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한 걸음 더(2)
이게 제목만 들으면 조금 구릴수도 있겠지만 그 ‘동네 아저씨’가 펼치는 액션을 보면 조금 구린듯한 그 제목이 더 임팩트가 있게 느껴진다고 자신했다.
동훈은 집으로 돌아와 트리트먼트부터 쓰기 시작했다.
각본은 액션영화로서는 더 손을 댈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었기에 굳이 자신의 생각을 더할 필요가 없었다.
이 작품에서 중요한건 주인공의 액션과 카리스마를 제대로 뿜어낼 수 있는 배역을 어떻게 캐스팅 할 것인가와 무술감독과 스턴트팀의 실력이다.
이 두 가지만 확실히 보장된다면 최소 망하지는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있었다.
*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벌써 설을 보내고 한강의 괴물 개봉을 앞두고 있었다.
언론시사회와 VIP사사회의 반응도 좋았고 어제 열렸던 유료시사회를 통해 영화를 미리 본 관객들은 연신 호평을 쏟아냈다.
당연히 DH 미디어 식구들은 물론이고 배급사인 빛그림도 흥분하며 개봉일만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는 애니메이션 2편이 박스오피스에서 나란히 1, 2위를 하고 있었고 얼마 전에 개봉했던 블록버스터 액션영화는 소리소문없이 주저앉고 있는 상황.
개봉 당일 확보한 스크린 숫자는 820개로 결코 많다고는 할 수 없는 숫자였지만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런 와중에 회사에서 가장 한가하게 여유를 뽐내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장동훈 대표였다.
개봉 준비 때문에 정신없을 이는 양호민 감독이지 그가 아니었고 프리 프로덕션을 마무리하고 크랭크인을 앞둔 명진은 똥싸기도 힘들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지만 동훈은 ‘동네 아저씨(가제)’의 각본을 마무리하고 느긋하게 사우나 투어나 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도 사우나에서 낮잠을 자고 있을 때 누가 자신의 어깨를 툭툭 두드림을 느꼈다
“으음...”
부스스 눈을 뜨며 어두운 조명 아래 자신을 깨운 이가 누군지 살펴보니 명진이었다.
“일어나세요.”
요즘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자신을 찾지 않는걸 알기에 동훈은 아무말 없이 그를 따라 수면실을 나갔다.
시원한 식혜 두 개를 가지고 와 자리에 앉으며 물었다.
“여기 어떻게 찾았냐?”
“감독님 가시는데야 뻔하죠. 요즘 너무 저한테 무심하신거 아닙니까?”
“네가 알아서 잘 하니까 그렇지. 그리고 내가 너무 나서면 현장에서 네 위신이 깍여서 안 돼. 난 그냥 제작에만 참여하는게 네가 현장에서 배우들이랑 스탭들 통솔하기에도 좋아.”
“그건 그렇지만 상업영화를 처음 연출하다보니까 긴장되고 뭘 해야할지 모르겠고, 하여튼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지은 팀장이 실력 있는 조감독이랑 스태프들 다 붙여줬잖아. 어지간한 행정처리는 회사에서 다 처리해주지. 넌 그냥 잘 찍기만 하면 돼.”
“그건 알지만...”
동훈은 명진이 씁쓸한 얼굴로 식혜를 들이키는 걸 보다가 물었다.
“그런데 왜 찾아왔어?”
단순히 넋두리나 하려고 찾아오지는 않았을거라 생각했다.
그럴만한 성격인지를 떠나서 아무 이유없이 사우나를 찾아올만큼 명진은 한가하지 않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다른게 아니라 JS엔터에서 캐스팅을 뒤집겠답니다.”
“뭔소리야? 내일 도장 찍고 바로 대본리딩 하는거 아니었어?”
동훈은 황당한 얼굴로 물었다.
이번 명진의 입봉작이 될 ‘건출학 원론’은 모든 부분에서 순조롭게 진행됐지만 딱 하나, 주연급 남자 캐스팅이 문제였다.
일단 주연급 여주로 임현주가 낙찰되고 시작하자 모든 연예 기사들이 잔뜩 기대감을 담는 기사를 올려주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상대역이 되야 할 남자배우들이 한발씩 빼기 시작한 거였다.
이유는 몇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현주가 여주가 된 이상 어지간해서는 극의 중심이 현주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 예상되는 바였고 그게 마음에 안 들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어지간한 남자 배우는 발 아래로 보는 그녀의 도도하면서도 조금 심할땐 안하무인처럼 구는 그녀의 성격 때문에 참여를 기피하는 거였다.
