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79화 (79/116)

# 79

중요한 내기(1)

김우진에 대한 비난 여론 때문인지 이틑날에 관객수가 조금 줄어들었지만, 김우진 소속사에서 강경대응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진정되는 모양새였다.

아직 정체를 밝히지 않은 A씨에게 허위사실 유포로 고발하고 모든 의혹을 전면 부인하면서 여론이 점차 지켜봐야 한다는 쪽으로 변하기 시작했던거다.

양호민 감독을 비롯해 배급사인 빛그림과 DH미디어 소속 직원들은 겨우 한숨을 돌렸고 김우진은 의혹이 밝혀질 때까지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집에서 근신하기로 했다.

아직 김우진의 결백을 믿는 팬들도 많았기에 그가 무대인사로 참여하면 더 많은 홍보가 되겠지만 솔직히 김우진을 백프로 신뢰하지 않았던 빛그림에서는 그냥 일정에서 그를 빼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괜히 행사에 참여시켰다가 나중에 원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역풍을 맞을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점차 서로 간에 지루한 거짓말 싸움으로 가면서 영화 흥행은 큰 문제 없이 순항을 시작했다.

일주일도 안 돼 관객 2백만 명을 돌파했을땐 김우진 사건은 겉으로 드러난 문제라기 보단 잠재적인 위험 정도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물론 A씨 측에서 확실한 물증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당연히 DH미디어 식구들은 하루하루가 즐겁기 그지 없었는데 이런 즐거운 분위기와는 달리 입봉을 준비하는 유명진 감독은 나날이 피가 마르고 있었다.

“이런 대사는 너무 수동적 아닌가요? 난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는데.”

“그럼 갑자기 감정이 튀어요. 여기서 여주인공은 그렇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에요. 물론 결혼하면서 대학생때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대놓고 들이댈만큼...”

“들이댄다는게 아니구요. 남자가 헷갈릴 수 있으니까 조금 더 확실하게 간다는거죠.”

“그래도 이 장면은 그렇게 가면 갑자기 영화 분위기가 바뀝니다. 이대로 가야 해요.”

“흐음...”

심드렁한 표정을 짓는 현주를 보며 명진은 속으로 짜증내지 말자고 계속해서 다짐했다.

둘이 각본을 들고 회의를 하는 곳은 DH미디어 사무실이 아닌 경기도 외곽 인적 드믄 곳의 아주 예쁜 카페.

사실 오늘 그녀와 만날 예정이 없었다.

크랭크인에 들어갔다고 휴일도 없이 촬영하는건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쉬기로 근로계약서에 작성해 놓아서 오늘은 집에서 쉬며 콘티나 그리려고 했었는데 느닷없이 현주가 불러낸 거였다.

그것도 서울은 답답하다며 명진이를 태우고 이곳까지 나온 거라서 처음엔 황당하기도 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뭐, 명진도 답답한 서울을 벗어나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라 인정받는 현주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니 설레이면 설레였지 기분이 나쁠 수 없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짜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서 그런지 의욕이 충만한 그녀는 도무지 명진의 연출을 믿을 수 없는지 계속해서 자신의 의견을 주장했던 거다.

“감독님 여기 와서 2시간을 넘게 이야기했는데 제 의견 하나도 안 들어주신거 아시죠?”

“전부 제가 들어들이기 힘든 의견이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충분히 납득할만한 의견도 있었던 것 같은데요?”

“안타깝게도 저와 현주 씨의 기준이 많이 다른가 보네요.”

“비꼬는 건가요?”

“전혀요. 비꼬는 것처럼 들린다면 그건...”

“제 마음에 꼬였다는 말인가요?”

현주의 눈꼬리는 점차 올라가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심기가 계속 안 좋아지고 있었다는 건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만 명진은 일부러 못 본 것처럼 무시하고 있었다.

명진은 동훈에게 이번 영화에 들어가기 전 철저하게 교육받았다.

톱스타에게 쩔쩔메는 감독은 절대 큰 감독이 될 수 없다고.

배우와 원수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자신이 생각하는 연출에서 양보하면 안 된다고.

그렇기에 지금 현주가 불같은 눈빛으로 째려봄에도 기죽지 않고 마주볼 수 있었다.

그녀도 나름 당황하고 있었는게 지금까지 그녀 의견을 이처럼 일방적으로 거부하는 감독도 처음이었다.

장동훈 감독때는 갑자기 바뀐 각본에 뭘 건들려고 할 것도 없이 후다닥 촬영이 이루어졌기에 의견을 말 할 것도 없었지만 다른 작품에서는 그래도 어느 정도 그녀의 말빨이 먹혔기 때문이다.

