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중요한 내기(3)
JCB의 간판 뉴스프로그램 8시 뉴스타임에는 놀랍게도 양호민 감독이 나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작년 한국영화가 상당한 성장을 기록한 데에는 일명 장동훈 사단이라고 불리는 DH미디어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 앞에 나와있으신 분은 DH미디어에서 장동훈 감독이 아닌 외부 감독으로 처음 영입되신 양호민 감독님입니다. 반갑습니다.]
양호민 감독은 평소 지저분한 몰골이 아닌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외모라서 낯설게 보였다.
[안녕하세요. 양호민입니다.]
[일단 5백만 관객을 돌파하신거 먼저 축하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흥행속도가 굉장하단 말이죠. 일단 흥행 소감을 먼저 들어보겠습니다.]
양호민 감독은 평소 보지 못하던 흐믓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소감이라고 하면 뭐...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어떤 영화가 그러지 않겠냐만은 정말 오랫동안 저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열정이 들어간 작품이라서 정말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이 영화를 제작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따르셨다면서요?]
[일단 제작비가 많이 들고 괴수를 전면에 내세웠다보니까 애니메이션과의 차별점을 느끼지 못한 제작사들과 투자자들이 이 작품을 좀 꺼려했습니다.]
[원망 많으셨겠네요.]
양 감독은 앵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대답했다.
[하하, 원망이라... 글쎄요. 솔직히 아니라고는 못하겠어요. 굉장히 가지중심적이지만 영화 감독의 입장에서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시도하지도 못할 때 상당한 무력감을 느끼거든요. 멀리 떨어져서 보면 그들도 위험을 감수하기 어려운 것이라 충분히 납득이 되는데 본인의 일이 되면 당시에는 원망을 하게 됐었습니다. 지금은 말씀드렸듯이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음... 굉장히 힘든 시간을 보내신 것 같습니다. 이걸 안 물어볼 수 없겠네요. 어떻게 DH미디어와 함께 하게 됐습니까?]
[어느 제작사에서 작품을 거절당할 때 거기 제작 피디가 이런 말을 해주더라구요. 장동훈 감독이 새로 제작사를 세웠는데 어쩌면 거기서 제작해줄지도 모른다고. 전 솔직히 놀리는줄 알았습니다.]
[하하, 그러셨나요? 그런데 결국 찾아가셨군요.]
[갈데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더 황당한 건 제작을 해준다는 거예요. 어쨌거나 그렇게 하게 됐습니다.]
[장동훈 감독이 굉장히 고마운 존재겠군요?]
[후배지만 은인이나 다름없죠. 어쨌거나 내 자식 살려주고 올바르게 클 수 있게끔 도와준 사람이니까요.]
[그럼 장동훈 감독의 발언, 그러니까 배우만이 아니라 감독과 스태프들에게 더 많은 대우와 적절한 휴식시간까지 부여해야 한다는 말에 대해서도 충분히 공감 하십니까?]
[그럼요.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하는 내용이고 이번 우리 영화가 잘 된 비결에는 스태프들의 노력, 억지로 뽑아낸게 아닌 충분한 휴식 후 자신의 기량을 최대한 뽑아냈기에 이런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고 봅니다.]
[마치 운동선수처럼 말이죠?]
[적절한 비유네요. 운동선수들도 충분한 휴식을 줘야 경기장에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는 것처럼요.]
[그럼 영화로 돌아와서 정치적인 문제를 안 꺼낼수가...]
동훈은 더 이상 볼게 없다는 듯 재생되는 영상을 종료했다.
“왜요? 더 봐요.”
유 팀장은 더 보고 싶은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동훈은 지금 손발이 오그라들을 만큼 오그라들은 상황이었다.
“솔직히 이것도 유 팀장님이 보자고~ 보자고 해서 본 거잖아요. 에이... 난 됐어요. 그리고 윤종빈 씨는 어때요?”
윤종빈이 첫 미팅을 했던 그날 이후 며칠간 상당한 스케줄을 수행했었다.
연기력이 어느 정도인지 카메라 테스트를 다시 하고 액션연기를 할 수 있는 상태인지 확인하기 위해 동훈이 어렵게 섭외한 액션스쿨에서 몸상태도 확인했다.
젊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체 몸이 가벼워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액션스쿨 대표가 엄지를 치켜들며 잘생긴데다가 운동도 잘하니 정말 질투가 난다는 말까지 들었다.
