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지각변동(4)
강남에 집까지 얻어준 윤종빈은 다시 서울로 올라와 소속사와의 문제를 정리하고 정식으로 출연계약을 맺었다.
설마 정말로 연기 초짜와 주연 계약을 맺을지 반신반의했던 윤종빈의 소속사는 희희낙락하며 보도자료를 뿌렸고 인터넷에는 그날 내내 윤종빈의 기사가 오르내렸다.
지금까지 계속해서 홈런을 때려왔던 장동훈 감독의 작품인 만큼 주연이 신인이라는게 큰 불리함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번엔 어떤 신인이 스타로 떠오르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된다는 반응이 훨씬 많았다.
“에스콰이어? 벌써 에스콰이어에서 화보 촬영 의뢰가 들어왔어요?”
동훈은 깜짝 놀라 유 팀장을 올려다보았다.
“기사보고 바로 연락했나 봐요. 주연배우들 섭외해서 화보 촬영하고 뒷이야기들 쓰는게 거기 주 패턴이라 이번 윤종빈 캐스팅이 좋은 기삿거리로 보였을거예요.”
“그렇긴 하겠네. 들뜬 기색은 없어요?”
윤종빈은 향후 촬영 스케줄 때문에 사무실을 다녀갔는데 하필 동훈이 없을 때 와서 만나지는 못했다.
“들뜨기보다는 영 얼떨떨한가 봐요. 자기한테 갑자기 주목하는 미디어가 당황스러운지 저한테 그거 꼭 해야 하는거 아니냐고 물어보던데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일반인이 스타가 되면 대개 두 부류로 나누어지는걸 자주 목격했다.
한 가지 경우는 너무나 달라진 환경에 당황하다가 천천히 적응해가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않는 부류.
다른 하나는 마치 평민에서 귀족으로 계급이 상승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깔보고 무시하는 부류.
적어도 윤종빈은 후자가 되지 않을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사실 성격이야 어떻든 연기자는 연기만 잘하면 되는 거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사고를 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꺼려지는 거다.
사람이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혼자서만 살 수 없기에 결국 계속해서 사람들과 부딪치며 살아가야 하는데 인성이 바르지 못하면 결코 오래가지 못하고 어떤 사고든 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죠? 저도 계속 만나보니까 사람이 진국이더라구요.”
“그건 그렇고 왜 스케줄 소화에 관해서 유 팀장한테 물어본대요? 자기 매니저도 이제 붙었을거 아닙니까. 거기랑 상의해야지.”
“매니저 곧 붙여줄거라고만 들었대요. 그래서 아직 혼자다니고 있어요. 그리고 윤종빈 씨가 그쪽 회사랑은 영 안 맞나봐요. 스케줄에 관해서도 별로 믿음이 없나 본대요?”
“그건 좀 그런데...”
아무리 1년 후에 DH미디어와 계약할거라고는 하지만 너무 붙어 있으면 외부에서 졸게 볼 리 없다.
현재 소속사 뒤통수를 치고 몰래 작당해서 연예인을 빼오려는 모습으로 비춰질게 뻔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애초에 동훈은 윤종빈 소속사 사장을 만나 담판을 지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윤종빈 소속사는 동훈과의 만남을 이리저리 피하며 출연계약을 먼저 맺어버렸다.
이래저래 찝찝한 상황이긴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 변호사가 윤종빈 씨 계약서 검토해봤는데 법적으로 문제될게 전혀 없다고 하잖아요?”
“연예계라는게 법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서로 피해를 보니까요. 뭐, 그래도 이번 경우는 법적으로 문제 없으면 해결되는 문제인 것 같아서 완전 신경쓰는건 아닌데 그냥 마음이 걸려서 그래요. 난 누가 나 때문에 피해보고 이런거 너무 싫거든요.”
“에이~ 그건 너무 나갔다. 솔직히 우리 아니었으면 윤종빈 씨가 영화 주연으로 발탁되기나 했겠어요?”
유지은 팀장은 어림 없다는 듯 말했지만 동훈은 내심 뜨끔했다.
그의 마스크라면 언제 떳어도 떳을 거라는게 동훈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큼... 뭐, 어쨌거나 중간중간에 일 때문에 연락오게 되면 최대한 빨리 끊으시고 우리쪽에서는 되도록 연락을 하지 마세요. 정말 중요한 일일때는 회사 통해서 연락하시고. 우리가 윤종빈 개인 핸드폰으로 연락 계속해서 좋을건 없을거 같아요.”
