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76화 (76/116)

# 76

한 걸음 더(3)

명진은 뜬금없는 동훈의 말에 놀라 돌아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냐는 눈빛에 동훈은 그의 이미를 톡 때리며 말했다.

“내 작품 이야기야, 신경쓰지 마.”

“아...”

설마 아침드라마 주연급을 자신의 작품에 꽃을까 간 떨어질 듯 놀랐던 명진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기 제 명함이구요. 혹시 프로필 사진 같은거 있을까요? 아니면 JS엔터에 물어볼까요?”

강민재는 잠깐 고민하다가 품에서 낡은 수첩 하나를 꺼내 한 페이지를 휙 찢어내고는 자신의 연락처와 메일주소를 적어주었다.

“아무래도 여기 회사와는 인연이 다 한거 같습니다. 그러니까 저한테 바로 연락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으흠... 그렇군요. 알겠어요. 제가 이 자리에서 바로 확답을 해드리는건 아니고 일단 캐스팅 오디션 차 한번 회사에 방문해주세요. 미리 트리트먼트 메일로 보내드릴 테니까 캐릭터 잡고 와주시구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김민재는 연신 허리를 90도로 굽혔다.

“그럼 나중에 봅시다.”

“네, 연락 주십쇼.”

그를 두고 주차해둔 곳으로 걸어오는데 명진이 물었다.

“강민재 씨를 어디에 캐스팅 하려구요?”

명진이도 이미 동훈이 쓴 트리트먼트를 읽어본 상태였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미 타고난 연출력을 지닌 명진이에게 먼저 보여주고 감상평을 들어보는건 당연했다.

그는 트리트먼트만 보고서도 이번 작품은 대박이 따놓은 당상이라며 감탄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강민재를 보고 떠오르는 캐릭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동훈이 그를 보고 캐스팅 오디션을 보자고 하니... 그것도 상황을 봐선 단체 오디션이 아니라 개별 면담 오디션을 볼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합격이라고 봐야 했다.

“네 작품 주연이나 걱정하세요. 내 작품까지 걱정할 여유가 있어?”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설마 주인공은 아닐테고...”

솔직히 명진이도 남자 주인공 때문에 골치지만 동훈 역시 남자 주인공을 누구로 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원작 ‘동네 아저씨’에서 보여준 남주의 포스를 과연 어느 배우가 보여줄 수 있을지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중이었으니까.

꽃미남처럼 잘 생겼음에도 무표정한 얼굴로 잔인하고 치열한 액션을 펼치는 그의 모습이 눈에 생생한데 과연 누가 그를 대신할 수 있을지...

“주인공은 아니고... 악역중에 동생 역 있잖아.”

“아... 그 쌩양아치?”

“그래, 강민재 씨가 인상이 굉장히 센 편이거든. 지금까지 조금 억울하고 마마보이 같은 역을 맡아서 그렇긴 한데 드라마 보니까 표정이 풍부하더라고.”

“아침 드라마 취향이셨어요?”

“일어나서 준비하고 있으면 나오는게 그거니까. 머리 말리면서 보고 옷 입다가 보고 그런 거지. 하여튼 저런 얼굴로 악역을 하면 캐릭터 강하게 나오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딱 여기서 마주치네.”

“그럼 원래부터 강민재 씨를 염두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냥 후보 중에 하나였어. 꼭 이 사람이다 하는 건 아니었고.”

“그런데 왜 바로 만나자고 했어요?”

“너도 그렇잖아. 화면에서 볼 때랑 직접 만날 때랑 느낌이 다른거. 직접 보니까 느낌이 더 괜찮았어. 미간에 잡힌 주름이나 눈빛이 악역 하면 아주 느낌 있을 것 같아.”

“오호... 그랬어요?”

배우를 보는 안목은 김영웅 감독의 경험이 맞물려져 예전에는 보지 못하던 걸 볼 수 있게 했다.

단순히 현재 배우가 하는 연기를 보고 판단하는게 아닌 캐릭터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가능성까지 어느 정도 엿볼 수 있게 된 거다.

다만 감독이 상상했던 연기를 배우가 펼칠 수 있느냐는 오로지 배우의 노력과 재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여긴 텄네.”

“후... 그럼 어떻게 하죠?”

“어떻게 하긴, 발품 팔아야지.”

“네? 아니 무슨 동대문 시장에서 물건 떼는 것도 아니고 발품 팔아서 해결 되는 문제였어요? 이게?”

“마. 이 자식 아직 배가 불렀구만. 네가 인마 처음부터 톱스타만 노려서 그렇지 내가 애초에 말해줬었던 배우들로 했으면 진작에 캐스팅 끝났을거 아니냐?”

“그렇긴 한데... 너무 떨어졌잖습니까.”

