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86화 (86/116)

# 86

지각변동(1)

최 대표의 얼굴이 굳어졌다.

“양지원 양이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양지원 양이 아니라 대표라고 불러주세요.”

“아, 미안해요. 양 대표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라고 하기에는 정황증거들이 확실하지 않나요? 내가 그때 회사에 없었다고 어린애 취급하시면 많이 섭섭하죠. 여기 딱 그 증인이 될 분도 계시잖아요.”

양지원의 말에 장길수 이사가 최 대표의 얼굴을 보고 당황했다.

“아, 아니 내가 무슨 증거라고 합니까.”

“괜찮아요. 아무 말씀 안 하셔도... 그런데 최호성 대표님, 이익을 위해서는 눈 딱 감독 제안을 하는건 좋은데 그래도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대표님네랑 SHOW랑 같이 우리를 빤스 벗겨서 내쫓을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우리가 남이가’ 하는 건 너무 뻔뻔스럽지 않아요?”

“...”

최 대표는 양지원 대표의 거친 언사에 인상을 찌푸릴 뿐 대꾸를 하지 않았다.

“이 악물고 달려들 테니까 그쪽도 준비 단단히 하시는게 좋을 거예요.”

지원은 싱긋 미소를 짓더니 휙 몸을 돌렸다.

그리고 언제 찬바람이 쌩쌩 불었냐는 듯 다른 제작사 관계자들을 찾아가 연신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다녔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최호성 대표는 어색해하는 장길수 이사 곁을 떠나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 뒤 부동자세로 서 있는 홍한규 실장을 향해 말했다.

“저 미친년이 지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네? 대표님한테요? 설마 지난일은 다 잊고 해피하게 살자는 건 아니겠고, 검찰에 옛 일을 찌른다고 했습니까?”

“그건 미쳤다기 보다는 모자라다고 봐야지. 증거도 없이 뭘 찔러? 그리고 쟤 모자란 애 아니야.”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만.”

“나랑 한판 붙어보겠다는데?”

홍한규 실장은 눈을 땡글 돌리며 연방 미소를 짓고 있는 양지원 대표를 바라보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진짜 미쳤는데요?”

“그러게, 면전에서 대놓고 경고하는데 장길수 이사 앞에서 쪽팔려 혼났다.”

“장 이사가 입이 가벼운 사람은 아닌데, 혹시 모르니 조치할까요?”

“됐어. 그 사람도 지금 당황해서 얼굴 벌게진거 봐. 새파랗게 어린년이 이 바닥 뒤집을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다.”

“원래 나이가 들면 걱정이 많아 진다고 하지 않습니까.”

최 대표는 홍 실장에게 고개를 돌렸다.

“너 지금 나이 어리다고 자랑하는 거냐? 걱정 없어서 좋겠다?”

“큼... 죄송합니다.”

“일단 저 미친년이 가진 무기를 좀 알아봐.”

“A&P 말씀하시는거죠?”

“어. 그걸 뺏으면 DH미디어가 저년 바짓가랑이만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지 않겠어?”

“그렇긴 합니다.”

“어디 지 숟가락 뺏긴 다음에도 떼쓸 수 있는지 한 번 보자고.”

*

띵똥!

유지은 팀장이 연기학원에 연락해서 알아냈다고 하니 이 주소는 틀리지 않을거라 생각했지만 ‘여기가 맞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농장을 운영한다고 들었는데 집은 대전에서도 상당히 깨끗한 아파트였기 때문이다.

“누구세요?”

귀찮은 목소리로 문을 연 이는 윤종빈이었다.

방금까지 자다 일어났는지 머리는 엉망에 땀냄새가 훅 끼쳤지만 그래도 저 잘생김을 어찌할 수는 없었다.

“계셨네요?”

“어? 감독님...”

“왜 연락 안 받아요?”

“아... 전화를 꺼놓고 있어서... 일단 씻고 나올게요. 들어오세요.”

집에 들어서니 인테리어나 가구가 무척 고풍스러웠다.

동훈은 윤종빈이 따라준 물을 마시며 그가 씻고 나올 때까지 거실에 앉아 기다렸다.

10여분 뒤 씻고 집에서 입는 편한 티셔츠 차림으로 나온 그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원래 이러지는 않는데 죄송합니다. 저희 아버지가 화가 무척 나셔서,,,”

“아버지가 화가 나셨다구요?”

“네. 일단 아버지는 제가 서울에 가는걸 원치 않으셔가지고... 제가 주연으로 영화 찍는다는 것도 안 믿으셨어요.”

