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한 걸음 더(4)
처음 봤을땐 잘못 본 줄 알았다.
5:5 가르마의 단발머리를 한 채 어딘가 모르게 귀찮은 얼굴로 찍힌 사진은 아무리 봐도 윤빈 그가 맞았다.
마침 그가 주인공이었던 영화를 준비하며 그와 비슷한 사람을 찾는 중에 진짜를 이곳에서 볼 줄이야...
저 느끼한 5:5 가르를 이 정도로 완벽하게 소화하는 사람은 아마 그 말고는 없을 거다.
“그 친구는 단역이라고 하기에도... 사실 프로필 사진 찍고 나서 일은 한번도 한 적이 없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일을 안 했다뇨?”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잘 생겼잖아요? 우리 실장이 놀러갔다가 축구 경기였나? 하여튼 경기장 앞에서 누구랑 대화하는데 이 친구가 지나가더래요. 그런데 실장이 대화하다가 그냥 넋놓고 바라봤다고 하면서... 하여튼 따라가서 연락처를 받고 배우 하면 어떻겠냐고...”
“그래서 프로필 사진 찍게 된 건가요?”
조일상 대표는 미간을 찌푸리며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찍는 것도 쉽지 않았어요. 대전에서 서울 올라오기가 힘들다고 어찌나 거절을 하던지.”
“직업이 따로 있나 보네요?”
“아버지 농사 도와준대요.”
“네?”
“이거 찍을때도 연락처 주고 받은 다음에 한참 지나서 얼마 전에 찍은 거예요. 농한기라서 시간이 좀 난다고...”
“그럼 완전히 농사꾼인거예요?”
“아버지 안 도와주면 집에서 게임한다고 하던데... 하여튼 저 허우대로 어찌나 귀찮은 티를 내는지 우리도 거의 반 포기 상태입니다.”
“어쨌건 계약은 하신거죠?”
“네. 전속계약은 한 상태고 대전에서 연기학원은 계속 다니는 중이라고 하더라구요. 단지 단역은 대전에서 서울까지 오가는 차비나 겨우 생기는 것 때문에 그런지 잘 오려고 하지 않구요.”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도 그의 성격이 이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그저 그가 엄청난 스타인대도 불구하고 꼭 자신이 하고 싶은 작품만 했던 건 확실히 기억이 났다.
그게 귀찮은 탓이었는지 작품 보는 눈이 까다로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데뷔 초에는 그렇게 작품을 가렸던 것 같지는 않았기에 중간에 심경의 변화가 생겼던 건지 데뷔 초에는 어쩔 수 없었던건지 알 수 없었다.
모든게 확실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조금 꺼려지긴 했지만 다시 생각하니 성격이야 조금 다르면 어떤가 싶기도 했다.
연기에 재능만 있어준다면 외모만 가지고도 대한민국을 씹어먹을 대스타가 바로 그인데 말이다.
“연락 한 번 해주실래요? 영화에 캐스팅하고 싶다고, 한 번 올라오라구요.”
“말씀 드렸듯이 이 친구가 여간 귀찮아 하는게 아니라서 다른 배우를...”
“아니요, 이 친구여야 해요. 그리고 주연 생각하고 있어요.”
“네?”
“주연이요?”
조일상 대표보다 옆에 앉아 있던 명진이 더 놀라 재차 다시 물었다.
“감독님, 진짜 주연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액션영화 주연에 이 5:5 가르마 머리는 아무리 생각해도 좀...”
“헤어스타일이야 바꾸면 그만이지.”
“잘 생기긴 했지만 주연급으로 바로 쓸만 할까요?”
“일단 만나보고. 오게 할 수 있죠?”
조일상 대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그럼요. 제 까짓게 미치지 않고서야 장동훈 감독이 주연으로 한번 만나보겠다는데 빼겠습니까?”
“원래 그런 성격일 수 있으니까 너무 재촉하지 마시구요. 어쨌거나 전 아무 때나 괜찮으니까 그 친구 스케줄에 맞춰서 올라오라고 해주세요.”
“이 친구 스케줄이 맞추시려구요? 그러시면야 우리는 좋지만 감독님이 너무...”
“괜찮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 이름이 뭐죠?”
덮어졌던 프로필 파일을 다시 여는데 조일상 대표가 얼른 대답했다.
“윤종빈입니다.”
“아... 그렇구나. 가운데 글자 떼서 윤빈 어때요? 그게 훨씬 나은 것 같은데.”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그럼 연락 주세요.”
