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지각변동(2)
“도대체 요즘 부동산을 몇 개를 보러다니는지 모르겠어요.”
유지은 팀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얼마 전에 새로 옮길 사무실을 알아본다고 발 아프게 돌아다녔는데 오늘은 원룸을 알아보고 다녔으니 그녀가 투덜거릴만 했다.
“고생 많네요. 괜찮은 방은 있었어요?”
원래 아래 직원들을 보내려고 했는데 유 팀장이 방 몇 번 구해본적 없는 처녀 총각이 무슨 집을 잘 구하겠냐며 자신이 직접 나섰었다.
“강남에 3개월 단위 풀옵션 위주로 봤어요. 그래도 배우인데 코딱지만한 월세 백만 원짜리 구해줄 순 없어서 보증금 130에 월세 130짜리 레지던스로 정했는데 한번 봐주세요.”
유 팀장이 핸드폰으로 찍어온 동영상과 사진을 보여주었다.
강남의 부동산 시세는 다른 직역과 그 궤를 달리한다.
코딱지만한 5평짜리 풀옵션 원룸도 80만 원을 넘는게 보통이며 조금 살만하다 싶은 것들은 죄다 100만 원이 넘었다.
그래도 한가지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건 단기 풀옵션은 보증금이 월세와 같아 입주 초기 자금이 많이 안 든다는 거였다.
“음... 좋네.”
“네. 원룸 원거실에 건물 자체가 새로 올라간 건물이라 굉장히 깔끔해요. 옵션도 다 새거고. 그리고 주차장도 넓어서 나중에 데리러 가기에도 좋구요. 나중에 원하면 레지던스랑 직접 1년 연장 장기 계약으로 전환할 수도 있대요.”
“좋네. 잘 구했네요.”
“논현동에 있는 연기학원에 가려면 버스나 택시를 타야 하긴 하는데 노선도를 보니까 복잡하지도 않고 다 좋아요. 그런데...”
“네? 왜요?”
“진짜 1년 뒤에 우리와 전속 계약을 해줄까요? 사람 마음이 언제 바뀔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다 대주면...”
그녀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건 아니었다.
아직 전속계약도 맺지 않은 상태에서 집을 구해준 것만해도 대단한 일인데 앞으로 월세에 학원 수강료, 액션스쿨 강습비, 거기에 쉴 때는 명진이 연출하는 ‘건축학 원론’ 현장에 가서 촬영현장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건 배려를 넘어선 파격적인 혜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사람 잘못 본 셈 쳐야죠. 비용이 좀 나가는게 아깝긴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가 휘청일 정도까진 아니잖아요. 미래를 위해선 이 정도는 투자한다는 셈 칩시다.”
“대박날지 쪽발날지 모르는 투자자의 마음이라는 거죠?”
“그렇죠.”
“음... 그러니까 좀 마음이 편해지네요. 솔직히 방 보면서 이 정도까지 해야 하나 생각했었거든요.”
“누가 알아요? 윤종빈이가 한류스타가 될지?”
“와, 그렇게만 된다면 이 정도 일은 일도 아니겠네요. 한류스타가 되면 돈이 얼마야.”
“어마어마 할 겁니다.”
그렇게만 돼 준다면 더는 바랄게 없으리라.
이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아주 천천히 모습을 내밀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동훈이 누군가 해서 고개를 내밀어보니 어딘가 얼굴이 익숙한 남자였다.
넘어지면 떼구르르 굴러갈 듯 퉁퉁한 덩치에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정돈되지 않은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그 남자는 쭈뼛거리며 동훈에게 다가왔다.
“저기...”
“어떻게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영화감독 박광효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어디선가 봤다 했었는데 이제야 기억났다.
유병세 감독과 어울려 다니던 그의 모습이 왜 기억나지 않았을까 속으로 자책했다.
“반갑습니다. 허허...”
쑥스럽게 인사하는 그에게 일단 자리를 권했다.
“저보다 선배님이신데 말씀 편하게 아세요. 그리고 일단 이쪽으로...”
그를 데리고 회의실로 들어오자 직원이 간단히 마실 음료수와 과자를 놓고 나갔다.
박광효 감독은 쑥쓰러운 얼굴로 과자 하나를 살포시 집고는 말했다.
“우리 개인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죠?”
