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88화 (88/116)

# 88

지각변동(3)

“그럼 바로 계약하는 거야? 언제 시작할 수 있고?”

영원히 만들어 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시나리오가 제작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자 박 감독은 벌써부터 흥분한 기색이다.

“이건 바로 준비에 들어갈 수 없어요. 말했다시피 너무 많은 제작비가 들어가고 무엇보다 야구 시즌 중에 촬영할지, 아니면 시즌이 끝나고 배우들만 가지고 할지, 모든게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 들어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그건 알지. 나도 재촉하는건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사람이라는게 말이야. 목표가 없고 일정이 없으니까 그냥 나태해져. 아무것도 하기가 싫고 의욕도 안 생기더라고.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대략적인 시기를 알면 나도 계획을 세울수 있잖아.”

“음...”

생각해보니 작품 계약만 맺어버리면 촬영이 시작되기까지 박광효 감독은 또다시 일 없는 백수 신세가 된다.

물론 계약을 맺음과 동시에 계약금을 받게 되겠지만 모든 금액을 다 받게 되는 것도 아니고 계약 후 2주 안에 계약금의 30%정도 밖에 받지 못한다.

DH미디어가 다른 제작사들보다 계약금을 덜 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계약금까지 훨씬 많이 줄 생각은 없었다.

러닝게런티를 다른 제작사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계약금의 30%를 받아 촬영이 시작될때까지 그 돈만 가지고 생활하라는건 가혹할 수 있었다.

양호민 감독이야 계약서를 작성하고 바로 프리 프로덕션을 들어갔기에 중도금을 받아 생활에 무리가 없었을테지만 박광효 감독은 기약 없이 기다리기만 해야 했으니 말이다.

“왜? 영~ 한정 없어?”

“그럼 이렇게 하시죠.”

“어떻게?”

“감독님도 계약금 일부를 받아서 언제가 될지 모르는 기다림 동안 생활비도 없이 살기는 어렵잖습니까.”

“아휴, 그렇지. 이 나이에 아버지한테 용돈 받아가며 살아가는데 이건 살아도 사는게 아니야.”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회사랑 전속계약을 맺는건 어때요?”

“내가? 아니, 감독도 전속 계약이 있어?”

“원래 그런게 없었는데 감독님하고 대화하다보니까 이런 경우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사실 우리가 작품을 하고 있지 않으면 백수나 다름없잖아요.”

“그렇지. 작품도 1년마다 꼬박꼬박 한 편씩 찍는 감독이 대한민국에 세 손가락이나 꼽을까? 다들 기간이 짧으면 2년에 한 번, 3년에 한 번 찍으니까 반 백수라고 봐야지.”

“그렇게 띄엄띄엄 돈을 벌어오니까 생활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면 작품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저야 총각이니까 일하다 집에 늦게 들어가도 뭐라 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 학자금으로 매달 돈이 나가야 하는 것도 아닌데 다른 감독들은 그게 아니잖아요.”

“맞지, 맞지.”

“만약 우리랑 전속 계약을 맺고 우리가 월급처럼 매달 150만원에서 200만원 정도를 드리면서 작품 활동에 매진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떨거 같아요?”

박 감독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며 되물었다.

“그게 가능해? 그거 완전히 돈 받으면서 놀고 먹으려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럴수도 있지만, 만약 놀고 즐기다가 새로운 구상이 떠오르면 더 좋은 작품이 나올수도 있지 않겠어요? 그 왜... 어디야? 외국 기업에서도 회사에 게임도 가져다 놓고, 운동도 하게끔 하면서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창의력을 극대화 시킨다잖아요.”

“그건 뉴스에서 본 거 같지만 사람 마음이라는게... 일단 나는 엄청나게 좋지.”

“그럼 그렇게 하실래요?”

박 감독은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 난 정말 열심히 할 수 있어.”

“그럼 저희가 연락 드릴테니까 그때 다시 오세요. 그 전까지 계약서 만들어놔야 하니까.”

전에 없던 새로운 계약서를 몇 시간 앉아서 뚝딱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표준계약서가 아닌 이상 변호사에게 의뢰해서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내용을 확인받아야 나중에 일이 터져도 문제가 없다.

“그래. 빨리 연락 줘.”

