콘티를 받아보니까...”
“마음에 안 차셨군요.”
“네. 그랬어요. 그래서 다 른곳을 알아보다가 온 거라 당장 계약하기는 그렇고, 제가 각본을 드릴테니까 액션 콘티를 짜주셨으면 좋겠어요. 만약 계약 못하게 되면 콘티를 만든 것에 대한 비용은 지불할게요.”
“아유, 제가 말씀드리기 민망한 부분인데 먼저 꺼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솔직히 그런 부분을 너무 쉽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으셔서요. 곤란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러게요. 임대료 대시기 힘드실텐데.”
“하하하! 더 비싼데로 옮겨서 감독님께 부담 팍팍 드려야겠습니다.”
“여기서 더요?”
“그러면 조금 더 비싸게 계약할 수 있는거 아닌가요? 하하하!”
조금 부담스럽게 호탕한 그였지만 어쨌든 액션의 형태는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
며칠 뒤, 무술팀 ‘싸움꾼’이 보내준 액션장면 콘티는 동훈의 마음을 상당히 흡족하게 만들었다.
“바로 계약한다고 하세요. ‘쎈 녀석들’한테는 계약 파기한다고 하시구요.”
유 팀장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걱정했다.
“어후, 그쪽에서 상당히 크게 반발할텐데. 알겠어요. 일단 잘 얘기해서 달래볼게요.”
“계약서상에 크랭크인 들어가기 전에는 한쪽에서 문제 제기하면 계약을 취소할 수 있다고 해놨잖아요.”
이제는 모든 계약을 변호사 검토 하에 체결하고 있고 뭐하나 문제가 생길 경우를 대비해서 단서 조항까지 꼼꼼히 달아놓았다.
이번 계약 역시 그런 사항을 미리부터 체크해 놨기에 동훈은 계약을 파기하는데 있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긴 하지만 ‘쎈 녀석들’ 입장에서는 이런 적이 아마 처음일 거예요. 자존심이 엄청 상할텐데.”
“음... 그런데 자존심이 상하고 그냥 욕하고 끝내면 ‘쎈 녀석들’도 발전을 못할 겁니다. 이런 상황을 겪어 보고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다는 경각심이 들어야 더 노력해서 계속 성장할 수 있겠죠. 솔직히 대한민국 최고 무술팀이라는 곳에서 보여주는 실력이 생각보다 별로여서 전 조금 실망했습니다.”
“맞는 말씀이세요. 부디 좋은 쪽으로 반응해야 할 텐데요.”
“그렇겠죠.”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고 양지원 대표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그녀 특유의 밝고 쾌활한 분위기는 어디 가지 않았다.
상큼한 미소로 인사하니 사무실 분위기가 살아나는 듯했다.
“일찍 오셨네요. 들어가시죠.”
“오늘따라 신호빨이 죽이던데요? 맨날 이랬으면 좋겠어요. 운전대만 잡으면 속이 답답해져서... 아하하! 제가 말이 많았죠?”
“아닙니다. 차는 뭘로...?”
“시원한 물 주세요. 얼음 동동 띄워서.”
회의실로 들어온 그녀는 자리에 앉기도 전에 가방에서 한뭉치의 서류를 꺼내면서 물었다.
“유명진 감독님 작품 ‘건축학 원론’이요, 촬영은 거의 끝난 건가요?”
“네. 모레면 일정상 모든 촬영이 마무리 됩니다.”
“굉장히 빠르시네. 소문은 들었어요. 장동훈 감독님 촬영이 그렇게 짧고 곁다리가 없다면서요?”
“하하, 곁다리요?”
“연출자가 불안해서 의미 없이 계속 찍는 걸 안한다면서요. 스탭들이 장동훈 감독님을 그렇게 좋아한다던데?”
“돈 많이 줘서 좋아할 겁니다.”
“어머, 어쩜 스탭들 좋아할 일만 그렇게 쏙쏙 하세요?”
“양 대표님은 어쩌면 그렇게 칭찬을 잘 하세요?”
“음~ 칭찬할만한 상대한테만 칭찬하는 거랍니다. 제가 또 빈말은 잘 안 하거든요. 어쨌거나 자~ 여기 보시면요, A&P에서 구상하는 올해 말 판매일정을 보내줬어요. 얘네가 그냥 작품 던져주면 마구잡이로 파는게 아니라 일정에 맞춰서 각 국가에 보내는 거예요.”
그녀의 브리핑에 유지은 팀장이 대꾸했다.