“배우의 급은 작품이 만드는 거야. 왜 네 작품을 배우에 기대려고해? 자신감 없어?”

동훈의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명진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이번 작품을 성공해야 겠다는 생각에 자꾸 배우에 대한 욕심을 냈네요.”

“배우에 대한 욕심을 내는 건 좋다고 생각해. 그런데 방향이 잘못됐었지 않나 하는 생각이야. 그리고 이미 임현주가 캐스팅 된 걸로 배우의 급은 충분히 오르지 않았어?”

“그렇긴 하죠.”

“그럼 급은 따지지 말고 딱 하나만 보자.”

“어떤 거요?”

“현주한테 먹히지 않을 만한 내공을 지닌 삼십대 배우. 그렇다고 드라마 단역으로 나오는 배우는 당연히 안 되겠지. 임현주 쪽에서도 반발할테고. 무슨 말인지 알지?”

“네. 그런데 그런 배우가 있습니까?”

“딱 떠오르는 친구가 있긴 한데, 이미 스케줄이 있을려나? 하여튼 가보자.”

동훈은 운전대를 잡고 악셀에 발을 올렸다.

어쩌면 오늘 많이 움직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

동훈 일행이 멀어져 가는 걸 지켜보던 강민재는 JS엔터 정문을 바라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내 결심한 듯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가 2층에 위치한 배우 3팀으로 올라갔다.

배우 1팀은 주연급 연기자들이 소속한 곳으로 그 중에서도 각 배우마다 부서들이 나뉘어 있어 아주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있었다.

반면 배우 강민재가 속한 3팀은 거의 조단역급 연기자들로 관리하고 있는 배우만 무려 마흔 명에 달했다.

원래 강민재가 속한 곳은 배우 2팀이었는데 계약기간 만료가 가까워오자 갑자기 배우 3팀으로 옮겨졌었다.

그 어떤 직원도 그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아 답답했는데 결국 재계약은 없다는 소리가 들려왔고 더 이상한건 이런 상황에 다른 소속사도 접근해오는 곳이 없었다.

“민재 씨 왔어?”

“네. 저 진짜 계약 끝나는 겁니까?”

민재를 맞이한 이는 배우 3팀을 맡고 있는 김승종 팀장으로 항상 짜증을 달고 사는 인간이었다.

자신의 스트레스를 직원들과 배우들에게 풀고 다녀 그를 좋아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지만 그래도 계급이 깡패라고 누구도 그의 앞에서 싫은 티를 내지 못했다.

“내가 위에다 다시 말해 봤는데 어렵다네. 그냥 다른 회사 가. 솔직히 우리 회사 아니라고 해도 갈 데 많잖아.”

“...”

알면서 그러는건지, 아니면 모르고 저러는건지 모르겠지만 김승종 팀장은 잔뜩 귀찮은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마치 귀찮은 날파리를 쫓는 것 같았다.

“나도 이제 해줄 수 있는게 없어.”

“도대체 왜 이러시는겁니까? 톱배우 만큼은 아니더라도 솔직히 저 이제 계속 상승세를 타고 있는거 아닙니까? 현재는 아침 드라마 주연이긴 해도 얼마 전에 주말 드라마 조연 제의 들어왔다면서요? 그런데 그거 거절하고 다른거 좋은거 하자고 하셔놓고선 이제와서 재계약 없다고 하시면 전 어떡합니까?”

“강민재 씨. 답답하네 진짜... 회사 일이 다 민재 씨 위주로 돌아가야 해? 본인 혼자 살아? 일을 하다 보면 원하는대로 안 될수도 있고 그런거지 뭘 그렇게 따지고 들어? 우리가 민재 씨 엿 먹으라고 일부러 그랬다는거야, 뭐야?”

“아니, 제 말은 꼭 그렇다는게 아니라...”

“말이 그렇잖아, 말이... 나도 이렇게 안 좋게 끝내기 싫은데 어쩌겠어? 위에서 당분간 소속 연기자들 내부 정리하자고 하는데. 대표님 바뀌면서 우리도 다 모가지 걱정이야. 당신은 나가면 다른데 계약해서 먹고 살면 되지만 우리는 당신보다 더해. 그런데 날 가지고 닦달하면 답 나와?”

“후... 죄송합니다.”

“죄송할거 없고, 회사 시끄러우니까 그만 끝내자고.”

참담함에 고개를 떨구고 있던 강민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다른 회사 찾아봐야겠네요.”

“그래, 잘해봐.”

“그럼 안녕히 계십쇼.”

민재는 터덜터덜 회사를 빠져나갔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김승종 팀장은 무표정한 얼굴로 3층으로 올라갔다.

“뭐래?”

그를 기다리고 있던 이는 한종혁에게서 진땀을 흘리던 정윤철 전무.

“어쩌겠습니까? 지도 할 말 없으니까 그냥 가더라구요.”