“네. 최대한 빨리 해서 연락 드릴게요.”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해도 죄지은 사람 마냥 쭈뼛거리고 눈치를 보던 그였는데 나갈때는 오래된 친구를 만나고 가는 것처럼 활기가 넘쳐 보였다.

“왜 온 거래요? 영화 만들어 달래요?”

박 감독이 가자 유지은 팀장이 와서 물었다.

“그런 거죠. 그런데 생각보다 시나리오가 괜찮아서 한번 손대볼까 하는데 제작비가 상당할 것 같아요.”

“어느 정도나 나올 것 같은데요?”

“최소 150억?”

“헐... 무슨 영화길래 제작비가 150억이 넘어요?”

“야구 영화에요.”

“야구요? 어...”

유지은 팀장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그녀라고 왜 모르겠는가?

수많은 영화를 제작해왔기에 일단 소재를 들으면 어떻게 제작해야 할지 머릿속에 그것부터 그리는 사람이라 야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암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거다.

“어려울 것 같죠?”

“네...”

“하하, 저도 그래요.”

“시나리오가 많이 재밌었나봐요?”

“구성이 재밌어요. 복잡하지도 않고, 이상한데로 빠지지도 않고. 문제는 시나리오를 각본으로 잘 구성할 수 있냐는 것과 그걸 카메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이냐는 것.”

“솔직히 전 박광효 감독 믿음이 안 가는데요. 필모를 다시 한번 쭉 살펴봤는데 제가 알고 있던 영화들 외에 다른 작품을 더 찍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그녀의 말은 곧 기존의 영화들로 평가하자면 좋은 점수를 줄 수 없는 감독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조건을 걸었어요. 각본부터 연출까지 전부 저와 같이 하기로.”

“어? 그럼 공동연출 하시는 거예요?”

“네. 일단 그렇게만 얘기했구요. 정확한 제작 시기는 시간을 두고 보자고 했어요.”

“잘하셨어요. 아직 감독님 영화도 이제 프리 프로덕션 중인데 다른 영화까지 급하게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기도 하고 준비할 것도 많은 작품이라... 아, 그리고 계약서 하나만 만들어주세요.”

“무슨 계약서요?”

“박광효 감독이랑 전속 계약을 맺을 생각이에요.”

“감독이랑요? 아니 무슨 배우도 아니고...”

“그리고 명진이랑 양호민 감독님하고도 전속 계약을 맺으려고 해요.”

사실 명진이나 양호민 감독은 거의 전속 계약된거나 마찬가지인 상태다.

명진이가 지금 하고 있는 작품을 끝낸다고 다른 제작사와 작품을 할 것 같지도 않고, 그건 양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굳이 돈을 줘가면서까지 전속 계약을 맺으려고 하는건 일종의 룰을 만드는 것과 같았다.

이런 식으로 감독을 관리하고 지원하면서 더 좋은 작품이 나오게 되는 선순환 구조를 정착시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럼 계속 월급을 주는 거겠네요?”

“네. 아무래도 감독의 명성이나 흥행실적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평균적으로는 대략 연봉 3천 정도 생각하고 있어요.”

“너무 많은데... 전속 계약한 감독이 한 두명이면 문제 없겠지만 열명 이상 늘어나면 매해 인건비만 해도 엄청날 거예요. 더군다나 양호민 감독님 같은 경우는 최소 연봉 5천 이상은 생각하고 계시겠네요?”

“아무래도 그렇겠죠?”

“어...”

유지은 팀장이 우는 표정을 지었지만 동훈은 씨익 웃으며 그녀를 달랬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솔직히 양호민 감독이 이번 영화로 우리한테 벌어준 돈이 얼마에요? 난 연봉 1억도 안 아까운데?”

“영화라는게 언제고 성공만 할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반대로 실패할때는 누구도 책임져주지 않잖아요. 그걸 만든 감독들도요.”

“그 실패를 또 다른 감독이 더 좋은 작품으로 메꿔줄 겁니다.”

동훈은 그것이 너무 꿈같은 이야기라고만은 생각하지 않았다.

*

며칠 후, DH미디어는 몇 건의 계약을 체결했다.

