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82화 (82/116)

# 82

중요한 내기(4)

“어디에서 연락이 왔다고?”

“DH미디어라고...”

정윤철 전무는 한종혁의 물음에 다시 진땀을 흘렸다.

“이 새끼는 왜 하필 우리 배우를 지가 채가고 지랄인거지?”

“채갔다기 보다 우리가 계약 해지한 상태인...”

“누가 그걸 몰라?”

종혁이 빽 소리지르자 정 전무가 움찔 놀란다.

“죄, 죄송합니다.”

“하여튼 거슬려, 이 새끼... 그런데 강민재는 왜 데리고 간 거야? 주연급도 아니고... 설마 영화 주연으로 쓸 생각은 아닐 테고.”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서른 중반의 배우를 설마 주연급으로 생각하고 영입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배우가 적으면 회사를 운영하기도 힘들고 하니까 일단 몸집을 불리기 위해서 영입한게 아닐까 싶은데요? 마침 계약도 끝났다고 하니까 얼씨구나 잡았을 수 있습니다.”

“건방진 새끼... 재수 없는 놈 둘이 쌍으로 놀고들 있어. 장동훈이 영화 어떻게 돼가고 있어?”

정윤철 전무는 미리 준비해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장동훈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있던 유명진 감독이 이번에 감독으로 입봉하는 작품이 DH미디어 차기 개봉작으로 예정되어 있습니다. 제목은 건축학 원론이라고 하는데 로맨스 영화라고 합니다. 일단 여주인공이 임현주라 크랭크인에서부터 상당히 주목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유명진이는 뭐하는 새끼야?”

“원래 에로영화 감독하던 친구인데요.”

“에로영화?”

“네.”

“에로영화 찍던 놈을 조감독으로 데려다 앉힌 거야? 제정신인가?”

“다들 앞에서는 말을 못해도 뒤에서는 똑같이 그런 말들이 돌았다고 합니다. 영화학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기는 했지만 상업영화에는 아예 발을 뻗어본 적도 없었고 인맥도 대학 인맥이 전부긴 한데 알아본 바로 특별히 친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그런 인간을 조감독으로 데리고 온 건데?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 저도 황당해서 유명진 조감독을 데리고 왔을 당시 스태프 몇몇한테 사람을 시켜 물어봤는데 왜 그를 데리고 왔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고 해서 난감하긴 했습니다. 심지어 유명진 감독 본인도 모른다는 말이 있어서...”

“미친놈인가? 뭐 어쨌든 실력을 있대?”

“지금까지는 장동훈 감독 밑에서 일했기 때문에 진짜 실력은 이번 작품을 통해 보여질거라고 합니다.”

“촬영 들어갔잖아? 배우들이나 스탭들 반응 없어?”

“거기까지는 저도 잘... 촬영장에서 성격이 대단한 걸로 유명한 임현주가 아무런 잡음 없이 촬영하는 걸로 봐서 큰 문제는 없는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정도 이야기는 저기 밑에 직원한테 물어도 알 수 있는 수준 아니야? 내가 기대하는 수준에서 왜 이렇게 못 미치지?”

정 전무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비서가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신세연 씨 오셨습니다.”

“어, 들어오라고 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연이 빠른 걸음으로 들어왔다.

웨이브진 머리에 화려한 금발로 염색한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어머, 안녕하세요. 죄송해요. 저 조금 있다가 들어올까요? 전무님 계신지 몰랐어요.”

그녀가 들어오다가 멈칫하고 다시 나가려고 하자 한종혁이 황급히 일어서며 말렸다.

“아니야, 괜찮아. 말씀 다 끝나셨죠?”

“아, 네. 그렇습니다.”

“그럼 오늘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종혁은 언제 그에게 하대했느냐는 듯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고 정 전무는 아무렇지도 않고 같이 고개를 숙이더니 대표실을 빠져나갔다.

“오빠는 참 예의도 바르다. 보통 아무리 아랫사람이라고 해도 오빠처럼 막 예의를 갖추지는 않던데.”

“야, 전무님이랑 나랑 나이 차이가 얼만데? 거의 내 아버지랑 나이가 비슷하실걸?”

“그렇긴 하겠네.”

“점심 뭐 먹을지 정했어?”