“듣고 보니 대표님 말씀이 맞겠네요.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을 수 있겠어요.”
“그리고 명진이 촬영은 어느 정도나 진행됐대요?”
“절반 넘었어요. 유명진 감독님도 대표님한테 배워서 그런지 촬영일정은 칼같이 준수해요. 제작비 오버된 것도 없었구요. 오히려 제작비 부족할까봐 쌓아놨던 예비비가 남아서 며칠 전에는 회식도 했어요.”
“기특하네.”
유지은 팀장 앞이라서 말은 기특하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그의 재능에 혀를 내두르고 있었다.
아무리 옆에서 배운다고 할지라도 단번에 따라할 수 있는게 있고 없는게 있다.
자신은 김영웅 감독이 평생 쌓아올린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할 수 있는 연출이었다.
그런데 고작 영화 몇 편 찍는거 조감독으로 도와주며 배웠다고 단번에 한다는 건 정말 그의 재능이 대단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일이다.
“걱정 안 되세요?”
“완성도가 떨어질까봐서요?”
“네.”
“그 정도로 멍청한 놈은 아닙니다. 자기가 생각했던 장면이 안 나올 것 같으면 일정에 무리가 생기더라도 추가 촬영을 했을 거예요. 난 그렇게 믿습니다.”
“휘유~ 믿음이 대단하시네.”
유지은 팀장은 인간적인 신뢰를 바탕으로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하겠지만 사실 동훈은 그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랬다.
“그렇다고 해두죠.”
“그리고 어제 액션스쿨에서 메일 보낸거 보셨어요? 거기서 오늘 아침에 대표님이 확인 안하신거 같다고 체크 좀 부탁했거든요.”
“아, 체크 못 했네요. 지금 볼게요.”
영화를 찍을 때 감독은 대개 액션 장면 하나하나를 자신의 머릿속에 그려넣고 찍지 않는다.
그저 ‘치열하게 싸운다’ 또는 ‘박진감 넘치게 싸운다’, ‘피가 낭자한 혈투를 벌인다’ 등등 이 정도만을 각본에 넣어줄 뿐이다.
그럼 이걸 가지고 무술감독이 지휘하는 액션팀이 상황에 맞게 액션장면을 짜서 감독에게 보여주면 감독이 그걸 보고 그 액션을 넣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거다.
마음에 들면 오케이, 마음에 안 들면 들때까지 계속 ‘다시’를 외친다.
그러다보니 액션 팀은 처음 임무를 받아 들 때 막막할 수밖에 없다.
감독이 대략적인 콘티를 짜줄 수 있다면 베스트겠지만 그렇게 친절한 감독은 대한민국에 거의 없다시피하기에 그들은 항상 창작하는 마음으로 액션을 만들어낸다.
“음...”
동훈은 저들이 찍은 액션 장면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다른 감독들처럼 아무것도 없이 그저 실감나게 싸우는 것만 바란 것도 아니었고 어떤 형식으로 어떻게 싸울지 미리 무술감독과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액션이 너무 평범했다.
딱 악질형사에 나온 그저 통쾌한 액션 정도?
원작의 그 압도적이고 살벌한 맛이 없는 밋밋한 맛이었다.
“저 잠시 다녀올게요.”
“어디 가시게요?”
“액션스쿨에 좀 다녀오려구요. 저 찾으면 그냥 제 핸드폰으로 연락 달라고 하세요. 물론 제 연락처를 아는 사람들만.”
“그럴게요. 조심히 다녀오세요.”
직원들의 마중을 받고 나온 동훈은 곧장 액션스쿨로 향했다.
뭔지 모르게 대충하는 듯한 액션이 계속 마음에 걸려 단순히 전화로는 이야기 진전이 안 될 것 같아 직접 나섰지만 무술을 잘하는 것도 아니니 막상 가서도 마음먹은대로 될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30여분쯤 운전해서 도착하니 밖에서도 기합소리와 고함소리가 흘러 나왔다.
“안녕하세요.”
철문을 열고 보이는 큰 실내체육관에는 수십여 명의 사람들이 각자 자신만의 운동을 하고 있었다.
누구는 기초체력 단련을, 누구는 봉을 들고 화려한 동작을 뽐내고 있었는데 동훈을 그들을 모두 지나쳐 예전에 봤었던 사람에게 다가갔다.
“어? 감독님?”
