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
중요한 내기(2)
동훈은 오랜만에 세연의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신세연, 유병세 감독의 차기작 여주인공 확정]
처음 이 바닥에 세연을 오게 만들었던 것이 자신인 만큼 항상 잘 되기를 바랐었는데 하필 유병세 감독의 차기작에 꽂힐 줄이야...
유 감독을 싫어해서 놀란게 아니라 하필 명진과 비슷한 시기에 촬영을 들어가는 만큼 재수 없으면 자매간에 정면승부를 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생겨버렸다.
아직 어떤 내용의 작품인지는 잘 모르겠기에 잘한 선택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재수없이 둘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면 서로 불편한 상황이 만들어질지도 몰랐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역시 누구보다 발랄하게 사무실로 출근하는 은정을 보며 동훈은 내심 그녀가 아직 기사를 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 오늘 아침에 기사 봤어?”
“네? 무슨 기사요?”
“언니 기사 나왔던데? 유병세 감독 차기작 한다고.”
“아, 그거요? 전 당연히 기사 나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죠. 근 며칠간을 그것 때문에 얼마나 뻔질나게 사람이 드나들었는데요? 제작사에서도 왔다가 가고, 소속사에서도 왔다가 가고... 하여튼 정신 없었어요. 뭘 그렇게 유난들을 떠시는지...”
그녀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모습에 동훈은 그녀가 개봉시기가 비슷해 맞상대할수도 있다는 생각까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다.
“알고 있었구나?”
“왜요? 감독님 지금 표정이 되게...”
“되게 뭐?”
“되게 불쌍하게 보고 있거든요?”
“내가 너를?”
“네. 혹시 언니랑 나랑 붙게 될까봐 걱정되서 그러세요?”
“알고 있었어?”
“그럼요. 당연하죠. 들어보니까 언니도 곧 있으면 대본리딩 들어가고 크랭크인 한다던데? 한 달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할지도 모른다고 듣긴 했어요.”
“그런데 정말 재수가 없어야 해. 진짜 굉장히 운이 나빠야 비슷한 시기에 하는 거지, 안 붙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아. 걱정하지 마.”
은정은 피식 웃었다.
“내가 왜 걱정해요? 어차피 내가 이길 건데?”
생각지도 못한 반응.
“아... 뭐 선의의 경쟁 이런거야?”
“에이, 그런거 아니구요. 언니랑 선의의 경쟁이 아니라 언니 남친이 재수없어서요. 마음 같아서는 정말 딱! 정면승부해서 박살을 내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요.”
“그럼 언니는? 속 상할거 아니야?”
은정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망하면 조금 미안하기는 한데, 언니야 다른 작품 하면 되니까... 그 인간 얼굴 죽상이 된 걸 꼭 봐야 하는건데 말이에요.”
“언니 남친을 왜 그렇게 싫어해?”
은정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소름끼치는 벌레를 보듯 말했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들어요.”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동훈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되물으니 그녀가 후다닥 다가와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아, 글쎄... 내가 고딩때였는데요. 언니가 남친 왔으니까 요리를 해주겠다고 막 부산스럽게 움직이는데 내가 도와준다고 거들었거든요? 그런데 막 움직이다가 언니 남친이랑 눈이 딱 마주쳤는데... 내 다리를 막 훑어 보고 있었던거 있죠?”
“그래? 근데 자신도 모르게 시선이 갔던건 아닐까?”
당연히 시선을 돌리면 안 되긴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눈이 돌아가는 경우가 가끔 있다.
“알죠. 그런데 보통 남자들이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가 눈이 딱 마주치면 다시 안 그러려고 하잖아요? 특히 나는 여친 여동생인데. 안 그래요?”
“그렇지. 다시는 안 그러려고 하지.”
“그런데 그날 계속 쳐다보는거예요. 차마 언니한테 말은 못했는데 솔직히 언니보다 나를 더 쳐다봤다니까요? 그것도 되게 엉큼한 눈빛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은정이 그를 싫어할만 했다.
“이상한 놈이긴 하네.”
“그렇죠? 완전 변태. 난 그래서 언니한테 몇 번이나 좀 헤어지라고 했었는데 이상하게 언니한테는 되게 젠틀하게 군다나봐요.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 어쨌든 그래서 남친 이야기만 나오면 내가 학을 떼는데도 언니는 남친의 어디가 그렇게 존경스러운지 뭐만 했다하면 ‘남친이 그러는데...’, ‘남친이 경험한 바로는...’ 이런 이야기를 못이 박히게 한다니까요.”
“하하, 네 성격에 싫어할만 하다.”
“그렇죠? 난 정말 그 인간 딱 질색이야. 그래서 한방 제대로 먹여주면 속이 다 시원할 것 같긴 해요.”
“진짜 한 방 먹여줘야겠네.”
