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욕심이 많은 사람들(2)
“드라마 박스 얘네 원래도 이런 식으로 영업을 하나?”
동훈은 강호의 전화를 받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웃었다.
“왜요?”
유지은 팀장의 물음에 동훈이 방금 강호와의 통화 내용을 이야기해주었다.
“아니, 강호 다니는 학원 있잖아요?”
“네.”
“거기에 ‘드라마 박스’에서 팀장급 하나가 와서 강호를 낚아채려고 했나 봐요. 원래 이런 경우가 있나?”
“글쎄요. 저도 매니지먼트사에서 일해본 적이 없어서...”
동훈은 저 멀찍이 구석에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일에 열중하고 있는 남자를 불렀다.
“김태현 씨! 잠깐만요.”
“네.”
30대 중반의 김태현은 이번에 DH미디어가 배우 매니지먼트까지 사업을 확장하면서 새로 영입한 인재였다.
인상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처음에 선입견을 가질뻔 했는데 경력도 상당하고 알아보니 연예계 내에서 평판이 아주 좋아 채용하게 됐다.
그리고 정말 우연이면서도 신기한 것이 그의 전 직장이 드라마 박스였다는 거다.
“혹시 드라마 박스에 송지연이라는 팀장이 있어요?”
“지연이요? 알죠. 송지연이는 갑자기 왜...?”
그가 아는걸 보면 적어도 완전히 사기꾼은 아닌 것 같았다.
“이강호라고 연기 지망생이 하나 있어요. 남자앤데, 걔가 논현동에 있는 에이플러스 연기학원에 다니고 있거든요.”
여기까지만 말했는데 김태현은 알았다는 듯 묘한 웃음을 지었다.
“아...”
“벌써 뭐 짐작가는 거라도 있어요?”
“남자애라면서요? 고등학생인가요?”
“네.”
“혹시 찰싹 붙어서 꼬드겼다고 하던가요?”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걔 가끔 그럽니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건 아니에요. 그냥 걔 영업방식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 악의를 떠나서 어린 친구한테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막상 계약하고 나면 누구보다 빡세게 관리하는 친구입니다. 물론 좀 고약한 성격이라 종종 사고를 치고는 하죠. 제가 잘 말해놓겠습니다.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계약하면 나중에 곤란하지 않아요?”
“음... 말씀드렸듯이 중간중간 사고가 나기는 해요. 하지만 그 친구가 알아서 잘 마무리 하더라구요. 저도 어떻게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회사에서는 송지연이가 배우 보는 눈이 좋고 그 친구가 데려온 배우들이 대박 낸 경우가 많아서 크게 제재하지는 않고 있어요.”
“문제네.”
“그 강호라는 친구가 연락했나요?”
“네.”
“오... 꽤 절제심이 있는 친구네. 사실 송유진이가 상당히 매력적이긴 하거든요.”
여배우들을 숱하게 봐 왔을 그가 저렇게 말하는걸 보면 확실히 예쁘긴 예쁜가보다.
그렇게 생각하니 새삼 강호의 인내심에 감탄하게 된다.
그쪽에서도 이런 성격이었던가?
“흠... 어쨌든 전 상당히 기분이 나쁘네요.”
“제가 드라마 박스 쪽에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대표님이 다이렉트로 얘기하면 서로 감정이 더 상할 수 있으니까 제 선에서 잘 마무리 해볼게요.”
“그렇게 해주세요.”
그렇게 넘어가나 싶은 순간 유 팀장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네, 어디요? 진짜에요? 이거 확실한 거죠? 알겠어요. 네. 저 대표님하고 같이 있어요. 네. 고마워요.”
전화를 끊은 유 팀장이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쏟아냈다.
“알아냈어요. 전에 블루 북스랑 계약 쫑나게 된거 나중에 어디랑 계약하는지 알아보라고 하셨잖아요?”
“알아냈대요?”
“네. 제가 블루 북스 관계자 말고 해당 작가랑 이야기를 해놨거든요. 그런데 어제 출판사에서 연락이 왔대요. ‘MSC 파트너스’랑 2차 저작물 계약한다고.”
“MSC 파트너스? 거기가 어딘데요?”
“저도 몰라요. 그래서 협회 쪽 아는 사람한테 알아봐달라고 연락했는데 방금 전화가 온 거예요. MSC 파트너스는 화신그룹에서 드라마, 영화만을 전문으로 투자하기 위해서 설립한 특수목적법인이래요. 여기까지 오면 딱 떠오르는게 있지 않으세요?”
왜 없겠는가?
세연이 남친이 바로 그 재벌그룹의 자식이라고 은정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는데 말이다.