“오빠는 뭐 먹고 싶은거 없어?”

“난 다 괜찮아. 너 전에 파스타 먹고 싶다고 했지? 내가 끝내주는데 알아냈는데 거기 가볼까?”

“오옷! 좋지, 좋지.”

“아, 그런데 이번에 은정이 새 소속사에서 작품 들어갔다고 했나?”

“뭔 소리야? 지금 한창 영화 찍고 있잖아. 전에 말했는데 잊어버렸어?”

종혁은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그랬지. 미안, 내가 너무 관심 없었다.”

“유명진 감독 작품이라는데 나도 로맨스 장르라는거 말고는 잘 몰라. 집에서 작품 이야기도 잘 안 해서. 얘가 연기 하더니 너무 건방져졌어. 짜증나. 이제는 언니랑 잘 놀아주지도 않고.”

“하하하, 아이고 우리 공주님 삐지셨어요?”

종혁이 귀엽다는 듯 세연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린다.

“삐진건 아니고 조금 서운한 수준?”

“그럼 집에서 아무말도 안 하는거야?”

“회사 이야기는 좀 해. 갠 희안하게 집에 안 있고 촬영 없어도 꼬박꼬박 사무실을 나간다니까? 직장인 출근하는 것처럼. 하여간 내 동생이지만 이상한 애야.”

“사무실을 왜 나가는데?”

세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나간대. 회사가 재밌다나? 그러면서 오늘 회사에 누가 왔고 뭘 했고 이런 이야기는 쫑알거리면서 자랑하더라고. 그게 왜 자랑거리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말이야.”

종혁은 흘리듯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정확히 뭘 자랑했는데?”

“나도 관심이 없어서 흘려들어서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 전에 어디 웹툰, 웹소설 출판업체랑 판권 계약 했다고 막 자랑하던건 기억이 난다.”

“판권 계약? 어떤 작품?”

“요즘 엄청 핫한 작품이라던데? ‘테헤란로 괴담’이라는 거랑 ‘해피 바이러스’, 그리고... 아... 뭐더라?”

“잘 생각해봐.”

“음... 기억이 안 나. 배고파서 그런가 봐.”

“그래? 그럼 우리 얼른 나가자.”

종혁은 얼른 자켓을 챙겨 입었다.

왠지 오늘은 기분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무슨 소리에요? 그게?”

동훈은 유지은 팀장의 말이 순간적으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은 작품에 무슨 문제가 생길 수 있단 말인가?

“그쪽에서 2차 판권 계약 관련해서 작가가 문제를 제기했대요. 자기와 협의하지 않고 2차 판권을 무단으로 계약했다구요.”

“아니, 하... 정말... 소속 작가랑 2차 판권 계약 체결하고나서 우리랑 계약한거 아니에요?”

“자기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작가와 분명 그렇게 계약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일단 작가가 반대하고 나서니까 일이 복잡하게 진행될 거 같아요.”

“하... x됐네.”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어놓고 이런 문제가 불거지니 황당하고 어이가 없을 뿐이다.

물론 법대로 한다면 결국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법으로 이겨서 좋을게 있을까?

문제는 출판사에서 저질렀지만 나중에 영화나 드라마로 나오게 되면 사람들의 비난은 제작사와 출연한 배우들에게 향할 건 안 봐도 뻔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상황 지켜보고요. 문제가 커질 거 같으면 그냥 계약 취소한다고 해주세요.”

“정말요? 너무 아까운데... 돈도 이미 지급했잖아요?”

“다시 받고 끝내요. 어쩌겠어요? 작가가 방방 뛰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텐데...”

아깝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후 문제가 생길바엔 아예 문제가 생길 원인 자체를 없애버리는게 나았다.

작품들이 아깝긴 했지만 말이다.

“흐음... 알겠어요.”

유지은 팀장은 판권계약을 하고 나서 계약한 작품을 이틀만에 다 봤을 정도로 이번 계약에 열의를 보였다.

본래 평소에도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이라고 하는데 이번 작품을 계약하고 어떤 감독으로 작품을 만들지 미리부터 구상하는라 동훈보다 더 들뜬 모습을 보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계약이 어그러져 버렸으니 그녀가 이렇게 실망하는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네. 분명히 계약할 때 소속 작가들이랑 2차 판권 계약이 자동적으로 된다는걸 알렸다고 했는데. 그게 다 거짓말이었을까요?”