물론 어지간한 미니 주연급 남자배우들은 얼씨구나 하겠지만 명진이는 이번 작품에 임현주가 참여한 만큼 상대배우도 현주 급 톱스타이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을 이루어주기 위해 유지은 팀장이 상당히 고생했지만 시간만 지체될 뿐 이러다 촬영일정까지 밀려 버릴 것 같기에 결국 명진은 마음을 돌리고 급을 낮춰서 캐스팅 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 상대가 바로 JS엔터의 박태준이었다.
훨칠한 키에 꽃미남 같은 얼굴로 한 순간에 여성들의 마음을 휘어잡으며 등장한 그는 단번에 미니시리즈 남주급으로 올라섰지만 그 이상의 포스를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은 몇 개의 카드를 가지고 계속 고민하다 결국 캐스팅 미팅을 가지고 서로간에 합의를 가진 후 내일 도장을 찍기로 했었는데...
“그랬는데 아무래도 힘들 것 같다고... 자기랑 안 맞는 것 같다고 하면서 말을 바꿨습니다.”
“아이고... 내가 너 걔한테 집착하지 말라고 했지?”
사실 동훈은 처음부터 박태준이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일단 현주와 비교하기에도 너무 어려보였고 서른 넘는 건축사무소의 대표를 연기하기에 내공도 딸린다고 보았다.
특히 남주와 여주 둘 다 너무 예쁘고 잘생긴 것도 몰입감을 떨어뜨린다고 봤지만 일단 박태준은 연기력이나 포스에서 현주에게 잡아먹힐 거라고 봤기 때문이다.
로맨스는 남주와 여주 같이 살아야 좋은 작품이 나온다고 믿었기에 박태준은 처음부터 그리 마음에 드는 선택사항이 아니었지만 캐스팅에 적극 관여하고 나가면 너무 개입하는 것 같아 참았었다.
반면 이 캐스팅을 적극 찬성한 이들은 동훈을 제외한 사무실 직원들 거의 전부.
여직원들은 박태준의 이름이 거론된 순간부터 환호성을 지르며 적극 찬성했고 명진이도 박태준이면 괜찮겠다고 생각했던거다.
뭐, 이런저런 예감을 떠나 전혀 다른 쪽으로 일이 터지긴 했지만...
“이렇게 될 줄은 몰랐죠.”
“나가자, 크랭크인 날짜까지 다 잡았는데 이렇게 가만히 있을수 없잖아.”
“찾아가시게요?”
“방법 있어? 되돌려 봐야지.”
지금부터 다른 배우를 찾는다고 하면 적어도 보름에서 한 달은 소요될 게 분명했다.
문제는 이미 촬영 일정에 맞춰 장비 대여, 로케이션 섭외 등 모든 준비를 끝내놓은 상태였다는 거다.
일정이 보름 이상 뒤로 미뤄지면 제작비는 천정부지로 뛰어 오를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죽이 되는 밥이 되든 박태준으로 끌고 가야 했다.
동훈은 유 팀장에게 JS엔터로 간다고 말해놓고 옷을 챙겨입고는 명진이와 함께 곧장 청담동으로 향했다.
“DH미디어에서 왔는데요.”
“아, 3층으로 올라가시겠어요?”
다행히 유 팀장이 말해놓았는지 입구에서는 쉽게 통과되었다.
올라가서도 미리 직원이 나와 빈 회의실까지 자연스럽게 안내해주었다.
잠시 후...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언제 한번은 뵙고 싶었는데 이렇게 뵙게 될줄은 몰랐네요. 한종혁입니다.”
“아, 네. 장동훈입니다.”
그가 건네준 명함을 받아보니 직위가 대표라고 되어 있었다.
대표라면 세연의 남자친구가 맞을 거다.
그는 명진이와도 웃으며 인사하더니 호들갑스럽게 차를 대접한다 어쩐다 하면서 한동한 부산을 떨었다.
인상이 선해보여 오늘 이야기도 어쩌면 잘 풀리지 않을까 기대감을 가지게 했다.
아이스 커피가 한 잔씩 앞에 놓여지자 동훈은 여기 온 목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시겠지만 박태준 씨의 캐스팅이 어그러져서 우리가 무척 곤란해진 상황입니다. 막판에 윤진솔과 캐스팅을 조율하다가 최종적으로 합의한 상태에서 갑자기 취소하시면 촬영 일정이 모두 어긋나게 되는지라 다시 생각해주시면 어떨지 하는데요.”