“설마... 세연이 남친이?”
“맞아요. 아무래도 ‘펀 엔터테인먼트’에서 손을 댄 거 같아요.”
동훈은 허탈함에 등을 의자로 풀썩 기댔다.
어디 누가 걸리는지 한번 보려고 가만히 있었는데 세연이 남친이 걸릴 줄이야...
이걸 과연 세연은 알았을까? 만약 알았으면 솔직히 인간적으로 크게 실망할 것 같았다.
만약 몰랐다면 세연이에게 말해주는게 맞는 건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은정이에게 말하면 당장 언니한테 따지겠다며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설텐데 이걸 이야기해 줘도 되는건지...
언젠가 한 번은 터질 문제이니 굳이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골 때리네.”
“저도 너무 황당한데요? 뭐 그런 인간이 다 있지? 실장님은 뭐 펀 엔터에 대해 아는거 없으세요?”
김태현 실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펀 엔터는 잘 아는 편이긴 한데 거기 대표가 얼마 전에 바뀌었잖아요. 그런데 신세연 남친이 펀 엔터 대표입니까?”
순간 동훈은 아차 싶었다.
“아, 이거 비밀인데 지켜줄 수 있죠?”
“하하, 그럼요. ‘누구 남친이 어느 회사 대표다’하는 정도는 사실 비밀도 아닙니다. 비밀이라면 ‘누가 마약한다더라’ 정도는 되야죠.”
“사이즈가 후덜덜 하네요.”
“하여간에 거기 대표가 얼마 전에 바뀌어서 이 바닥에 그 사람에 대해 아는 사람 별로 없을 겁니다. 알기로는 화신그룹에서 연예계 쪽 손을 대보려고 가장 먼저 움직인게 이번 ‘펀 엔터’ 인수라던데... 유 팀장님 말씀 들어보면 그게 맞는 것 같네요. 어쨌든 하는 꼴을 보니 재수없긴 한데요?”
“그것도 많이...”
유 팀장이 인상을 확 구기며 한 마디를 보탠다.
“어쨌든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바빠질 수는 없으니까 블루 북스건은 그냥 넘어가기로 해요.”
“이대로요?”
“음... 법적으로 조치 취해봤자 남는 것도 없으니까 법적으로는 대응하지 말도록 해요. 그것보다 인간적으로 상처 하나는 남겨주죠.”
*
오늘따라 기분이 좋았던 종혁 때문에 항상 긴장의 연속이었던 회의가 무사히 끝내는구나 싶었던 정윤철 전무였다.
그런데 회의시간에 계속 울리던 전화를 몇 번이고 무음으로 돌려놓던 종혁이 더는 못 참고 전화를 받았을 때 파탄은 시작됐었다.
“오빠 이거 뭐야? 이거 진짜야?”
뭔가 터졌을을 느낀 종혁은 얼른 회의실을 나갔다.
“뭐하는 거야? 지금 일하는 시간인거 몰라? 전화 안 받으면 안 받는 이유가 있을거라고 생각 못해?”
제법 목소리에 힘을 줬으니 미안하다고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세연은 화가 단단히 났는지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였다.
“방금 기사 난거 진짜야? 만약 진짜면 나 오빠 다시 봐야 할 것 같아. 빨리 말해. 이거 사실이야?”
“아니, 무슨 기사? 뭔데 그래?”
“빨리 확인해 봐!”
빽 소리를 지르자 종혁이도 뭔가 안 좋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해 얼른 핸드폰으로 기사를 검색했다.
오래 검색할 필요도 없었다.
포털 연예면에 대문짝만하게 걸려있는 기사를 본 순간 종혁은 가슴이 쿵 내려앉는걸 느꼈다.
[장동훈 감독의 DH미디어. 펀 엔터테인먼트에 판권 날치기 당해]
그리고 이때.
“대표님! 방금 기사가...”
정윤철 전무는 핸드폰을 들고 달려오다 역시나 와락 구겨진 채 기사를 보는 종혁의 얼굴을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확인했지? 얼른 해명해봐. 나 연예계에 들어올 수 있도록 해주신 분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그 분 뒤통수 친거야? 아니지?”
종혁은 짜증이 치밀었다.
“사업을 하다보면 이런저런 일도 있는거지, 내가 이런 거 하나하나 너한테 다 설명해야 해? 건방지게...”
“뭐?”
“그리고 너 뭐야? 장동훈 감독이 네 애인이야?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구는데? 혹시 둘이 무슨 사이야?”
“오빠!”
“시끄러워, 끊어.”