물론 명진이는 그런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만약 내가 장동훈 감독님이라고 해도 이렇게 연출 하나하나를 짚고 넘어갈 거였어요?”

현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아니요. 장동훈 감독님은 이미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신...”

“실력을 증명 못한 감독과 같이 일하기 어려우면 지금이라도 포기하시면 됩니다.”

명진의 말이 생각지도 못한 폭탄이었는지 그녀는 멍한 얼굴로 명진을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말 그대로에요. 지금이야 단 둘밖에 없지만 나중에 현장에서도 이렇게 나오시면 전 이번 영화 연출 못합니다. 현장 분위기가 깨지면 결코 좋은 영화 안 나오죠. 그런 위험을 안느니 차라리 일정을 뒤로 미루는게 낫습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다.

안 그래도 촬영 일정이 늦어질까봐 남자 주연 캐스팅을 그렇게 후다닥 했는데 다른 배우도 아니고 임현주를 촬영 중간에 깐다는건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기에 명진은 말을 뱉어놓고 터질듯한 심장소리가 행여 들릴까, 표정 관리가 안 돼 뻥카가 들킬까 노심초사 하고 있었다.

“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감독인 제가 책임 안 지면 누가 책임지겠습니까?”

현주는 너무 큰 충격에 한동안 입술을 깨물고 팔짱만 낀 채로 명진을 노려보았다.

그녀에게 계속 끌려 다니느니 이렇게 확 기선을 잡아 촬영 끝낼때까지 그녀의 입을 막아버리는게 최선이라고 판단했는데 그녀의 모습을 보며 명진은 자신의 도박이 통하고 있음을 알았다.

본래 그녀 성격 같으면 엎고 나갔어도 진작에 엎고 나갔어야 맞다.

그런데도 엉덩이를 떼지 않는다는 건 이번 작을 놓치기 싫다는 이유와 감독과 싸우고 나갔다가 돌아올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알기 때문일거다.

현재 WAS엔터와 DH미디어와의 사이가 좋으니 더욱더 함부로 움직이지를 못하는 것이다.

5분을 넘게 아무말 없이 노려보던 그녀의 입이 드디어 열렸다.

“감독님 배짱 있으시네. 좋아요. 그럼 우리 내기 하나 해요.”

“무슨 내기요?”

“감독님이 원하는대로 연출했다가 이 영화 실패하면 나중에 인터뷰나 방송에서 내 말을 들을 걸 그랬다고 공식적으로 밝혀주세요.”

“하...”

명진은 순간 황당함에 어이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야말로 이번 영화를 실패하면 다시는 연출봉을 잡을 생각을 하지 말라는 거나 다름 없었다.

그녀의 조건은 그야말로 공개적으로 자신의 연출력이 일개 배우만도 못함을 자인하라는 말이었으니까.

화를 내려다가 문득 다시 한번 동훈의 말을 떠올렸다.

‘넌 내가 아는 한 가장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연출가야’

고작 에로영화만 봐놓고 어딜 봐서 그런 말을 해줬는지는 아직까지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그 말이 그 어떤 말보다 자신감을 주었다.

이번 영화는 무조건 성공할 거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장동훈 감독이 대한민국 최고 재능이라고 인정한 감독이 자신 아닌가?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대신 오는게 있는면 가는게 있어야겠죠? 만약 이번 영화가 성공하면...”

“성공하면요?”

“나랑 사귑시다.”

그녀는 명진이보다 더 큰 충격을 받았는지 입도 뻥끗 못했다.

그저 똥그래진 눈으로 경악하고 있었을 뿐.

“왜요? 그 정도 자신감은 있으니까 촬영 없는 날에 감독 불러내서 이것저것 참견한거 아닙니까? 자신 없어요?”

현주는 어이없는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말했다.

“나, 나 좋아해요?”

“대한민국에 임현주 싫어하는 남자가 어디 있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이, 인간과 인간끼리... 그러니까 화면에서 보는거 말고 인간적으로 나 좋아하냐구요.”

“그게 중요합니까?”

“그럼 안 중요해요?”

“지금 중요한건 이번 영화 성공에 내 커리어 모두가 달렸다는 부분입니다. 그 정도 각오도 없이 내 인생을 모두 걸라고 하셨던 건가요?”

“난 그런 뜻으로 말한게 아니라...”

그녀도 홧김에 한 말이 이렇게 중요한 뜻이 담겼다는건 미쳐 파악하지 못했었던 듯 싶었다.