“그런데 오늘 왜 이렇게 일찍 오셨어요?”
사무실에 가장 먼저 출근하는 사람은 보통 유지은 팀장이나 은정이었는데 오늘은 동훈이 가장 먼저 나와 있자 궁금해서 묻는 거였다.
“아침에 회의 있어.”
“무슨 회의요?”
“어, ‘엔플라잉’ 출판사라고 웹소설이랑 웹툰 출판하고 소속 작가들 매니지먼트 하는 곳인데 오늘 작품 몇 개 판권 계약 진행하기로 했거든.”
“그런것도 있었어요? 난 못 들었는데?”
“아주 그냥 배우가 아니라 직원이네, 직원. 뭘 또 다 알려고 그래?”
“칫, 소속 배우는 직원 아닌가? 뭘 또 숨기려고 그러세요?”
아주 말로는 당하질 못하겠다.
이때 이곳에 없어야 할 명진이가 다급한 얼굴로 후다닥 문을 열고 들어왔다.
“어? 너 왜...?”
“어머, 감독님, 안녕하세요?”
명진이는 은정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하고 말했다.
“어, 안녕. 아직 시간 있습니다. 한 시간 뒤에 출발하면 현장까지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어요.”
“아니 뭐 그렇긴 한데... 사무실에는 왜 왔어? 그것도 연출부도 없이 혼자?”
명진이는 두꺼운 서류봉투에서 두툼한 각본을 꺼내들며 말했다.
“제가 만들었던 각본 중에 몇 군데 수정한데가 있는데 좀 봐주십사해서요.”
“메일로 보내지?”
“수정한 부분 중에 오늘 촬영분도 있거든요.”
“그래? 알았어. 그런데 각본 다 완성한 상태였잖아? 콘티도 다시 수정하겠네? 그럴 필요가 있었어?”
“완성도를 조금 더 올리기 위해서...”
어딘가 모르게 다급하고 긴장된 표정의 그를 보니 뭔가 있다고 느껴졌다.
“누가 각본 가지고 뭐라고 해?”
“네? 아닙니다.”
“아닌데 각본에 왜 손을 대?”
각본을 계속 수정한다고 좋은 결과가 나타나는건 아니다.
마치 시험을 푸는 것과 같을 수 있는데 헷갈리는 문제를 계속 생각한다고 정답이 나오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각본은 정답이 없는 것이기에 보통 처음 느낌대로 쓴 것이 가장 좋을때가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일단 완성된 각본은 특별한 문제가 없는한 그대로 끌고가는게 기본이었다.
현장에서 즉석으로 콘티를 수정하기도 하지만 그건 현장에서 찍다가 뭔가 번쩍 떠오르거나 다수의 의견에 따라 변경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완성된 각본을 가지고 계속 수정하는게 버릇이 되다 보면 그 다음 작품부터는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키기 더욱 어려워진다.
다 쓰여진 걸 보다 보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 같고, 또 이후에 수정할 각본이라고 생각하기에 애초부터 전력을 다해 쓰지도 않게 된다.
한번 쓰면 다음에는 수정이 없다는 생각으로 써야 좋은 작품이 나오고 더 많은 작품을 쓸 수 있게 된다.
이걸 알려주었는데도 수정했다고 한다면 분명 누군가 그의 각본을 가지고 계속 찔러댔을게 확실했다.
“많이 댄 건 아닙니다.”
“흐음... 뭐야? 말해봐.”
명진이는 우물쭈물거리다 슬쩍 은정의 눈치를 보았다.
눈치가 귀신같은 은정은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동훈의 팔을 잡고 말했다.
“딱 붙어있어야지.”
“은정아, 너 내일 촬영인데 연습 더 해야 하지 않겠니?”
“단언컨대 저 연습벌레나 마찬가지거든요. 그리고 전 대표님과 비밀을 공유한 사이라...”
순간 명진은 눈을 휘둥그레하게 뜨며 동훈을 향해 검지로 가리켰다.
말은 안 해도 눈빛으로 ‘이 도둑놈...’이라고 하는게 분명했다.
“야, 너 그게 무슨... 야, 이상한 상상하지 마.”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다정한 거 아닙니까?”
명진의 말대로 은정은 동훈의 팔을 품에 안고 미소를 한가득 짓고 있었다.
기겁한 동훈은 얼른 그녀를 떼어냈다.
“야, 너 무슨...”
“칫! 감독님, 실망이에요. 나만 빼놓고 비밀얘기 하실려고...”
명진이는 의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둘이 무슨 사이인건 아니죠? 어쨌든 이건 절대 말해줄 수 없는 이야기니까 어쩔 수 없어. 감독님, 이쪽으로...”
명진은 동훈의 팔을 잡고 후다닥 회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회의실 문을 닫은뒤 블라인드까지 쳤는데 그 모습에 동훈의 표정이 더욱 기괴해졌다.