“병신이... 그러게 회식 자리에서 왜 대표 심기를 거슬러서 지 인생 망치고 그래? 지가 무슨 경찰이야? 술 마시다 보면 여배우 다리에 손이 닿을수도 있고 그런거지. 나설 때 안 나설 때 구분을 못 하더니만... 하여튼 잘했어. 다음에 또 찾아오면 그 때는 회사에 들이지도 말아.”

“또 찾아올까요?”

“흥, 안 찾아오겠어? 누가 그 인간 받아준다고? 지금 그 인간 받아줬다간 한 대표가 가만 있지 않는다고 단단히 일러뒀기 때문에 그 인간 받아주는 회사 없을거야. 어쨌든 대표님 때문에 나가게 되는거 티는 안 냈지?”

“그럼요, 티 절대 안 냈습니다.”

“잘해. 너나 나나 자칫 실수하면 바로 모가지야.”

“명심하고 있습니다.”

“대신 한 대표는 자기 사람이다 싶으면 확실히 챙겨준다고 들었으니까 시킨 일만 제대로 하면 된다고. 알겠지?”

“네. 그럼요.”

정윤철 전무는 두 손을 모으고 공손히 서 있는 김승종 팀장의 어깨를 툭툭 치고는 자리를 떴다.

*

동훈이 한참을 운전해 도착한 곳은 논현동에 위치한 작은 소속사 사무실.

“하얀구름? 이런 소속사도 있었어요?”

“나도 얼마 전에 알았어.”

동훈은 명진이를 데리고 계단을 오르며 말했다.

“여기에 누가 있는데요?”

“안희준.”

“어? 그 사람이 여기에 있어요?”

“알아보니까 소속사를 옮겼더라고.”

안희준은 서른을 넘긴 중년 연기자로 조연부터 시작해서 꾸준히 필모를 쌓아온 연기파 배우였다.

지금까지 조연만 주로 했었지만 아예 급이 낮다고 볼 수 없는게 계속 비중있는 조연으로 충무로 내에서 상당한 인지도를 쌓아 와서 그의 몸값도 조연 치고 상당히 높은 편에 속했다.

거의 주연급 조연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서니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성이 후다닥 다가와 꾸벅 인사한다.

“안녕하십니까. 장동훈 감독님, 여기는 유명진 감독님이시죠? 반갑습니다. 하얀구름 대표 맡고 있는 조일상이라고 합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이미 오면서 연락을 했기에 대표가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그는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솔직히 오신다고 하셔서 조금 뜻밖이었습니다. 사실 시나리오가 너무 좋아서 우리 희준이가 계속 저한테 어떻게 되고 있냐고 물어보다가 얼마 전에 안 될 것 같다고 연락 주셔서 저도 실망했고 우리 희준이는 뭐... 너무 실망하더라구요. 그걸 보고서 ‘이 친구가 정말 하고 싶었나보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안타까웠죠.”

“사정 여하를 떠나서 이렇게 급작스럽게 찾아 봬서 참 죄송스럽네요.”

“아유, 그런 말씀 마십쇼. 중간 과정이야 어찌됐든 결과만 좋으면 되는 거잖습니까? 관객들이야 영화를 보지 영화 만드는 과정을 보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럼 희준 씨도 괜찮게 생각하신다는거죠?”

명진이 못 참고 나서니 조일상 대표는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희준이가 무슨 대한민국 톱스타도 아니고 캐스팅이 얽혔다 자신에게 돌아오면 좋다고 받아 들일 놈입니다. 걘 작품만 봐요. 다른건 보지 않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네요.”

“희준이가 감독님 오신다고 해서 바로 올라오는 중이라고 해요. 태안에서 낚시 하다가 놀라서 달려오고 있습니다. 아, 내 정신 좀 봐. 차도 안 내드렸네. 커피 드릴까요? 아니면 녹차로...?”

“그것보다 소속 배우 프로필 파일 좀 볼 수 있을까요?”

“제가 말씀드려야 하는데 먼저 이렇게 말씀해주시니 진짜 감동입니다. 조연급 연기자 보시려고 그러시죠?”

그는 유명진 감독을 힐낏거리며 물었다.

아무래도 유명진 감독 작품 때문에 물어본 거라고 생각했나보다.

“아니요, 저도 준비하고 있는 작품이 있어서...”

“아, 그러신가요? 여깄습니다. 보시죠.”

동훈은 그가 건네준 소속 배우 프로필 파일을 하나씩 넘겨가며 살펴보았다.

“감독님, 거긴 단역 배우... 이쪽을 보셔야...”

조일상 대표가 파일을 넘겨주려고 하자 동훈이 펼쳐져 있던 페이지를 고정하곤 말했다.

“단역이에요? 배우 지망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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