*
하루 뒤, 소속사 ‘하얀구름’ 측에서 바로 연락을 해왔다.
“바로 올라오겠답니다. 최대한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했는데 어떻게... 시간 괜찮겠습니까?”
조일상 대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흔쾌히 오케이 했다.
“네. 좋아요. 괜찮아요. 당장 오라고 하세요. 아, 그리고 근처 미용실에서 머리 짧게 깍고 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바로 버스 타고 올라간다고 하니까 얼마 안 걸릴겁니다.”
“그럼 회사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으니 유지은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지금 누가 온다구요?”
“아, 전에 명진이한테 들었었죠? 내가 하얀구름 가서 이번 영화 주연 맡을 사람 찍었다고.”
“아... 그 5:5 가르마?”
“하하, 맞아요. 그 5:5 가르마 그 친구가 지금 온대요. 아마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왜요?”
“잘 생겼거든요.”
그 때, 옆에서 불쑥 머리 하나가 솟아올랐다.
“누가 잘 생겼는데요?”
또롱또롱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은정이.
그녀는 요즘 매일같이 사무실로 출근도장을 찍고 있었다.
제일 먼저 출근해서 문을 여는 것도 그녀였고, 직원들의 책상을 매일 청소하는 것도 그녀였다.
특히 동훈의 책상은 그녀가 아예 전담하듯이 꼼꼼히 정리했는데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녀는 그게 좋다며 말리는걸 거부했다.
그렇게 청소를 끝내고 나면 대본을 외우고 캐릭터를 분석했다.
옆에 누가 있든 상관하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중얼중얼거리며 연기하는데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응, 이따가 올 배우. 엄청 잘생겼어.”
“오오~ 내가 아는 배우에요?”
“아니, 신인이야. 아직 단역도 안 해본 배우. 이번에 주연급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아직 만나보지는 않아서 잘 모르겠네.”
“와! 장난 아니다. 어떻게 연기하는 것도 안 보고 주연을 덜컥 생각하셨어요?”
솔직히 그녀 말처럼 말도 안 되는 일이긴 하다.
“그냥 딱 느낌이 왔어. 아, 이 친구는 무조건 스타가 될 상이다 싶었지.”
“절 봤을 때 처럼요?”
그녀가 갑자기 얼굴을 확 들이밀고 물어보는데 순간 가슴이 덜컥했다.
아마 어느 남자라도 평정심을 잃기 힘들게 분명했다.
“그, 그래. 너처럼.”
“히힛! 뭐 그렇다면 기대가 되긴 하네요.”
그녀는 다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 대본을 들고 그녀가 주로 연습하는 탕비실 구석으로 숨어들었다.
“큼... 어쨌든 이따가 그 친구오면 좀 알려주세요.”
유 팀장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네~ 알겠어요.”
동훈은 얼른 회의실에 숨어들어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시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물론 손에 잘 잡히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일하다 점심을 먹고 다시 각본에 손을 대면서 몇 시간이 흘렀을 때 기다리던 손님이 도착했다.
회의실 안에 있는데도 밖에 손님이 왔다는 건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여직원들의 움직임 때문에 알 수 있었다.
소리죽인채 웅성대는(?) 그 부산스러운 느낌은 회의실 안에서도 느껴졌는데 곧이어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짧은 머리가 조금 어색한지 머리를 만지며 꾸벅 인사하고 들어온 그는 김영웅 감독이 있던 그곳의 윤빈, 그가 맞았다.
“안녕하세요. 윤종빈입니다.”
“어서와요. 앉아요.”
잘생긴 얼굴을 받쳐주는 저음의 목소리.
확실히 배우를 타고난 사람은 목소리부터 다르다.
“소속사에서 이야기는 듣고 왔어요?”
윤종빈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장동훈 감독님께서 절 보자고 하셨다는 거랑 주연... 으로 생각하셨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진짜 주연이 맞는 건가요?”
“일단 제가 지금 준비중인 영화에 주연으로 윤종빈 씨를 염두해 두고 있기는 해요.”
“전 아직 연기 한 번 제대로 해본적 없는데 어떻게 주연으로 쓰시려고.... 전 도저히 이애가 안 가는데요.”
주연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덥썩 물지 않는 모습이 더 좋게 느껴졌다.
“당신 연기를 보고 염두한게 아니라 작품을 구상하면서 생각했던 주인공의 캐릭터가 있었는데 마침 ‘하얀구름’ 프로필 파일을 뒤적이다가 당신을 보고 딱 ‘이거다’ 싶었어요. 당연히 아직 확정인 건 아니에요. 영화 한 편을 만들기 위해선 많은 노력과 준비가 필요가 하니까요. 연기력은 물론이고 이 영화는 액션영화라서 몸도 만들어야 합니다.”