“네. 그때 유병세 감독하고 몇 번 뵀었죠. 그때보다 살이 더 빠지신 것 같아요.”
“아유 아닙니다. 더 쪘어요. 하하하!”
“그런데 여기는 어떻게...”
그는 씨익 웃으며 집어든 과자를 입에 물고는 허름한 천 가방에서 종이 뭉치를 주섬주섬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여기까지 진행되는 상황만 보더라도 왜 여기에 왔는지 짐작이 갔다.
양호민 감독이 한강의 괴물로 대박을 터뜨리면서 눈앞의 박광효 감독을 제외하고도 이미 여러명의 감독들이 자신의 작품을 만들어 줄 수 있겠냐고 문의를 해왔었다.
당연하게도 된다, 안 된다를 결론내주기 보단 일단 시니리오나 트리트먼트를 회사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는데 일부는 보내주었으며 일부는 보내주지 않았다.
보내준 일부는 대부분 동훈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던, 그리고 경력이 일천한 감독이 대부분이었다.
반대로 보내주지 않은 감독들은 동훈보다 경력도 많고 몇 번 이야기를 나누며 제법 선배대접을 받은(?) 이들이었다.
양호민 감독은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고 작품에 올인했지만 다른 감독들은 차마 자신의 자존심을 내려놓지 못한 거였다.
어쨌거나 박광효 감독도 따지고 보면 동훈의 선배나 다름없었는데 전화로 연락 온 것도 아니고 이렇게 직접 찾아왔으니 동훈으로썬 조금 놀랍기도 하고 ‘작품이 안 좋으면 어쩌지’하는 걱정도 들었다.
“내가 몇 개 끄적인 것들인데 아직 밖에 내놓은건 아니에요.”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불편하니까.”
“그, 그럼 그럴까?”
“네.”
“몇 년 전부터 새 작품을 하려고 계속 준비중이었는데 잘 안 됐어. 그러다가 계속 이렇게 놀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예전에 까인 것들이 그냥 버리긴 아까워서 손을 다시 대긴 했는데... 어쨌든 다른 곳에는 보여준 적은 없는 작품이야. 손을 좀 많이 대서 예전 작품하고는 완전히 다르기도 하고.”
“그럼 제가 처음 보는 거겠네요?”
“그렇지. 나도 염치가 있어서 무작정 만들어달라고 조르러 온 건 아니고 장 감독이 한번 보고 괜찮다 싶으면... 어떻게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알겠어요. 한 번 볼게요.”
보통 이렇게 하면 자리에서 일어나 언제 연락 달라고 하며 헤어지는데 박광효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동훈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서 읽어보라는 거였다.
후배도 아니고 선배가 직접 찾아와서 보라는데 이 상황에 ‘나중에 읽어볼게요’하고 보내면 그건 ‘네가 간 다음에 이 쓰레기를 치워버리겠다’는 뜻으로 읽혀질게 뻔했다.
마침 급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이 자리에서 프린트를 한 것도 아닌 손으로 쓴 시나리오를 읽기 시작했다.
저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글씨체는 여고생처럼 단아했기에 읽기는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음...”
내용이 특이하게 한국에 거의 없다시피한 야구를 주제로 한 것이었다.
기존에 야구에 관한 영화는 야구를 바탕으로 한 로맨스 같은 것들인데 이건 순수하게 성공한 야구 선수가 되는 영화였다.
읽으면서 계속 ‘이거 만들기 어려울텐데...’라는 생각이 끊이질 않았지만 이상하게 계속 읽게 만들었다.
자신의 재능을 모르고 살아오던 주인공이 어쩌다 우연히 직장인 야구를 통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프로야구 선수가 되는 내용인데 뻔하긴 하지만 그 과정을 굉장히 재밌게 풀어낸 것이 인상 깊었다.
“왜? 이상해?”
“이상하진 않아요. 굉장히 재밌는데요?”
다 읽고 난 감상은 정말 순수하게 재미있다는 것.
야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도 전혀 무리가 없었고 야구를 아는 사람이면 더욱 몰입감 있게 볼 수 있는 내용이었다.
시나리오 자체만 보면 굉장히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정말?”
“네. 선배님 앞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시나리오는 참 재미있어요.”
박광효 감독은 동훈의 어감에서 문제를 발견했다.
