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한 걸음 더(1)
[DH 미디어 신인 여배우 신은정 영입]
[연예 매니지먼트까지 넘보려는 DH 미디어의 야심찬 행보]
DH 미디어에서 신은정을 영입하면서 뿌린 보도자료에 매니지먼트 회사들은 일제히 신경을 곤두세웠다.
외부에 자신들의 불편한 심경을 내비치지는 않았지만, 그들이 이 상황을 불편해하는 것은 분명했다.
특히 은정을 내심 차세대 톱스타로 생각하며 영입하려 했었던 JS엔터테인먼트는 황당함을 금치 못했다.
“얘 이거 뭐야? 지금까지 여기 들어가려고 그렇게 거절했던거야?”
한종혁은 황당한 얼굴로 세연에게 물었지만 그녀라고 은정의 마음을 다 알 수는 없었다.
워낙 자기 속을 내보이지 않던 동생이었기에 세연도 이번 결정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세연은 어깨를 으쓱하며 팔짱을 꼈다.
“나도 모르지. 걔가 언제 나한테 이런거 할 때 물어보고 하는 애는 아니잖아.”
“그래도 아무 낌새도 없지는 않았을거 아니야? 하다못해 어느 소속사가 좋은지 물어보지도 않았어?”
“전혀. 그런데 난 오빠가 더 이상해. 왜 그렇게 은정이 데리고 오려고 해?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은정이가 오빠 별로 안 좋아하는거 알잖아. 너무 피곤하지 않겠어?”
종혁은 순간 멈칫했지만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피곤하긴... 네 동생이니까 그렇지. 솔직히 이 바닥 얼마나 더러워? 넌 모르겠지만 작품 넣겠다고 술자리 동원하는건 이야깃거리도 안 되는 곳이 여기야. 그런데 이상한데 가서 괜히 안 좋을 일 당할까 봐 그러지.”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난 오빠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런데 은정이 걔는 어지간한 남자들 찜쪄먹을 만큼 간덩이가 커서 그런데 가서도 술자리 엎고 나올걸? 안 봐도 뻔하지.”
“에이... 걔 나이가 몇인데 그러려고?”
“걔 성격 나보다 더 해. 내 성격 알잖아?”
“큼... 뭐 그렇다면야...”
“나 촬영 있어서 이만 가볼게.”
“어, 내가 이따가 데리러 갈게. 오늘 하야트 호텔 레스토랑 예약해놨으니까 저녁 맛있게 먹자.”
“촬영 일찍 끝나면.”
세연이 나가고 난 뒤 종혁의 얼굴은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런 씨발...”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그는 급기야 자신의 옆에 놓인 유리잔을 들어 벽에 던졌다.
팍!
유리잔이 박살이 나자 그 소리를 듣고 밖에 있던 여직원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야, 이거 치우고 정윤철 전무 불러와.”
여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빨리 움직였다.
“네.”
잠시 후, 한눈에 봐도 쉰은 넘어 보이는 장년의 남자가 헐레벌떡 들어왔다.
“왜 이렇게 늦게 와?”
“죄송합니다.”
남자는 자신보다 한참 어린 종혁의 하대에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내가 신은정한테 접촉하는 회사 계속 체크하라고 했었지? 기사 봤어?”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이게 그렇게 어려워? 이것도 못 할 거면 그냥 일 때려쳐. 다른 일 구하면 될 거 아니야. 어?”
“죄송합니다. 은정 양이 설마 영화 제작사와 전속계약을 맺을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 이건 저뿐만 아니라 업계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종혁은 땀을 뻘뻘 흘리며 대답하는 정윤철 전무의 말을 끊었다.
“씨발, 변명은 진짜... 이봐요, 정윤철 전무님. 당신 연봉이 얼만 줄 알아? 남들 다 하는 일 하라고 우리가 그 돈 주는 거냐고? 남들 못하는 일 하라고 돈 주는거 아니야? 그럼 씨발 일을 제대로 처리 하셔야지요. 내 말이 틀렸어요?”
“죄송합니다.”
종혁은 고개를 숙이는 정윤철 전무의 벗겨진 머리를 한참 동안 노려보다가 말했다.
“가서 은정이 계약이 어떻게 된건지 확인하고 보고해. 계약 기간, 계약금, 계약 조건 싹 다 알아와.”
“알겠습니다.”
“나가.”
정윤철 전무가 나가자 종혁은 홀로 분노를 삭히며 중얼거렸다.
“병신 새끼들...”
*
한강의 괴물 개봉이 차근차근 진행되면서 동훈이 손대야 할 일은 점점 줄어들었다.
후반기 작업이 끝내고 각 나라 배급사에서 요구한 편집은 양호민 감독이 전담하고 있었다.