“뭐야? 뭔데 그래?”
잠시 가슴을 진정시킨 명진이 결심한 듯 말했다.
“저 이번 영화 잘 되면 임현주랑 사귀기로 했어요.”
“무슨 개소리야? 누구랑 사귄다고?”
“임현주요.”
결연한 표정의 명진을 보니 장난하는게 아니었다.
“뭐? 이런 미친 새끼!”
“감독님, 좀 조용...”
“야, 와... 이런 미친... 내가 조용히 하게 됐어? 네가? 네가 현주랑 사귄다고? 미쳤네, 이거?”
임현주가 누군가?
대한민국 최고의 여배우이자 만인의 연인 아니었던가?
물론 싸가지가 극에 달해 연출하는 사람치고 그녀를 경계하지 않는 이 없다지만 외모만 봤을 때 그녀는 언감생심 쳐다도 볼 수 없는 여자 아니었던가?
동훈도 현주를 여자로써 좋아한건 아니지만 그녀의 미모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여배우를 고작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로영화를 찍던 감독이 사귀기로 했다니...
배가 아프지 않으면 공자나 부처가 틀림없으리라.
“일단 진정하세요. 현주랑 내기한 거예요. 내기.”
“무슨 내기를 어떻게 했길래 네가 현주랑 사겨?”
“아니, 어제 촬영 쉬는 날이었잖습니까? 그런데 가만히 있는 절 데리고 경기도 외곽 카페로 불러내더니 거기서 각본을 가지고 막 참견을 해대는 거에요?”
“그래서?”
“내가 감독님 말씀을 항상 가슴에 품고 다니지 않습니까? ‘배우에게 기죽지 마라!’ 딱 그거 하나 품고 제가 당당하게 말했죠. ‘너, 내 각본 마음에 안 들면 나가라.’ 이렇게...”
“미쳤네, 이거. 그러다 현주가 진짜 나가면 우리 제작비 다 날리는거 알면서 그런 거냐?”
“안 나갈거라고 생각했죠. 어쨌든 현주도 그거 듣고 당황하더니 내 각본대로 해서 잘 안되면 공개사과 하라고 하더라구요.”
이 부분은 현주가 조금 심했다.
“그건 좀 오반데?”
“그렇죠?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오케이! 그럼 이번에 영화 성공하면 너 나랑 사귀자’.”
그런데 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은정이 후다닥 들어와 물었다.
“그러니까 사귀겠데요?”
밖에서 몰래 듣고 있었던 거다.
이 요망한...
“너, 너는 안 갔니? 후... 어쨌든 그렇게 된 거죠.”
“대박! 오마이 갓! 말도 안 돼!”
명진이는 가장 놀래서 방방 뛰는 은정을 제지하지 못하고 고개를 내밀어 회의실 밖을 살펴본 다음 다시 문을 닫았다.
“너, 이거 비밀이다.”
“당연하죠! 입 꾹 잠그겠습니다.”
은정은 입으로 자물쇠를 채우는 포즈를 취했지만 어째 그 모습이 더 신뢰감을 잃게 만들었다.
명진은 한숨을 쉬다가 다시 동훈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여튼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미치겠더라구요. 작품은 무조건 성공해야겠지, 각본이 이상하다고 듣고 보니까 더 이상하게 보이지... 저 잠도 제대로 못 잤습니다.”
“임현주랑 사귀게 된다는데 잠을 제대로 자면 그게 인간이겠냐? 로봇이지.”
“그러니까 각본에 조금더 신경이 가더라구요. 일단 한 번 봐주세요.”
“일단 줘 봐.”
놀란 건 놀란것이고 각본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하긴 했다.
원래부터 이 각본은 동훈이 손댄 부분이 거의 없었다.
‘건축학 원론’의 구성을 알려주긴 했지만 그걸 토대로 완성한건 오로지 명진이었으니까.
괜히 보면 이것저것 참견하게 될까봐 일부러 완성된 각본은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본래 원작은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이 있었기에 괜히 어설프게 손댔다간 더 안 좋은 결과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각본을 읽고 나니 명진이 완성한 각본은 확실히 뭔가 달라도 달랐다.
센스있는 대사와 몰입감을 주는 플롯이 그대로 머릿속에 그려져 각본을 읽고 났을땐 어느 정도나 흥행이 될지 기대될 정도였다.
반대로 붉은 글씨로 수정한 부분은 전체적인 흐름에서 튀어 보여 몰입감을 떨어뜨렸다.
“좋겠다.”
“네?”
“좋겠다고. 바꾸기 전이 훨씬 나아.”
동훈은 피식 웃으며 회의실을 나왔다.
“감독님, 부러워하는거 아니죠?”
은정의 환한 미소를 보며 동훈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