종혁은 전화를 끊자마자 핸드폰을 벽에 던져버렸다.
팍!
꽤나 단단히 만들어진 핸드폰은 그의 마음과는 달리 박살이 나지 않았다.
그게 더 열받았는지 종혁은 떨어진 핸드폰을 향해 다가가 연신 발로 짓밟아댔다.
회의를 함께 했던 직원들은 지금 상황에 차마 나와 보지는 못하고 얼굴만 굳힌채 회의실에서 움직이질 못했고 정윤철 전무도 그저 그의 이런 기행을 바라보기만 했다.
“씨발!”
핸드폰을 완전히 박살낸 종혁은 한동안 씩씩거리다 정 전무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당신, 일을 도대체 어떻게 처리하길래 장동훈이가 저렇게 빨리 알아낼 수 있어.”
“저, 저는... MSC 파트너스에서 구입하시라고 대표님께서 말씀하셔서 그렇게 처리한 건데... 기사를 읽어보니까 대표님이 화신그룹과 연관돼 있어서 그렇게 예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탓이라는거야?”
“그건 아닙니다.”
“그럼?”
“... 죄송합니다.”
종혁은 분을 참을 수 없었다.
펀 엔터와 MSC 파트너스는 완전히 다른 회사였기에 모를줄 알고 쉽게쉽게 처리했는데 단박에 드러날줄은 몰랐었다.
그저 영화밖에 모르는 멍청이를 상대한다는 생각에 너무 쉽게 판단했던게 치명적인 실수라는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일단 무조건 모른척 하겠습니다. 그리고 MSC 파트너스를 통해서 강경하게 법적대응하도록 하겠습니다. 계약서 상에 문제될게 없으니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저 멍청한 정 전무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미 졌어! 사실이 알려진 이상 졌다고!”
“네?”
“MSC 파트너스쪽에다가 대충 잘 마무리하라고해. 그리고 무조건 우리랑 선을 그어. 나와는 절대 상관없는 일이라고. 알았어?”
“알겠습니다.”
“이번에도 실수하면 당신 모가지 온전하지 못할 거니까 잘 해.”
“알겠습니다.”
*
“감독님! 감독님!”
촬영을 끝내고 집에 들어갔어야 할 은정이 후다닥 사무실로 들이닥쳤다.
“너 왜 여기 와? 촬영 끝났으면 집에 갈 일이지.”
“대박사건! 이거 감독님이 기사 내신 거예요?”
은정이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동훈은 웃으며 그녀의 손을 밀어 젖히고 말했다.
“이것 때문에 왔어? 할 일도 없다. 너 내일은 중요한 씬 촬영이라며?”
“연습은 진짜 많이 한단 말이에요. 어쨌거나 방금 이것 때문에 언니한테 전화해서 막 쏘아붙였거든요. 언니 남친 대박 양아치라고. 그랬더니 아직 모르는 거라고 편들기는 하는데 딱 보니까 언니도 확신을 못하더라구요. 완전 실망한 눈치.”
“그게 그렇게 좋냐?”
“완전 좋죠. 난 그 인간 처음부터 별로였다니까요. 이번에 그 인간성이 싹 드러난거지. 그런데 진짜 완전 재수없지 않아요?”
“나도 놀랐어. 전에 만났을때는 되게 젠틀했거든.”
“젠틀은 무슨... 어쨌든 나 오늘 되게 기분 좋아요.”
눈을 땡글땡글 뜨면서 바라보는 은정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찰나 사무실 문이 열렸다.
“어? 강호 어머님?”
8시가 넘은 이 늦은 시간에 사무실로 들어선 이는 놀랍게도 강호와 강호 어머니였다.
“안녕하세요.”
90도로 고개를 숙이는 강호 어머니는 한숨을 푹 쉬더니 말했다.
“강호에게 말 들었습니다. 어떤 여시같은 년이 우리애를 홀리려고 그랬다면서요? 막 하렘 같은거 해준다고... 막 더듬고, 마약 파티에... 아주 욕정의 노예를 만들려고 했다면서요?”
“네?”
아니 뭐 그 정도까지는...
강호는 어머니의 뒤에서 몰래 브이자를 그리며 씨익 웃었다.
아무래도 송유진 팀장이 했던 일을 어머니에게 엄청 부풀려서 이야기한 듯 싶었다.
“연예계가 무서운 곳이라고 듣긴 했는데 이 정도일줄은 몰랐어요. 이래가지고는 안 되겠습니다. 제가 아주 잘못 생각했었습니다.”
“아, 네... 그럼 계약을...?”
“그 전속계약인가 뭔가 하는거 지금 바로 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