또한 명진이 준비 중인 영화 역시 각본에 도움을 주긴 했지만 뼈대를 세워주고 영감을 주었을 뿐, 전체적인 각본을 완성하는건 오롯히 명진이 할 일이었다.
한결 여유가 생겼기에 동훈은 이제 자신의 차기작을 준비하는데 에너지를 다 쓸 수 있게 됐다.
어떤 작품을 할지는 지금도 고민이 많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많은데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야 할지 하나를 딱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건 연속된 성공으로 인한 부담감 때문이기도 했다.
6급 공무원부터 악질형사까지 세 편을 연달아 성공시켰고, 또 이번 악질형사는 천만을 넘겨버렸으니 주변에서 보는 시선에는 기대감이 넘쳐 부담스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알고 그것을 꺼내보인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기대하면 부담스러워서 무슨 말을 꺼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액션? 스릴러? 멜로는 아니지?”
양호민 감독의 물음에 동훈은 애매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정하는 중입니다.”
“장르만이라도 말해봐. 뭔데?”
“액션이 될 것 같긴 한데...”
“액션? 총이 나오는 액션? 아니면 칼? 아니면 대하사극?”
“사극은 좀 어려울 것 같아서...”
“하긴 사극은 준비할 것도 많고 복잡하니까. 고증 잘못하면 욕도 드럽게 많이 처먹잖아. 감독이 창의력을 발휘하기 힘들지. 그런 면에서 사극은 너랑 안 맞긴 하겠다.”
처음 만날때만 해도 동훈을 못 미덥게 생각하던 양호민 감독은 이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면전에서 칭찬에 여념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만 한게 누구도 제작해주지 않겠다던 작품을 계약해서 해외 126개국 선판매를 확정 짓고 개봉을 기다리고 있으니 은인이나 다름없기는 했다.
그래도 받는입장에서는 한참 선배가 이렇게 칭찬해주면 어색하고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긴 했다.
“하하, 그런가요?”
“그럼 현실 액션 영화야?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데? 그래도 대략적인 뼈대는 그리고 있으니까 말을 꺼냈을거 아니야?”
“아직은 그냥 어렴풋한 수준이에요.”
“그러다가 며칠 만에 각본 만들어오는거 아니야?”
“하하하, 설마 그러려구요.”
이때 회의실로 유지은 팀장이 들어왔다.
“양 감독님, 우리 대표님 그만 괴롭히고 가서 우리 애들 좀 도와주세요.”
“응? 내가 언제 장 대표 괴롭혔다고 그래?”
“감독님은 못 느끼시겠지만 전 괴롭히는 걸로 보여요. 그리고 유명진 감독 오디션 일정 잡는 것도 좀 도와주시구요. 로케이션 헌팅 스케줄 잡는것도 계속 미뤄지고 있는거 아시죠?”
“그건 지가 알아서 할 일이지...”
“후배잖아요. 입봉 준비한다고 얼마나 떨리고 정신없겠어요? 좀 도와주세요.”
“알겠어. 아유, 난 회사에서 유 팀장이 제일 무서워.”
“전혀 아닌 것 같거든요?”
영화가 잘 되가서 그런지 양호민 감독도 처음 날선 분위기가 많이 죽어서 유 팀장과도 티격태격하며 잘 지냈다.
양 감독이 나가자 유지은 팀장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기자들이 계속 물어와요. 신은정 씨랑 전속 계약하면서 앞으로 누굴 더 영입할 생각인지 말이에요.”
“그건 아직 생각해본적 없는데요?”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이런 문의가 자꾸 온다는건 그만큼 이제 우리 회사를 많이 주목하고 있다는 뜻일 거예요. 그런데 전 영화 만드는 일을 거드는 건 자신있지만 배우들 관리하는 건 재주가 없어요. 이것도 전문가가 필요한 일이라구요.”
“그래서 괜찮은 인재 스카웃 하려고 이미 의뢰했잖아요.”
이미 은정을 영입하기 전에 헤드헌팅 회사를 통해 괜찮은 능력을 지닌 매니저를 찾는 중이었다.
단순히 정해진 스케줄에 맞춰 운전해주는 로드 매니저가 아니라 배우들의 컨디션부터 체중, 연기력, 스케줄까지 모두 관리해줄 수 있는 전문가를 구하는 거였다.
“그건 알죠. 그런데 대표님은 가장 위에서 감독할 사람만 구했잖아요. 헤어 메이크업이랑 로드매니저, 의상 코디네이터까지 다 준비해야 해요.”
“그건 나중에 총괄매니저가 입사하고나서 천천히 구하면... 늦을까요?”