“만약 작가가 하는 말이 맞다면 거짓말이었겠죠?”

“왜 그걸 거짓말을 하지? 그럴 이유가 있나요?”

“음... 글쎄요? 저도 출판 계약은 해본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한번 알아봐줄 수 있죠?”

“물론이죠.”

“원래 출판계약을 할 때 2차 판권을 자동적으로 끼워넣는 지랑 그게 없을 때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봐 주세요. 계약금이나 정산이 차이가 날 수도 있으니까. 아, 그리고 정말 저들이 말한대로 작가가 컴플레인을 걸었는지, 정확히 어떤 사유로 어떻게 걸었는지 확실하게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알겠어요. 제가 확실하게 알아 올게요.”

동훈이 어째 이번 사건이 왠지 모르게 찜찜했다.

*

“컷!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명진은 컷을 외친후 바로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정확히 10시 5분.

장동훈 감독과 촬영할 때는 단 5분도 넘겨본 적이 없었다.

정시에 끝나는 것도 거의 없었고 오히려 모든 촬영이 끝났을 때 는 일정상 촬영 종료시간보다 대개 1시간은 빨리 끝냈다.

조감독으로 일할 때는 그게 무척이나 좋았는데 감독이 되고 보니 조급함을 넘어 살이 떨릴 지경이었다.

이번 작품을 성공시키기 위해 매일 밤잠을 설쳐가며 다음날 있을 촬영을 대비해 다시 한번 구도와 완벽한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댔음에도 막상 촬영에 들어가면 ‘한 번 더’를 외칠 수밖에 없었다.

모든 장면을 단 한 컷으로 끝내버리는 장동훈 감독의 신기한... 지금에 와서는 기괴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능력에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다.

“잘 나왔어요?”

물론 살이 떨리는 이유는 촬영 시간을 조금 넘겼다는 것 말고도 이렇게 타이트한 일정과 상관없이 무조건 완성도가 좋아야 한다는게 더욱 큰 이유였다.

그러한 이유를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눈앞에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물어보고 있었다.

“네, 괜찮습니다.”

“흐음...”

현주는 방금 찍었던 씬에 대해 할 말이 있었음에도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괜히 입을 열었다가 전처럼 혹만 더 붙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유명진 감독의 곁에 다가온 건 이상하게 말을 걸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말 괜찮았어요.”

“지금 감독님 얼굴 되게 불안해 보여요.”

“전혀 아닌데요?”

“그런가?”

이때 은정이 저 멀리서 다가오더니 멀찍한 거리를 두고 섰다.

유명진 감독과 현주가 대화하고 있으니 끝날때까지 기다리겠다는 뜻이었다.

현주는 은정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이리 와. 왜?”

“감독님한테 드릴 말씀이 있어서...”

명진이 물었다.

“왜? 뭔데?”

“저... 아까 찍었던 씬을 좀 볼 수 있을까 하구요.”

“그럼. 물론이지.”

은정은 현주에게 살짝 눈인사를 하곤 유명진 감독의 옆에 찰싹 붙어 앉아 같이 모니터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가끔씩 웃어주고 눈을 마주치는 걸 보면서 순간 현주는 욱하는 감정이 올라오는걸 느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감정을 보며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이 자리에 있어야 할지 그냥 가야할지 망설이는데 은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선배님 앉으시겠어요? 전 다 봐서...”

“어? 아니...”

현주가 거절하려는 찰나 명진이 말했다.

“아까 잘 나왔는지 궁금해 했잖아요. 와서 봅시다.”

“네?”

“와서 앉아요.”

현주는 얼떨결에 명진의 옆에 앉게 됐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꾸벅 인사하고 사라지는 은정.

현주는 ‘쟤가 여기 왜 왔지?’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몇에서 명진이 방금 촬영한 씬을 다시 보여주기 시작하자 잡생각을 지웠다.

그리고 명진이 왜 이렇게 촬영했고 배우의 감정선이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자세히 알려주는 걸 들으면서 그것에 집중했다.

그녀의 몸이 조금씩 명진에게 기대고 있음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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