“작품이 나올 때마다 계속 제시하는게 아니군요.”
“워낙 판매하는 작품이 많으니까요. 하나 받을 때마다 한 작품씩 각 국가에 제시하려면 일이 장난 아니게 되겠죠? 그래서 한달에 한번, 또는 분기마다 작품을 모아서 제시해요. 당연히 반응이 괜찮을 것 같은거는 한 달에 한번, 그렇게 큰 흥행이 예상되지 않을 작품은 분기에 모아서 제시하면 각 나라의 배급사에서 분할해서 가져가는 식이죠.”
“음... 만약 작품에 투자한 돈을 빨리 회수하고 싶다면 후반기 작업을 당겨서 해야겠고, 그게 아니라면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겠네요?”
“맞아요. 일단 알고 있으시라고 보여드린 거예요. 그리고 여기 보시면 알겠지만 멜로 영화는 그렇게 많은 돈을 쳐주지 않아요. 블록버스터에 비해 흥행성이 떨어진다고 보는 거죠.”
동훈이 보고 있다가 말했다.
“아니 뭐 작품을 보지도 않고 가격을 메겨 버리네.”
“이건 그냥 통상적인 가격을 먼저 제시한 거구요. 당연히 1차 예고편 제작해서 보내주면 그걸 보고 가격 협상은 다시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쪽에서 작품을 비관적으로 보면 가격은 이것보다 더 낮아질 수도 있어요. 뭐, 당연한 얘기지만.”
“음... 쉬운게 없네요.”
“그런 셈이죠. 일단 촬영 종료되고 후반기 작업 들어가면 1차 예고편은 언제쯤 받아볼 수 있을까요?”
“세 달에서 네 달 정도는 생각하고 있어요.”
양지원 대표는 예쁜 눈을 부릅뜨며 물었다.
“생각보다 기네요?”
“옛날엔 액션이나 블록버스터 영화에만 CG가 들어갔는데 요즘 영화는 이런 멜로물이나 일상적인 드라마에도 CG가 상당 부분 들어가요. 아예 처음부터 CG가 들어갈 부분을 통으로 만들어내는 거면 미리부터 의뢰를 해놓는데 카메라에 담긴 부분에다가 CG를 씌우는 형식이라 촬영이 다 끝난 다음에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다 보니까 세 달에 끝내주면 그것도 감사한 겁니다.”
“아... 그렇구나. 제가 일을 시작했을때는 상업 영화를 손대기에는 벅차서 애니메이션, 그것도 해외판매가 가능한 쪽으로 집중하다 보니까 상업 영화 제작에 관해서는 잘 몰라요.”
“모를 수 있죠. 괜찮습니다.”
양지원 대표는 씨익 미소짓더니 다시 브리핑을 이어 나갔다.
“일단 ‘건축학 원론’은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은 대표님께서 부탁하셨던 건데요. 여기... 이쪽 보시면 헐리우드쪽에서 아시아 시장에 관심을 가진 투자사 리스트에요. 어느 정도 사이즈가 있을 만한 곳으로 추렸는데 각 투자사들마다 특징이 있어서 투자받을 때 고려하시면 좋아요.”
동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무슨 특징이요?”
“음... 여기 라이언 컴퍼니라고 돼 있는데는 주로 공포영화나 스릴러 위주로 투자하는 회사에요. 타율도 좋아서 작년 순익이 상당했다고 알고 있구요. 그리고 여기, 빈센트 리치 앤 컴퍼니라고 돼 있는 회사는 주로 제작비 천만 달러 이상의 대형 블록버스터에 주로 투자해왔어요.”
“이 회사는 사이즈가 되게 크네. 그런데 아시아 시장에 관심이 있대요?”
“A&P쪽에서 확실히 대답해 줬어요. 작품만 괜찮으면 언제든지 투자할 수 있는 회사라고. 그쪽에서 그렇다니까 아마 확실할 거예요. 그리고 여기 이 회사는 주로 홍콩 영화를 투자해 온 곳이고, 여긴 일본쪽 영화를 좋아해요.”
“다들 캐릭터가 확실하네. 왜 그런 겁니까?”
“투자사 대표의 성향일 수도 있고 여지껏 그런 쪽으로 투자해서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굳어졌을 수도 있어요. 중요한건 일단 아시아 영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거예요. 그리고 일단 투자가 성공하면 미국 전역에 배급을 책임져 줄 투자자이기도 해요.”