“은정 씨 스케줄이 없다면 몰라도 그건 곤란해요. 한강의 괴물 배급 앞두고 잡지사 미팅이랑 각종 예능 출연 섭외를 다 혼자서 받고 처리하더라구요.”
“그래요? 벌써 그렇게 섭외 전화가 온대요?”
은정이가 말하지 않았기에 그녀에게 오는 섭외 연락이 그토록 많을지 전혀 몰랐다.
“네. 매니저가 없어서 혼자 연락을 받는다고 하는데 그거 듣고 어찌나 황당하던지... 작가와 출연료 논의까지 혼자 다 했대요.”
“와... 장난 아니네. 그런데 TV에서는 거의 못 본거 같은데?”
“이미 몇 개 촬영해서 방영날짜 잡혔대요. 찍자 마자 바로 나오는건 아니니까요.”
“아... 그럼 당장 준비할게 많겠네.”
“내말이 그 말이에요. 그래서 일단 필요한 인력을 찾아보고 있는데 대표님이 결제를 해줘야 채용을 할 수 있어요.”
“그럼 당연히 해줘야죠.”
동훈은 서둘러 유 팀장이 내민 서류에 싸인하고 재차 물었다.
“당장 세 명이면 되는 겁니까?”
“일단 그 정도면 되구요. 거기 밑에 보시면 차량 렌트에 관한 것도 있어요. 국산 SUV 렌트할거구요. 나중에 은정 씨가 톱스타가 되면 차량을 바꿔주든지 하는 걸로 할게요.”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당분간 은정 씨 스케줄은 대표님께서 관리하셔야 할 것 같아요.”
“내가요?”
“지금 가장 한가한 사람이 대표님 밖에 없어요. 대표님 차기작은 스케줄 조정 해주면서도 가능하실 거예요. 은정 씨 로드를 하는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제가 할 수는 없잖아요?”
생각해보니 회사내에서 워드 프로그램을 열어놓고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빈둥거리는 이는 자신 밖에 없었다.
물론 차기작을 구상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가장 널널한건 맞았다.
“알겠어요. 그렇게 힘들 것 같지도 않고...”
앉아서 전화만 받고 스케줄만 정리해주면 끝일 것 같아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막상 은정의 전화를 대신 받기 시작한 이후 그게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다는걸 깨달았다.
“어디시라구요? 아... 네. 그런데 죄송하지만 그때는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능은 아직 준비하고 있지 않아서요. 죄송합니다.”
“복면가수요? 하하, 아닙니다. 우리 은정이는 아직 노래를... 부르는 거 보셨냐구요? 그건 아니긴 한데... 죄송합니다. 네. 그리고 앞으로 스케줄 관한 연락은 이 번호가 아니라 저희 DH 미디어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맥심 좋죠. 저도 맥심 좋아합니다. 그럼 CF... 가 아니라 잡지 맥심이요? 아유 죄송합니다. 우리 은정이는 그런거 안 찍습니다. 네~”
하루에도 수십통의 연락이 오는데 대부분 그녀와 어울리지 않거나 쓸데없는 연락들이었다.
아마 대형 매니지먼트였다면 애당초 연락도 하지 않았을텐데 지금까지 그녀가 홀로 스케줄을 관리한다는걸 알고 있었으니 별 쓸데없는 연락까지 다 오는 거였다.
기사를 보고 분명히 소속사가 정해졌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도 연락이 오는걸 보면 보통 집요한게 아니었다.
어쨌거나 은정의 스케줄을 관리하며 시간을 보내다 결국 쓸데없이 시간만 잡아먹으며 고민만 하지 말고 작품을 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음 작품이 꼭 천만을 넘길 대작이 아니면 어떤가?
찍는 자신이 재밌고 보는 관객이 좋아하는 영화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었다.
마침 은정의 스케줄을 관리할 총괄매니저의 입사를 확정짓고 난 다음이었다.
“그래서 뭘 하기로 하셨는데요?”
은정은 잡지사와 화보촬영 및 인터뷰를 마치자 마자 사무실로 들어와 떡하니 족발을 시켜놓고는 오물오물 맛있게 먹으며 물었다.
“응? 아, 다음작품? 액션영화.”
“악질형사 같은거?”
“그건 액션영화라고 하기엔 부족해. 그냥 활극같은거지.”
“그럼요?”
“조금 잔인하면서도 통쾌한 그런 영화.”
“제목이 뭔데요?”
동훈은 은정의 눈치를 살짝 보고 말했다.
“동네 아저씨. 어때 죽이지?”
“그게 제목이에요? 뭐야 그게? 액션영화 제목이 아니라 에로영화 제목 아니에요? 하여튼 감독님은 제목 센스가...”
은정의 똥씹은 듯 한 눈빛을 보곤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