처음에는 이상한 곳에서 사기를 당하는게 아닌지 어떨떨해하던 윤종빈도 점차 익숙해지며 열의있는 모습을 보여주고는 잠시 서울에 집을 알아보겠다고 다시 대전으로 내려갔다.
부모님과 담판을 짓고 오겠다는 건데 아직 결과가 어떻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어제 밤에 연락왔어요. 사흘 뒤에 올라오겠다던데요?”
“집은 어느 수준으로 구한대요?”
집은 당연히 윤종빈이 직접 구하든 소속사에서 구해주든지 해야 할 것이니 굳이 상관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물어보는건 연기학원이 있는 강남과 가까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워낙 귀찮은걸 싫어하는 성격 같은데 지금 연기에 열정을 가진다고 해도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르지 않은가?
조금의 여지조차 남겨놓지 않는게 최선인데 과연 소속사에서 얼마나 도움을 줄지는 미지수였다.
“아직 그건 모르겠어요. 삼천만원 가지고 올라온다고 하던데 소속사에서 어느 정도는 보태주지 않겠어요?”
“그렇겠죠?”
아무리 지금까지 작품 하나 해본적 없는 쌩신인이라고는 해도 상업영화 주연으로 캐스팅을 앞두고 있는데 소속사가 그 정도는 밀어주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일단 윤종빈 씨 올라오고 집 계약하게 되면 말씀 드릴게요. 아. 액션스쿨 학습비는 어떻게 처리할까요?”
아직 영화 촬영이 본격적으로 진행된게 아니라서 제작비에 포함시킬 수 없었다.
아무리 못해도 석달은 굴러야 할텐데 아직 윤종빈 소속사와 협의도 제대로 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액션스쿨 비용을 부담할 수는 없었다.
일단 캐스팅을 확정 지어야 뭘 하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윤종빈 씨 올라오면 캐스팅 매듭짓고 진행하도록 해요. 그쪽 소속사가 최소한 절반은 부담하겠지.”
아무리 요즘 회사가 잘나간다고 해도 돈을 펑펑 쓸수는 없었다.
“알겠어요. 그리고 오늘 미팅 있는거 아시죠?”
“아, 그럼요.”
*
오래된 빌라의 반지하 방.
“우르르르~ 까꿍! 하하, 웃는다, 웃어.”
강민재는 깔깔거리고 웃는 아기를 안고 말했다.
“늦지 않았어?”
“어, 이제 나갈거야.”
“후... 이번엔 진짜 잘 됐으면 좋겠다.”
와이프의 걱정스러운 말에 민재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잘 될거야.”
“그러게 그때 그 인간들 말을 안 믿었어야 했는데...”
“...”
와이프의 푸념에 민재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는게 당연했다.
지금까지 받은 출연료를 털어 지금보다 더 좋은 곳으로 이사하기 위해 알아보다 부동산 거래 사이트에서 제법 괜찮은 매물을 찾아냈을때는 정말 기쁘기 그지 없었다.
평수도 제법 되고 교통도 좋았으며 근처에 어린이집도 있었다.
모든게 완벽했는데 주인이 복비가 아깝다며 부동산에서 계약서를 쓰지 말고 개인으로 거래하자는 말에 덜컥 수긍했던게 화근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그깟 복비였지만 당시 50만원이 넘는 돈은 너무나 아까웠다.
그런데 계약하고 돈주고 나니 주인은 연락이 되지를 않았고 나중에 알아보니 사기 전과만 10범이 넘는 악질 사기범이라고 했다.
와이프는 중고나라에서 물건 사는것도 아닌데 그깟 복비 줄이겠다는 말에 혹했냐고 지금도 투덜거렸다.
그때 말리던 아내 말을 들었어야 했다고 지금도 후회하고 있었다.
이제와서 후회한들 어쩌겠느냐만은 그때 아내말을 듣고 사기만 안 당했어도 지금 이렇게까지 쫓기듯 마음 졸이며 살지는 않았을게 분명했다.
이후 민재는 집에서 항상 죄인처럼 지낼 수밖에 없었다.
“기죽지 말고, 잘해.”
민재의 와이프는 그의 머리를 꼭 안아주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그제야 민재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걱정 마. 어제 뉴스에도 나왔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람이 딱 보니 진정성이 있어 보이더라.”