잔뜩 기대를 가지고 한 이야기였지만 한종혁은 무척이나 안타깝다는 얼굴로 바람을 저버렸다.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DH미디어의 사정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아티스트의 성장과 커리어에 문제가 될만한 어떤한 것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 오해하지 마세요. 유명진 감독님의 작품이 그런 작품이라는게 아닙니다. 단지 박태준 씨가 하기에는 캐릭터가 너무 어렵고 임현주 씨와의 호흡도 썩 맞을 것 같지가 않거든요.”
앞 부분에서 기분이 나쁘긴 했지만 뒷 부분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 뭐라 대답하기에도 애매했다.
“그렇다면 애초부터 캐스팅을 거절했어야 하지 않을까요? 왜 크랭크인을 앞두고...”
“실은 박태준 씨는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고 하더라구요. 그런데 우리 용 실장이 극구 밀어붙여서... 만약 제가 그 미팅을 갔었다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텐데 하필 그날 또 해외출장이 겹치는 바람에 이렇게 됐습니다. 이거 참 죄송해서...”
머리를 긁적이며 사죄하는데 그저 한숨만 푹푹 나왔다.
계약서 도장을 찍기 전이었기에 강압적으로 뭐라 해서 될 일은 아니었다.
공료롭게도 얼마 전에 유병제 감독과 합의했었던 현주를 가져온 상황을 고대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죄 짓고는 못 산다고 했나 보다.
물론 그 상황은 전혀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지만 지금 상황이 딱 벌을 받는 모양새다.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 JS엔터는 언제든지 DH미디어와 함께 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이번 일로 저희를 안 좋게 보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아, 네 뭐...”
뻘소리에 대답도 대충하고 회사를 나오는데 명진이 씩씩거리며 투덜거렸다.
“그 대표라는 한종혁인가 하는 놈, 왜 이렇게 재수가 없죠?”
“사실 나도 좀 그렇더라.”
“처음부터 하는 말이... 뭐? 배우의 성장과 커리어에 문제가 될 작품은 하고 싶지가 않다고? 완전히 면전에서 까는거 아닙니까?”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말했으면 진짜 나쁜 놈인데. 모르겠다. 진짜 그런 의도로 말했는지.”
“생긴건 허여멀건하게 생겨가지고는...”
허탈한 마음으로 정문을 나오는데 마침 들어오는 사람과 어깨를 부집쳤다.
“어이쿠!”
“아휴, 괜찮으세요? 죄송합니다. 제가 급해서 못봤습니다. 어디 다치신데는 없으세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는데 어깨를 부딪친 사람을 보니 익히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어? 강민재 씨 맞죠?”
“네, 그렇습니다. 알아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는 그는 요새 한참 아침드라마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남자 배우였다.
선이 굵은 미남이라 어딜 가나 눈에 확 띠는 외모였다.
그런데 눈치를 보니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연예인인 자신을 알아봐주는 것에 그저 감사하는 얼굴이다.
“반가워요, 나 장동훈 감독이라고 해요. 민재 씨 나오는 드라마 종종 보고 있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닌게 아침이 일어나기 힘들어 늘 TV 키는데 딱 그시간에 그가 나오는 드라마가 하는 시간이었다.
내용은 잘 몰라도 종종 드라마를 본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어? 장동훈 감독님? 아이고 전 몰라봤습니다. 그러고 보니 전에 기사 봤을 때 딱 이 얼굴이셨는데 제가 왜 몰라봤을까요? 아이고 바보 같네요.”
“그럴 수 있죠.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세요? JS엔터 소속이세요?”
“네? 아니 그런게 아니라...”
그는 잠시 주춤하면서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재계약 관련해서 이야기를 나누려고 왔습니다. 하하.”
이 정도까지만 해도 대충 알 것 같았다.
아마도 회사에서 재계약을 안 해준다고 했나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그는 한창 아침드라마에 나오는 배우인데 왜 그와 재계약을 해주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어쨌거나 처음만난 사람이랑 회사 정문 앞에 서서 그런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그만 헤어져야 할 듯 싶었다.
“그러시구나. 잘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돌아서려는 찰나, 동훈은 다시 뒤를 돌아 그에게 말했다.
“그런데 혹시 드라마 끝나시고 스케줄 있으신가요?”
“네?”
“보니까 그 아침 드라마 거의 끝나가는 걸로 알고 있는데 혹시 다음 작품 잡히신거 있으신가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