“시나리오는 재미있는데 만들기 어려울 것 같다는 말이지?”
“맞아요.”
일단 스포츠를 바탕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거대한 구장과 관중을 깔고 들어가야 한다.
일단 야구장을 빌려야 하는건 당연지사.
그 큰 구장에서 어떻게 촬영할지 동훈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관중 문제는 또 어떤가?
이게 없으면 현실감을 줄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관중을 동원하든 실제 경기하는 날 촬영하든 CG로 만들어내든 해야 하는데 셋 다 금액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제작비가 엄청나다는 것은 같았다.
문제는 또 있다.
실제 야구 선수를 섭외한다고 했을땐 연기력이 많이 부족해 관객의 몰입도를 떨어뜨리고 반대로 배우가 선수 역할을 하면 실력이 떨어져 보인다.
이걸 커버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연출자의 몫.
어쨌든 이러거나 저러거나 완성도에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는건 당연했다.
“사실 이걸 손대기 전에도 소재는 야구여서 똑같은 소리를 듣긴 했어. 내용은 재밌는데 만들 엄두가 안 난다고 하더라고.”
야구든 축구든 매력적인 소재가 분명하니 다른 감독들도 몇 번 시도는 했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한 역사는 거의 없었다.
심지어 김영웅 감독이 있었던 곳에서도 말이다.
“저도 이걸 보면서 어떻게 해야 될지 감이 잘 안 잡혀요.”
“그런데 놓치기엔 아깝지 않아? 헐리우드는 메이저리그를 소재로 진짜 재밌는 영화를 몇 개나 만들어냈잖아. 야구만 만든 것도 아니고 농구, 미식축구, 골프... 그런데 우린 스포츠 영화가 거의 없으니까. 한번 시도는 하고 싶어서.”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욕심이 나긴 했다.
지금껏 다들 어려워서 포기만 하고 있던 그런 장르를 처음으로 성공시킨다면 충무로는 또 하나의 장르를 탄생시킬 수 있었다.
“그렇기는 한데... 이거 제대로 만들려면 제작비 최소 150억은 들어야 해요.”
백오십억이라는 말에 박광효 감독이 찔끔하며 움츠러든다.
“그렇겠지?”
“만약 하게 되면 그냥은 안 됩니다.”
“아유, 난 이거 만들 수만 있으면 원하는거 다 해줄수 있어. 뭘 원해?”
박 감독은 눈을 크게 뜨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처음으로 긍정적인 답변을 들었기에 무척 흥분한 모양새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전 감독님 연출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요.”
“그, 그래?”
너무 직설적인 말이라서 그런지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후배에게서 어디 이런 말을 들어봤겠는가?
하지만 동훈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일, 이십억도 큰돈인데 무려 150억이 넘는 거대 자금이 투입되야 하는 작품이다.
상대방 기 살려준다고 그 큰돈을 무작정 던져볼 수는 없는 일이다.
“각본부터 콘티, 구도, 배우와 카메라 동선까지 모두 저와 같이 짜는 조건이면 이 작품 우리가 손 대 볼게요. 어때요?”
동훈의 제안은 이 작품을 공동 연출하자는 말이나 진배없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감독에게서 나온 시나리오는 자식과도 같은데 그걸 공동으로 제작하자고 하는건 자식을 공동 육아하자는 말과 다를바 없었다.
고민이 안 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역시나 박광효 감독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끙끙거리며 홀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붉게 충혈된 눈으로 시나리오를 뚫어지게 바라보기를 5분여가 흘렀을 때 마침내 결심했는지 입을 열었다.
“좋아. 그렇게 하자.”
“섭섭해하지 마세요. 만약 이게 잘 되면 다음 작품은 오로지 감독님이 홀로 연출하게 해드릴 테니까.”
“정말... 성공할 수 있겠지?”
이 작품을 만든다면 처음으로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의 영화를 그대로 따라 찍는게 아닌 새로운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셈이었다.
물론 박광효 감독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만들어내는 거지만 그래도 이건 성공사례 없이 그저 자신의 실력으로 완성도를 올려야 했다.
그것도 최소 150억짜리를 말이다.
동훈은 처음으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짜릿하게 전류가 흐르듯 몸이 떨림고 있음을 느꼈다.
어쩌면 이 작품이 진정 자신의 첫 시험대이기 때문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