“그렇긴 한데... 계약금을 주긴 할까?”
어차피 오늘 전속 계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계약을 하자고 부른 것이니 만큼 이들은 계약이 안 될까봐 걱정하는게 아니었다.
문제는 요즘 톱스타들도 계약금을 안 받고 계약하는게 추세였기에 계약금을 주기 어렵다고 할까봐 걱정하는거였다.
“천만 원은 어렵겠지?”
“안 되면 5백이라도 달라고 해. 대출금 이자는 밀리면 안 되잖아. 당장 나가야 할 돈이 한 두푼도 아니고. 일단 5백만 있으면 어떻게 넘길 수 있을거야.”
“알았어. 내가 최대한 계약금 달라는 식으로 말해볼게.”
민재는 방긋 웃는 자신의 분신을 바라보며 마음을 굳게 먹고 집을 나섰다.
*
“어서오세요.”
유지은 팀장은 회사에 두 번째 배우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을 반갑게 맞아들였다.
“안녕하십니까.”
“TV에서 볼 때보다 더 멋있으신대요?”
“아유, 감사합니다.”
“대표님 안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들어가세요.”
“네.”
동훈은 이미 회의실에서 전속계약서류를 훑어보고 있었다.
이미 은정이를 계약할 때 한번 해보긴 했지만 그래도 평생 영화감독만 해왔으니 소속 배우와 계약은 두 번째임에도 뭔가 새로웠다.
“안녕하십니까.”
“어서와요. 앉아요.”
조금은 굳은 민재의 얼굴에 동훈이 물었다.
“전 소속사와 관계는 깔끔히 정리된거죠?”
“네. 물론입니다.”
이미 아침에 민재의 전 소속사에게 계약관계가 모두 정리된 것인지 확인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다시 한번 물어본 거였다.
“JS엔터에서 어떤 조건이었는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일단 우리도 배우를 계약한건 신은정 씨 이후로 두 번째라 다른 배우 매니지먼트사와 비교했을 때 부족한 부분이 있을수도 있구요. 그래도 일단 회사의 방침을 그렇게 정했기 때문에 따라주셔야 하는 부분이 있어요.”
“당연합니다.”
“그리고 전속계약 하면서 이번에 들어갈 작품인 ‘동네 아저씨’도 같이 출연 계약을 맺는 겁니다. 이건 영화 캐스팅 계약서... 한 번 읽어보세요.”
민재는 제목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계약서를 차분히 살폈다.
그런데 출연료를 보곤 깜짝 놀라 물었다.
“출연료가 이게 맞습니까?”
“네. 적은건 아니죠?”
“아유, 적긴요. 생각보다 많아서...”
“우리 회사 소속 배우라서 조금 더 생각한거예요. 그리고 우리 소속 배우가 되면 DH미디어에서 제작하는 작품에 출연할 땐, 매니지먼트 커미션을 10% 밖에 떼지 않을 겁니다.”
“와... 그럼 이 돈이 거의...”
“네. 거기서 10%를 제외하고 다 가지실 수 있을 거예요. 물론 다음해에 세금을 많이 내시겠지만.”
“많이 벌면 세금이야 많이 내도 괜찮죠.”
사실 다음해 세금을 걱정할만큼 출연료가 쎈 것도 아니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7천만 원.
아침드라마 주연으로 나온다고는 하지만 그래봐야 아침드라마일 뿐이고 영화는 이번에 처음이었다.
첫 작품에 7천이면 그의 생각보다 훨씬 큰 금액일게 분명했다.
“그리고 계약금 문제인데... 원래 요즘 추세가 계약금 없이 계약하는 상황이라 저희도 이 부분에서 좀 고민이 있었어요. 한명 계약할때마다 계약금이 계속 나가게 되면 회사가 부실해질 수도 있으니까...”
민재는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대표님 상황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죠? 다행입니다. 이해해주셔서.”
민재는 오면서 계속 계약금 생각밖에 없었지만 7천만 원이나 되는 출연료를 보고 나서 계약금 생각은 훌쩍 날아가 버렸다.
당장 거액의 출연료가 들어올 건데 계약금이야 못 받으면 어떤가?
집으로 돌아갈땐 와이프 좋아하는 초밥에 맥주 한잔 하며 자랑해야겠다는 생각이 계약 하는 내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