“그걸 왜 안 믿으셨지? 저랑 한다고 말 하셨어요?”

이런말하기 민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이제는 속칭 전국구로 통하는 몸이 아니던가?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핫 한 영화감독이 장동훈이니 만큼 자신의 이름이라면 분명 어느 정도는 먹힐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네. 그래도 안 믿으셨어요. 아버지는 제 얼굴 가지고 무슨 영화배우냐고 생각하셔서...”

“아니, 이 얼굴이면 대한민국을 씹어먹는 얼굴인데...”

하긴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도 그의 아버지는 그가 영화배우감이 아니라고 했었다는게 기억나긴 했다.

그래도 그건 조금 부풀려서 한 이야기가 아닌가 했는데 그게 실제였다니...

“더군다나 이번에 집 보증금이랑 연기학원 교습비, 그리고 액션영화 강습비까지 해서 수천만 원이 깨지게 생겼으니까 아버지가 완전히 사기꾼들이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 중간에 올라오셔서 제 핸드폰 가져가시곤 소속사한테 욕 한바가지 하시고 내려왔습니다.”

“아... 그렇게 된 거구나.”

왜 연락을 안 받나 했는데 그렇게 된 거였다.

그런데 그 소속사도 정말 이해가 되질 않았다.

원래 그렇게 하는건지, 아니면 아직 주연배우급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런건지, 집 보증금은 몰라도 연기학원 강습료는 대줄법 한데 그걸 거부했다니...

그냥 그런건 아닐테고 무슨 사정이 있겠지만 일단 이유를 정확히 알았으니 문제가 해결될 실마리가 보였다.

“혹시 회사랑 계약 기간이 어떻게 돼요?”

“단역으로 계약한거라 1년짜리 단기 계약이에요. 계약금을 받은 것도 아니었구요.”

할렐루야!

“그럼 이렇게 합시다. 우리가 보증금이랑 연기학원 강습비, 그리고 액션스쿨 강습비까지 보탤게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우리랑 전속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지금 전속계약을 맺을 수는 없으니까 지금 회사랑 계약이 끝나고 바로 우리랑 맺는 걸로 합시다. 그럼 괜찮겠어요?”

“어? 정말 그렇게 해도 되는 건가요?”

“네. 법적인 문제는 우리가 해결할 거고 당장 연기를 못하게 생겼으니 이렇게라도 해야죠.”

“그럼 영화 출연료 수수료는 전부 우리 회사로 들어갈텐데 안 아까우시겠어요?”

“그거야 뭐...”

윤종빈의 가치를 생각하면 그깟 출연료 수수료 떼가는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저야 좋긴 한데...”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세요?”

“저녁까지는 안 들어오실건데.”

“그럼 여기 있다가 저녁에 바깥에서 맥주 한 잔 하면서 아버지랑 상의해보기로 합시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야 신뢰를 하실 것 같으니까요.”

“그럼 시간이 많이 늦으실 텐데요? 그리고 술도 드셨으니 여기서 자고 가셔야 할 텐데.”

“여기 모텔 많잖아요? 괜찮아요.”

지나가다가 금덩이를 주웠는데 하룻밤 자고 가는게 뭐가 대수겠는가?

동훈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억지로 붙잡고 있었다.

*

피맛골 영화인들의 단골 막걸릿집.

“아이고! 우리의 슈퍼스타! 양 감독님 오셨네.”

“천만 감독이 어서오십쇼.”

양호민 감독의 친우인 성창욱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예 박수를 쳐댔다.

그러자 손님들도 다 같이 박수를 쳤다.

“그만해! 아유 그만하세요. 안 그러면 나 갈거야.”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게 떼를 쓰긴, 알았어. 앉아.”

성 감독은 멋쩍어하는 양 감독의 소매자락을 붙잡고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러자 기다린 것처럼 박광효 감독이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축하드립니다.”

“고맙다. 다들 한 잔 하자.”

양호민 감독의 주름진 눈가에 웃음이 맺혔다.

“크으... 좋다. 와... 그런데 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천만을 넘길줄은 몰랐다.”

비꼬는게 아니라 순수한 감탄이라는걸 양 감독은 모르지 않았다.

“나도 몰랐어. 나도 천만 타이틀은 내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솔직히 9백만까지 갔을 때도 설마설마 했다. 그런데 배급사 애들도 독하긴 하더라고.”

“왜? 어쨌는데?”

