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한 걸음 더(5)
화들짝 놀란 김우진은 허둥지둥하며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많이 놀랐는지 그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충격! 김우진 여자친구 A씨, 낙태사실 고백]
“너 이 새끼, 어떻게 된 건지 빨리 말해! 여자친구 낙태시킨게 사실이야? 이 여자는 도대체 누군데?”
우진은 너무 놀라 고 대표의 말에도 얼빠진 얼굴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말 안해!”
그제야 번쩍 고개를 든 우진은 더듬거리며 항변했다.
“아, 아니... 전 그, 그런적 없어요. 이게 무슨 말이야. 낙태라니... 난 그런 이야기 들어본 적도 없다니까요! 나 진짜 몰라요!”
처음에는 머뭇거렸지만 말을 할수록 억울한지 점점 언성이 올라갔다.
고 대표는 이마를 부여잡고 한숨을 내쉬다 소파 상석이 털썩 앉으며 말했다.
“일단 앉아. 그리고 여기 A씬지 나발인지, 얘 누군지 알겠어?”
우진이도 자리에 앉으며 억울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몇 명 떠오르긴 하는데... 내가 뭐 매일 여자 바꿔가면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진짜 어느 누구한테서도 아이 가졌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니까요? 그리고 나 그런거 되게 철저해. 나 아무리 취해도 콘돔 없이 여자랑 잔 적 없다니까요?”
“내가 네 콘돔 이야기까지 들어야겠니? 내가 정말 동네 창피해서 진짜... 너나 현주나 어쩜 그렇게 내 속을 썩이니?”
“대표님, 나 진짜 억울해요. 내가 진짜 전화 걸어볼까?”
“누군지는 확실히 아는 거야?”
우진은 바짝 마른 입술을 깨물더니 이름을 나열하기 시작했다.
“현승이. 걔가 나랑 좀 안 좋게 헤어진거 같아요. 그런데 걔랑 나 못 본지 1년이 넘어거든요? 그리고 은주. 걘 반년 넘은거 같은데... 그리고 걘 진짜 오로지 엔조이였어요. 나만 그런게 아니라 둘이 합의하에... 아니, 대표님 이런 이야기 듣기 싫은거 아는데 난 진짜 솔직하게 말하는거예요. 지금 상황이 상황이니까. 그리고 소리. 얘가 제일 걸리는데...”
“소리? 설마 임소리?”
고 대표가 등을 소파에서 떼고 황급히 물어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임소리는 ‘핑크쥬스’라는 망한 걸그룹 멤버였는데 유독 그중에 가장 예뻐서 한동안 예능에 나오기도 했었다.
또한 걸그룹 활동이 끝난 뒤 여러 남자 연예인과 열애설을 흘릴만큼 매력적인 여자라 고 대표도 익히 알고 있었다.
“네...”
“하... 아니야. 그래도 걘 연예인인데 설마 낙태로 기사까지 내보낼만큼 멍청하지는 않을 거야. 박 상무는 일단 기자한테 물어서 이 여자 변호인 측 접근해. 정확히 이떻게 돌아가는 건지 좀 알아봐. 도대체 누군지도 좀 알아보고.”
“알겠습니다.”
박 상무가 나가자 고 대표는 상기된 얼굴의 우진이에게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잘 들어. 네가 정말 억울하다고 하면 우린 법적으로 대응할거야. 그런데 나중에 내 뒤통수 칠 거라면 그냥 처음부터 사실대로 이야기해.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하든 수습해 볼테니까. 지금 여기서 확실히 해. 그냥 이 위기를 모면한다는 생각으로 거짓말하면 난 정말 실망할거야.”
고 대표는 그저 실망한다고 했지만 우진은 그녀가 말한 실망이 나중에 굉장히 큰 여파로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좋을때는 누구보다 좋은 사람이지만 그녀가 이 자리에 올라오기까지 얼마나 냉정한 면모를 보여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진이도 바로 대답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한테 임신에 관해서 이야기 한 애는 없었어요. 뭐 내가 실수했을 수도 있겠지. 내가 깜빡하고 그걸 할 때 안하고 했을수도 있을 텐데, 그럼 나한테 이야기를 했어야지. 아! 잠깐만...”
우진은 말을 하다 말고 황급히 톡을 뒤지기 시작했다.
한 5분여를 뒤진 끝에 고 대표에게 황급히 내밀었다.