“안녕하세요. 노민정 씨. 반갑습니다.”
이곳 액션스쿨의 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은 차지훈이라는 50대 남자이지만 눈앞에 있는 30대 여성은 액션스쿨의 실질적인 관리자라고 할 수 있는 팀장을 맡고 있었다.
“아니, 감독님이 어떻게 말씀도 없이 여기까지 오셨어요? 제가 눈이 나빠서 멀리서 보면서도 ‘설마 장동훈 감독님인가?’ 싶었다니까요.”
“하하, 그랬나요?”
“그런데 대표님 지금 안 계세요. 외부 출장 나가셨거든요.”
“아, 그러세요?”
동훈이 곤란한 표정을 짓자 노민정 팀장이 물었다.
“혹시 어떤 일 때문에 그러세요? 어제 보내드렸던 콘티가 마음에 안 드셔서 그러세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그녀의 눈빛을 보니 어째 그녀 스스로도 마음에 걸렸나보다.
“어... 제가 어지간해서는 그냥 전화로 말씀드리는데 보니까 전화로 말씀드리면 또 원하는 장면이 안 나올거 같아서요.”
“그러셨구나. 잠시만요! 야! 박광수랑 엄보현 앞으로 나오고 나머지 쉬어!”
방금 전까진 굉장히 여성스럽게 맞아주었다면 팀원들을 지휘할 땐 사람이 달라진 것처럼 절도감과 포스를 내뿜었다.
팀원들은 운동하다 말고 우르르 강당 한쪽 벽으로 붙어 질서있게 앉았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평소 저들에게 가해지는 빡센 교육과 갈굼(?)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어제 감독님한테 보여드렸던 액션 다시 해본다. 감독님께서 마음에 안 드셨다고 하니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우리의 책임이다. 눈앞에서 보여드리는 거니까 다시 재대로 해볼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둘은 긴장된 표정으로 서로를 노려보더니 곧바로 액션을 시작했다.
확실히 감독이 직접 와서 확인한다고 하니까 더 긴장해서 그런지 동영상으로 볼때보다는 더 박진감이 있어 보이긴 했다.
다만 그뿐이었다.
관객들이 흔히 보아왔던 짜여진 액션.
사실 관객들도 액션을 보면서 그게 가짜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프로레스링을 보면서도 다 가짜라서 안 본다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사람들은 알면서도 본다.
중요한건 알면서도 보게끔 얼마나 실감나게 연출하느냐다.
“왜요? 마음에 안 드세요?”
노민정 팀장이 슬금 눈치를 보며 물었다.
“저기... 똑같은 말을 또 하게 되는데, 제가 어지간해서는 다른 외국영화랑 잘 비교를 안 하거든요. 환경도 다르고 시스템도 다르고 하니까. 근데 딱 하나만 제가 꼭 염두해 달라고 했잖아요? 진짜 실감나게 싸우는거 같은거. 근데 지금 딱 느낌이 악질형사에서 나온 그 액션 그대로에요. 차이를 모르겠어요.”
“그럼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어떤 영화를 보면 저희가 참고할 수 있을까요?”
“본 시리즈요.”
“아...”
그녀는 알겠다는 듯 입을 벌리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도 헐리우드 영화 본 시리즈는 한국영화에 굉장히 큰 영향을 주었다.
기존에 있던 짜여지고 장난같던 액션이 본 시리즈 이후에는 훨씬 더 실감나고 현실감있게 바뀌기 시작한거다.
동훈이 연출하려고 하는 ‘동네 아저씨’ 역시 본 시리즈가 아니었다면 그런 액션은 탄생하지 못했을게 분명했다.
문제는 이곳은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처럼 빠르게 액션환경이 변화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이유야 말하면 입아플 지경.
“가능할까요?”
‘가능할까요’라고 물었지만 형식이 질문일뿐 가능하게 해달라는 말이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다시 짜보겠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고민의 과정을 거쳐야 할 것 같거든요.”
“어느 정도나 걸릴까요? 조연급 배우 오디션 일정도 나온 상황이라 저희가 너무 오래 걸리면 스케줄을 다시 잡아야 할 것 같은데.”
“일단 1주일만 기다려주세요. 안 되면 그 전에 연락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다음에는 꼭 좋은 장면으로 부탁드릴게요.”
“넵! 염려 들어매십쇼!”
그녀는 작은 주먹을 불끈 들어 올리며 파이팅을 해 보였지만 막상 주변 팀원들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