“9백만 정도에서 사실 기세가 많이 꺽였거든. 그런데 어떡해서든 천만 넘겨보겠다고 별별 이벤트를 다 하더라니까. 막판에는 학생들 단체 관람에 원 플러스 원에... 별짓을 다해서 기어코 천만을 넘겨버리더라고. 지들도 돈버는 일이니까 그렇게 하겠지만 솔직히 나중에 가서는 고맙긴 하더라.”

“그럼! 일단 천만 타이틀은 따놓고 생각해야지. 걔들이 일 잘했네.”

“그런거 같아. 빛그림이랑 같이 일해본게 근 십년만이긴 했었는데... 참 그때가 어제 같은데 말이야.”

“세월 증말 빨라.”

양 감독은 재차 막걸리를 따라 마셨다.

이때 박광효 감독이 궁금했는지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런데 감독님, 이번에 천만 넘으시면서 도대체 얼마나 버셨습니까?”

보통 이런 물음은 가까운 사이가 아닐때는 민감해서 잘 물어보지 않는데 양 감독은 한참 후배인 박 감독이 귀여운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정산 안 받았다. 그런데 이번에 계약하면서 러닝게런티로 수익대비 3% 받기로 약속했어. 유지은 팀장이 그러는데 최소 6억 이상은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하더라.”

“우와~”

“이야, 이거 완전 로또 맞은거 아니야?”

지금까지 대한민국에서 아무리 흥행이 잘 된 영화라고 할지라도 감독이 가져가는 수익이 억대가 넘어가는 경우는 흔치 않았다.

그런데 단번에 6억이라는 말이 들리자 이들이 놀라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건 내 자랑이 아니라 장동훈이가 참 대단한게, 3% 러닝게런티에다가 천만을 넘으면 추가 보너스까지 약속했거든. 얼마가 될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짜게 줄 녀석은 아니야. 처음에는 녀석이 허풍을 치는가 했는데 러닝게런티를 받게 되는게 나뿐만이 아니거든. 스탭들 다 받아.”

“스탭들 다요?”

“다 나처럼 받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연출부 막내도 내가 알기로 3천 이상은 되는 걸로 알고 있단 말이야.”

“3처언!”

그들은 6억이라는 말이 들렸을 때보다 더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까지 영화가 잘 된다고 할지라도 스태프가 수백만 원 이상의 보너스를 받은 역사가 없었다.

그런데 저런 막내 스태프까지 천만 단위 이상의 목돈을 보너스로 받게 된 이상 충무로 일대에 지각변동은 예고된거나 마찬가지였다.

“잘 들어봐. 이제 시장이 완전히 바뀔 거라고. 만약 앞으로 계속 DH미디어에서 손익분기점 이상만 꾸준히 넘기면 누가 대형 제작사와 계약을 하려고 하겠어? 안 그래?”

성창욱 감독이 말했다.

“대형 제작사가 바뀌게 될지도 모르겠네.”

“그게 내 말이야. 이제 DH미디어가 대한민국 영화계를 선도하게 될 거라고. 실력 있는 스태프들은 이제 전부 DH미디어로 갈거야. 감독들도 마찬가지지.”

아무리 영화가 감독 놀음이라고는 하지만 실력있는 스태프는 감독이 짜놓은 판에 완성도를 끌어올려준다.

그렇기에 진짜 인정받는 스태프는 제작사에서 서로 모셔가려고 안달이었는데 이런 상황이 알려지게 되면 뒷일은 예상하나 마나였다.

“완전히 판이 바뀌겠어.”

“배급도 마찬가지야. 이제 빛그림이 거의 DH미디어와 전속으로 계속 갈 거 같은데 이렇게 되면...”

“LS엔터랑 SHOW가 안달 나겠구만.”

“그렇겠지.”

박광효 감독이 감탄했다.

“완전 장난 아니네요. 이번에 유병세 감독도 제작사 하나 설립하려고 하던 눈치던데. 거기도 그렇게 되려나?”

양호민 감독은 코웃음을 쳤다.

“유병세? 그 짠돌이가? 너 행여 유 감독한테 엮일 생각하지 말고 좋은 시나리오 있으면 장동훈이 찾아가. 이번에 유명진이라는 애가 입봉하는거 알지? 에로영화 찍던 놈이야. 근본도 없는 놈이라고. 그런 놈을 실력 하나 보고 입봉 시켜주는게 장동훈이야. 괜히 유병세 같은 놈 곁에서 인생 허비하지 말고.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박광효 감독은 양 감독의 말처럼 시나리오 몇 개 가져가 봐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물론 유병세 감독 몰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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