“이게 그건가? 혹시 이 내용이 임신했다는 말인가?”
고 대표가 핸드폰을 들어 살펴보니 조금 이상한 부분이 있었다.
“날 책임져야 한다고?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네? 얘가 누군데?”
“얘가 황은주라고...”
“느낌이 딱 얘 맞네. 어쨌든 알겠어. 넌 이제 집에 틀어박혀서 일절 나오지 마.”
“어떻게 그래요? 당장 내일 무대인사 있는데?”
“그건 일단 배급사랑 의논해볼게. 얼른 가. 지금쯤이면 벌써 기자들 앞에 몰려있을지도 몰라.”
우진은 한숨을 푹 쉬고는 마른세수를 하며 중얼거렸다.
“아... 나 이번에 진짜 열심히 했는데...”
“영화는 괜찮게 나왔다며? 그걸 믿어야지.”
고 대표는 그저 이 소란에 누구도 다치지 않고 넘어가기만 바랬다.
*
“어떡해요?”
유지은 팀장의 걱정스러운 말에 동훈은 의외로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책임질 일을 했으면 책임질 것이고 아니면 그냥 넘어가겠죠.”
“문제는 우리 영화 흥행에 찬물을 끼얹은 거잖아요. 댓글 보세요. 다들 영화 안본다면서...”
대중은 일단 팩트보다는 당장 기자의 말을 더 신뢰하고는 한다.
사실 이런 기사를 보면 대부분이 합리적인 의심이 안 들 수 없는 내용이라 무조건 믿지 말라고만 하기도 뭐하긴 했다.
결과가 나온 다음에 비판이나 비난을 해야 하는 것이지만 사람들이 다 공자나 부처 같은 성인이 아닌데 항상 옳은 일을 행할 수만은 없는 것이니 말이다.
이러니 기레기들은 항상 사람들을 선동하고 사람들은 그 기사에 속은 다음에 기레기라고 욕하면서도 또 다른 선동 기사가 올라오면 거기에 또 속아 넘어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보다 WAS엔터가 더 죽을 맛일 거예요. 그쪽에서 최대한 빨리 정리하려고 하겠죠. 기다려봅시다.”
“하필 오늘 이런 일이 생길수가...”
유 팀장이 낙담하는 사이 은정이 다시 머리를 불쑥 내밀며 끼어들었다.
“우진 오빠 진짜면 실망인데? 겉으로는 되게 젠틀하게 보였거든요.”
“아직 결과가 안 나왔잖아. 계속 젠틀한 사람일 수 있어.”
“하긴... 그건 그렇고 나 어때요?”
은정은 오늘 미용실에서 짧게 자른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물었다.
사실 머리를 잘라도 예쁘고 길러도 예쁘니 나오는 말이 예쁘다는 것 밖에는 없었다.
“예쁘네.”
“칫... 이래서 남자들은 센스가 없어.”
은정은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흔든다.
“내가? 내가 방금 센스가 없는 거였어?”
“그런 편이었죠.”
“그래? 그럼 오늘 저녁은 센스 있게 육회 어때?”
“오호~ 그건 조금 마음에 드는데요?”
동훈이 김우진의 기사를 보고 시큰둥하게 대응하니 사무실 직원들도 별일 아닌것처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관객들이 얼마나 빠져나갈까 노심초사했지만 이날 저녁까지 관객은 크게 줄지 않는 모습이었다.
직원들을 데리고 마장동 정육식당에 모여서 술과 고개를 마음껏 먹는 와중에도 유지은 팀장이 계속 박스오피스와 빛그림과의 연락을 통해 관객수를 업데이트 해주었다.
“네티즌 평점은 팍 깍이긴 했어요. 6.7이 뭐야... 하여튼 다들 김우진 욕하느라 정신없긴 한데 그 대부분이 영화를 안 본 사람들이고, 본 사람들 평점은 엄청 좋아요. 실제 영화관에서 나오는 사람들 반응도 굉장히 좋대요. 그래서 빛그림 양지원 대표도 완전 다행이라고 십년 감수했다고 하더라구요.”
그 오버스러운 양 대표가 오늘 아침에 그 기사를 보고 얼마나 호들갑을 떨었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것 봐요. 김우진 기사 보고 무조건 욕하면서 영화 안 본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영화 안 볼 사람들이 대부분일거고 나중에 영화 흥행하면 김우진이 아무리 나쁜 놈이라고 해도 궁금해서 영화 볼 겁니다. 물론 진짜 나쁜놈이면 안 되겠지만...”