아직 미성년자인 이강호와 전속계약을 체결하며 더이상 그의 어머니가 말썽을 부릴 수 있는 여지를 없앴고 양호민, 유명진, 그리고 박광효 감독과 전속계약을 맺어 앞으로 5년 동안 모든 작품을 전부 DH미디어에서만 만들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사항을 보도자료를 통해 기사로 배포됐다.

일반인들은 이 기사를 보고 대수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저 ‘DH미디어가 또 새로운 시도를 하려나보다’ 하는 정도?

반대로 업계에는 아닌 밤중에 날벼락을 맞은 것처럼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공룡이 되려는 DH미디어. 과연 옳은 일인가?]

[장동훈 감독, 너무 큰 욕심이 화를 부를 수 있음을 알아야...]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부정적인 기사들은 모두 대형 제작사에서 올린 것이라고 짐작하게 했다.

그리고 LS엔터테인먼트 대표실에는 실제 DH미디어 발 폭탄 때문에 여러 명의 간부가 긴장된 얼굴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요즘 내가 이 새끼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해. 어디 말 좀 해봐. 이거 두고 볼 거야?”

최호성 대표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쥐고 물었다.

그러자 가장 가까이에 앉아 있던 장길수 이사가 대답했다.

“오래 갈 수는 없을 겁니다. 알아보니 양호민 감독에게는 연봉 7천으로 계약했다고 하던데 그거 몇 년 못 갈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양호민 감독이 이번 한강의 괴물을 만들기 전에 만들었던 영화가 공포영화인 ‘검은 시선’이라는 작품인데 이게 4년 전 작품입니다. 그리고 그 전 작품은 그로부터 3년 전 작품이구요. 그런데 이런 양호민 감독 조차도 영화 만드는 텀이 굉장히 짧은 편입니다. 실제 이번에 계약한 박광효 감독의 전작은 무려 6년도 더 됐습니다. 공짜로 월급을 주는 것도 한 두달 아니겠습니까?”

“그냥 두고는 못 볼거다?”

“사람이 아무리 마음이 좋아도 내 지갑에서 돈 나가는데 그걸 받아먹는 인간이 탱자탱자 놀고 있으면 속 안 뒤집어질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거 말 되네. 그런데 장동훈이가 그걸 모르고 저 짓을 벌였을까?”

“알고는 있어도 상황을 너무 낙관적으로만 보고 있지 않았을까요?”

최호성 대표는 고개를 흔들었다.

“부족해. 장 이사의 말이 틀린 건 아닌데 그것도 어떻게 보면 상황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거야. 어쨌든 양호민 감독이 이번에 천만 찍었잖아. 그럼 제작사에 갖다준 돈만 내가 알기로 2백억이 넘는다고. 앞으로 VOD수입에 해외판권 추가 매출까지 합하면 얼마가 더 들어올지 알 수 없거든. 그것만 해도 양호민 감독 5년치 연봉을 확보한 셈일 거야. 그렇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거기까지는 그렇다고 쳐. 만약에... 저 중에서 하나 또 터지면?”

“...”

이번에는 장 이사도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졸라 재수없는 상상인거 나도 아는데, 하나 더 터지면 어떻게 될 거 같아? 응?”

“아마 대한민국 감독이란 감독들은 죄다 DH미디어로 달려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지? 내가 감독이라도 LS엔터 거들떠 보지도 않아. 솔직히 우리가 감독한테 뭘 줬어? 저 미친놈이 월급까지 퍼주는건 논외로 치고 러닝게런티도 거의 안 줬잖아. 계약금을 더 많이 준 것도 아니야. 그럼 우리가 DH미디어에 비해 무슨 메리트가 있어? 말해봐.”

“없습니다.”

“그럼 어떡해? 제작에서 손 뗄까?”

당연히 그럴수는 없다는거 이 자리에 있는 임원 전부 알고 있었다.

단순히 제작으로 돈을 버는 것 뿐만 아니라 제작을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얻어지는 인맥과 영향력으로 연예계 전반에 상당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음을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최호성 대표는 외통수에 걸렸음을 직감했다.

“하... 양지원이가 엎어치고 장동훈이가 메치네. 다들 가. 가서 우리도 장동훈이네처럼 전속계약을 맺든, 아니면 장동훈이를 잡아 족치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와. 너희나 나나 다들 월급쟁인거 알지? 월급받는 만큼 일 못하면 다 모가지 날라가는거야. 알겠어? 얼른 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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