“무슨 뜻이건 내가 내린 결론은 그겁니다. 그러니까... 현주 씨는 이 내기를 거부할 수 없습니다.”

명진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가시는 거예요?”

“뭐, 더 할 말 있습니까?”

“이렇게 가시면...”

“아, 그리고... 현주 씨랑 사귄다고 해서 꼭 현주 씨가 손해보는건 아닐 겁니다. 난 앞으로 DH미디어의 간판 감독이 될 것이고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 될 겁니다. 아, 장동훈 감독님이 계시니까 제 2의 감독이라고 해두죠. 그 정도면 나쁘지 않은 조건 아닌가요?”

“...”

“그럼 내일 촬영장에서 봅시다.”

등을 돌려 떠나는 명진이에게 현주가 소리쳤다.

“이거 우리 둘만 알고 있기에요!”

“뭐, 원하신다면...”

그녀를 두고 카페를 나온 명진은 마치 경보하듯 걸음을 빨리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속으로 ‘미쳤어. 미쳤어’를 반복하면서 말이다.

저 멀리 카페가 안 보일 정도로 멀어지자 명진은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주변을 뱅뱅돌며 안절부절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택시가 안 다니는 동네인 이곳에서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야 할지 막막했기 때문이다.

올때는 현주의 차를 타고 왔는데 갈 때도 그녀의 차를 타고 갈 수는 없었다.

“졸라 멋있게 나왔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

한참을 고민하던 명진은 결국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더니 저 멀리 보이는 아파트 단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PC방이라도 나타나길 기대하면서.

*

석태는 차에 앉아있다가 어딘가 모르게 화난 얼굴로 나가는 명진을 보곤 급히 카페로 달려 들어갔다.

역시나 현주가 상기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아이스커피를 빨아들이는 모습에 뭔가 일이 터졌구나 싶어 조심스럽게 다가가 물었다.

“누나, 무슨 일 있었어요? 방금 유명진 감독 나가던데...”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평상시의 도도한 표정으로 물었다.

“표정 어떻디?”

“표정이요? 조금... 화난거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던데요?”

“흥, 아주 웃겨 진짜.”

“왜요? 뭐 잘못 됐어요?”

“아니, 가자.”

현주가 자신의 백을 들고 일어나자 석태는 얼른 차에 돌아가 시동을 켰다.

그리고 뭔가 생각났는지 뒷자석에 타는 현주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명진 감독은 어떻게 집에 간답니까?”

현주가 빵 터졌는지 혼자 웃음을 터뜨리더니 말했다.

“파하하! 됐어. 그냥 가.”

“네? 여기 택시도 잘 안 다니는 곳인데요?”

“네가 가서 제발 타달라고 사정해도 안 탈거니까 그냥 가자고. 그리고 우리 싸운거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네. 알겠습니다.”

석태는 이 모든 상황이 궁금한 것 투성이었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유리창 밖을 바라보던 현주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떠올랐다.

*

“씨발... 되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돈 줍는 다더니 김우진 낙태 스캔들을 가지고도 망하지를 않네.”

유병세 감독은 감독들의 모임인 페르소나 사무실에서 인터넷 기사를 보며 신경질적으로 마우스를 움직여대고 있었다.

김우진 스캔들이 터졌을때만 해도 이건 무조건 폭탄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별다른 타격 없이 넘어가자 속이 뒤틀린 거였다.

누구는 주연배우도 아니고 고작 여주 매니저 욕설에 흥행에 큰 타격을 입었었는데...

이때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자를 보니 LS엔터에서 온 전화였다.

“네, 유병세입니다.”

“주연 여배우로 신세연 씨 어떠세요? 그쪽에서 오케이 하는 분위긴데요?”

“신세연이요?”

아무리 요즘 신이 차세대 톱스타 여배우로 떠오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임현주를 놓치고 보니 조금... 아니, 많이 부족해 보이는건 사실이었다.

유 감독의 분위기를 읽었는지 상대방측에서 조금더 자신감 있는 말투로 말을 이었다.

“신세연 쪽에서 투자도 일부분 들어올 모양입니다. 솔직히 우리쪽에서는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어요. 제작비도 많이 들고...”

뒷 이야기는 안 들어도 뻔했다.

전작이 실패했으니 여배우 그만 고르고 작품이나 잘 만들자는 말을 차마 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유병세 감독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며 다짐했다.

이번 영화를 끝으로 제작사를 세우겠다고 말이다.

“어쩔 수 없죠. 그럼 미팅 잡아요.”

거부할 수 없으니 쿨하게 승낙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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