솔직히 동훈이라고 걱정이 안 되는건 아니다.
다만 직원들 앞에서 김우진 걱정을 하며 같이 호들갑을 떨어대면 그처럼 촐싹 맞은 것도 없기에 내심 걱정을 하면서도 아닌척 하는 거였다.
“그래요. 그리고 내가 봤을 때도 김우진 씨가 그렇게 경우 없는 사람 같지는 않았으니까 기다려보죠. 그럼 우리는 이번 영화 대박을 위해서 건배나 할까요?”
은정이 벌떡 일어나서 외쳤다.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한강의 괴물’ 대박을 위하여!”
“위하여!”
즐거운 술자리였다.
영화판에 뛰어들고 매일 하루 건너 술자리였지만 조감독일때는 술자리의 즐거움보다는 눈치와 걱정 때문에 술이 필요했었다.
지금은 그저 좋은 사람들과 즐겁게 마시는 술이었기에 그렇게 술이 달수가 없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감독님도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하나, 둘 손수 택시비를 쥐어주며 택시를 태워 보내고 나니 어느새 은정이와 둘밖에 안 남아 있었다.
은정이는 이제 로드매니저가 있어서 술을 마실 때도 걱정이 없었다.
“언제 온다고 했어?”
동훈이 물어보니 그녀가 방끗 웃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냥 오지 말라고 했어요.”
“어? 왜?”
“전화해보니까 자고 있었더라구요. 나오라고 하기 미안해서 그냥 쉬라고 했어요.”
“야, 걔 출근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어. 월급도 충분히 받고 있는데?”
“그래도 이 시간에 자기 빼고 우리끼리 술 마셨는데 운전이라 하라고 부르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아니, 로드매니저가 술을 마시면 안 되는건데...”
“어쨌든 우리 잠깐 걸어요.”
“어? 어, 그래.”
동훈은 차를 세워둔 공용주차장까지 걷기 시작했다.
거기로 대리기사를 불렀기 때문에 집에 돌아가는데는 문제없었다.
그런데 둘이 나란히 걸으면서 가는데 어째 묘하게 설레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좁은 길이 아님에도 서로 바짝 붙어 걸었는데 팔과 팔이 닿는 그 느낌이 계속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그러다 불쑥 은정이 물었다.
“감독님은 여자친구 왜 안 만드세요?”
“그게 만들고 싶으면 만들어지는 거였어?”
은정은 고개를 돌려 동훈을 빤히 바라보고는 물었다.
“만들 수 있으면 만들 거예요?”
“누구냐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감독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데요?”
“딱히 그런건 없어. 현명한 여자였으면 좋겠고, 의리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
“의리?”
“응, 난 남녀 사이에도 의리가 있다고 생각해.”
“오호~ 그렇구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그리고 다시 그녀와 어깨와 팔을 부딪치며 말없이 길을 걸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놓고 가게로 올 때는 그렇게 멀어보이던 길이 돌아갈 때는 어찌나 가까운지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주차장에 도착해 있었다.
“7457 차주분 되시죠?”
“네!”
어두운 밤이라서 그런지 대리기사는 은정을 보고도 별다른 내색 없이 차키를 받아 운전대에 앉았다.
동훈과 은정은 뒷자석에 서로 마주보고 앉았는데 딱 무릎이 닿을 거리였다.
“삼성동 들렀다가 역삼동으로 가겠습니다.”
“네, 그렇게 해주세요.”
어딜 먼저 들리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평소였다면 아무 말이나 하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풀었을텐데 이상하게 이 순간에는 이런 어색한 침묵이 나쁘지 않았다.
서로 창문 밖을 바라보며 야경을 바라보다 어느새 은정의 집에 거의 다 도착한 순간, 그녀는 상체를 바짝 다가서며 대리기사가 들리지 않게 속삭이듯 물었다.
“그런데 감독님은 왜 내 이상형은 안 물어요?”
“어... 그랬나? 이상형이 어떻게 되는데?”
“음... 없어요. 그런데 방금 생겼어. 나도 의리있는 남자가 좋을 것 같아요.”
그녀는 묘한 말을 남기곤 차문을 열고 나갔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감독님, 안녕!”
그녀는 아이처럼 손을 흔들고는 집으로 도망치듯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