동훈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내가 그걸 원했는지 어떻게 알았어요?”
“말했잖아요. 한국에서의 매출은 한계가 있을 것 같다고요. 그럼 세계시장 진출인데 굳이 대표님이 헐리우드 투자자를 원하셨으니까 아마 미국시장을 공략하고 싶다고 생각했죠.”
“맞아요. 그런 생각이었어요.”
“헤헤... 틀렸으면 쪽팔릴 뻔했는데 다행이네요. 어쨌든 각 투자사에 대한 특징은 여기 이 부분에 정리해 놨으니까 보시고 결정하시면 될 것 같아요. 대신 한 가지는 염두해 주셔야 해요.”
“어떤 건데요?”
“얘네들은 빨리빨리에 익숙한 우리랑 달라서 뭐 하나 결정하는데 쉽게 가는 법이 없어요. 단계와 절차도 상당히 복잡하고 계약에 관한 내용도 상당히 철저해요. 제작을 한국에서 한다고 해도 각 스태프는 어디서, 어떤 기준으로 차출할 건지, 각본을 누가 썼는지, 혼자 썼는지, 둘이 썼는지, 둘이 썼다면 각본에 대한 권리는 한쪽이 포기할 건지 등등... 일단 작품에 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거의 회의가 끊이지 않을 거라고 해요.”
“이것도 A&P에서 알려줬어요?”
“네. 거기 우리쪽 담당자가 좀 친절해서 잘 말해주던데요?”
“좋은 담당자를 만났군요.”
동훈은 흡족한 얼굴로 리스트를 쭈욱 훑었다.
분명 여기 중 한 군데와 계약해서 영화를 만들게 될 거라고 생각하니 괜시리 흥분됐다.
유지은 팀장은 동훈의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가 양지원 대표에게 말했다.
“양 대표도 얻는게 있겠죠?”
“하하, 아무래도 약간의 혜택은 있어야 일하는 맛이 있잖아요. 아시아 쪽 배급을 우리가 맡았으면 좋겠어요.”
“와~ 양 대표님 야망 있으시네.”
유지은 팀장이 혀를 내둘렀다.
한국 배급시장을 독점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이제 아시아 시장 배급을 거론할 줄은 몰랐던 거다.
“저희가 다른건 몰라도 인맥 하나는 괜찮거든요. 할어버지가 뿌려놓은 인맥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난 거라서... 하하하! 지금 회사가 살아났다 보니까 그 인맥을 더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일본이나 홍콩, 대만 쪽에서도 통하나요?”
유지은 팀장이 중국을 거론하지 않은건 중국 시장은 그냥 예외이기 때문이다.
거기는 중국 자본이 투자되지 않으면 개봉조차 힘든 곳이기에 아예 논외로 치는 거였다.
“A&P를 거치지 않고 다이렉트로 일본과 대만에 수출이 가능하긴 해요. 홍콩은 A&P와 협의해야 하구요. 의외로 동남아 쪽에서 한국 영화가 잘 먹힌다고 해서 저희가 좀 뚫어보려고 하는 겁니다. 아직 완전히 결정됐다기보다 진출을 노려본다고 하는게 맞아요.”
“와, 그래도 대단한 생각이에요. 난 왠지 양 대표님 잘 되실 것 같아요.”
“하하하! 유 팀장님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까 너무 힘이 되는데요?”
동훈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양 대표를 다시 보았다.
지금까지는 예쁜 얼굴과 딴판인 과하게 털털한 모습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인줄로만 알았는데 이토록 야심이 넘칠 줄이야.
양 대표는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지만 그녀의 눈빛은 생각없이 말을 꺼낸게 아니라는 걸 알게 했다.
*
“컷! 오케이! 수고했어요!”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명진은 컷을 외치고 난 다음 그대로 풀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오늘 마지막 촬영까지 그 빡빡한 일정을 모두 소화한 이 순간,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면서 아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때 누가 불쑥 탄산드링크 하나를 내밀었다.
“고생했어요. 마셔요.”
“고맙습니다.”
명진이 음료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는걸 보던 현주는 명진의 옆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시선을 모니터에 두며 명진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말했다.
“종교가 뭐에요?”
“무교입니다.”
“그럼 누구한테 빌었어요?”
“뭘 빌어요?”
“제발 영화 성공하게 해달라고 빌지 않았어요?”
“...”
“빌었구나. 누구한테 빌었는데요?”
“하나님, 부처님, 알라신 전부요.”
현주는 피식 웃음을 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차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