“아...”
그는 아직 확정이 아니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정이 아니라니까 실망했어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솔직히 장동훈 감독님이 아니라 처음 듣는 감독이 절 주연으로 쓰려고 했다고 들었으면 아마 서울까지 오지도 않았을겁니다. 사기꾼이 아니고서야 절 뭘 봤다고 주연으로 쓴다고...”
“날 사기꾼으로 안 봐줘서 다행이네요. 그럼 여기 준비한 각본이에요. 혹시 요 며칠간 시간 있어요?”
“네?”
“대전에서 왔다갔다하기 힘들고 솔직히 나도 시간이 그렇게 여유있는 편은 아니거든요. 그래서 결론을 좀 빨리 내고 싶어요. 근처 호텔 하나 잡아줄테니까 그거 보고 캐릭터 잡아보죠. 괜찮으면 액션스쿨가서 몸도 좀 확인하고... 어때요?”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이 일처리 하는게 당황스러웠는지 윤종빈은 잠시 눈을 껌뻑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훈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왠지 이번에도 느낌이 좋았기 때문이다.
*
명진이 준비하는 ‘건축학 원론’은 안희준과 계약을 맺고 무사히 크랭크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요즘 충무로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DH미디어 세 번째 작품이라 그런지 대본리딩 때는 무려 열 명도 넘는 기자들이 몰려들었다고 들었다.
당연히 동훈은 그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다.
당장 오늘 개봉인 ‘한강의 괴물’ 때문에 온 신경이 네티즌 반응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동훈보다 더 초조해 하는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WAS엔터의 김우진이었다.
안 그래도 주혁과 이 작품 때문에 신경전까지 했던 적이 있었고 사전판매로 상당한 매출을 올렸기에 주변에서 이 작품에 기대감이 무척이나 올라가 있었다.
언론시사회와 VIP시사회를 통해 이미 작품을 감상했던 우진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완성도를 보이자 마음이 놓였지만 그래도 흥행의 결과는 까봐야 아는 것이기에 이른 아침부터 사무실에 출근해 고은숙 대표와 함께하고 있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잘 되겠지. 드라마 시청률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개봉날에 그렇게 신경쓸 필요가 있겠니?”
고은숙 대표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우진이 이번 영화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까지 동요하면 우진이 더 긴장할까봐 일부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저 이번 영화 망하면 앞으로 절대 영화 안 할거예요.”
“뭘 그렇게까지...”
우진의 말이 어느 정도 진심을 담고 있음을 고 대표는 알았다.
대한민국 톱스타인 그가 메인 타이틀롤을 맡은 것도 아니고 서브 주연으로 참여한 영화인데 만약 이런 작품까지 망해버리면 놀림은 놀림대로 당하고 얻은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자존심 강한 그가 그냥 넘기기에는 너무 큰 타격일 거다.
“현주 누나는 어떻대요?”
“어떻긴, 요즘 아주 바짝 긴장해서 대본 품고 산다던데? 이게 드라마면 대충 그렇게 찍다가 어느 순간부터 풀어질텐데 영화니까 그냥 지켜보는거지.”
“잘 될 것 같아요?”
고 대표는 피식 웃었다.
“너랑 똑같아. 장동훈 대표 믿고 시나리오 괜찮으니까 덥썩 물었던 거지. 다른 이유 있겠니? 그러니까 얼른 집에 가. 뭐 얻어 먹을거 있다고 회사에 와 있어? 나 정신 사나워.”
“왜 구박을 하고 그러세요? 그냥 답답해서 나왔어요.”
고 대표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너 흥행에 신경쓰는 마음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는 한데 직원들 보는데서 그렇게 끙끙거리는 모습 보여주는거 좋지 않아. 스스로 가치 떨어뜨리지 마.”
단호한 고 대표의 말에 우진은 길게 굼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요, 가요, 가.”
그런데 그때,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박 상무가 후다닥 들어왔다.
“뭐야?”
“누님, 아니... 대표님, 우진이...”
“우진이 뭐?”
“우진이 기사가 하나 터졌는데요.”
“무슨 기사?”
고은숙 대표는 뭔가 심상치 않은 느낌에 바로 포털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리고...
“야, 김우진. 내가 너 여자 조심하라고 그랬지!”
고 대표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