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첫 사랑 그 느낌(3)
유병세 감독은 처음 강석호 감독에게서 연락을 받았을 때 너무 황당해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신나서 고자질하는 강석호 감독의 말에 어찌나 열이 뻗치던지...
“이거 진짜죠? 확실한거죠?”
“아, 그렇다니까. 내가 현주랑 직접 얘기한거라고. 직접...”
“후... 알겠어요. 그만 끊어봐요.”
“응, 그래. 일 잘 처리하고~”
사실 이런 경우가 아주 드믄 일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계약서에 도장 찍기 전까지 무슨 일이든 벌어질 수 있는 곳이 이 바닥 아니던가?
그럼에도 너무 당황스러웠던건 자신의 위치(?)에서 이런 일을 당할줄 몰랐기 때문이다.
상대가 임현주라서 그렇지 그녀보다 조금 떨어지는... 그러니까 어지간한 미니시리즈 여주 정도였다면 감히 자신의 뒤통수를 때리는 짓을 결코 하지 못했을거다.
“안녕하세요, 유 감독님.”
한참 동안 신호음이 울리다 고 대표가 전화를 받았다.
유병세 감독은 언제나처럼 반갑게 인사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오늘따라 너무도 얄밉게 들렸다.
“안녕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그럴수가 없네요. 방금 너무 황당한 이야기를 들어서 말이죠.”
“아... 저도 우리 현주한테 말 들었어요.”
모른척해서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고 대표는 말을 꺼내자마자 바로 토설한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니, 제가 얼마 전에 박대진 상무님이랑 통화까지 했는데 박 상무님은 전혀 모른다고 하셨거든요. 그냥 모른척 하신 겁니까? 아니, 혹시 저랑 식사하실때부터 이야기가 오간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감독님. 박 상무는 전혀 몰랐던 일이고 사실 저도 박 상무가 감독님이랑 통화하기 바로 전날에 알았던 거였어요.”
“도대체 어떻게 된 상황입니까? 그거나 좀 압시다.”
무작정 화만 낸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니 일단 자초지종이라도 듣고자 했다.
“감독님께서 우리 박 상무랑 통화하기 이틀 전에 트리트먼트가 왔어요. 딱 임현주에게만 간 거긴 하지만 그게 장동훈 감독 작품으로 간게 아니라 유명진 감독 연출로 써 있어서 처음에 현주는 그게 DH 미디어 제작인지도 몰랐어요. 그런데 트리트먼트를 읽어본 현주가 마음에 들어서 알아본 거고 그게 DH 미디어 작품라고 알았을 정도로 그냥 우연히 일이 그렇게 진행된 거랍니다. 절대 감독님을 속이려고 그렇게 된 게 아니에요.”
또, 또, 그놈의 장동훈 타령이다.
그것도 장동훈 감독이 연출한 것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놈의 연출작에 밀려버렸다는게 더 짜증났다.
“유... 누구요?”
“유명진 감독이라고... 저도 잘은 몰랐는데 예전에 에로영화 연출을 하다가 장동훈 감독이 데려와서 조감독으로 썼나 봐요.”
“에로영화요?”
미친새끼...
미치지 않고서야 에로영화나 만들던 놈을 조감독으로 쓴다는게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인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게 분명했지만, 더욱 분한건 에로영화나 만들던 새끼한테 밀렸다는 거였다.
“저도 잘은 몰라요. 그냥 건너건너 그렇게 듣긴 했거든요.”
북한에서 온 간첩도 아니고 뭘 건너건너 들었겠는가?
고은숙 대표가 얼마나 여우인지 다 알고 있기에 이미 알아볼만큼 다 알아봤을 것이 분명했다.
그냥 자신의 기분이 최대한 상하지 않게끔 말하려고 하는거다.
“어쨌든 에로영화 만든던 새끼... 아니, 에로영화 만들던 감독이 이번에 입봉작으로 준비하는 트리트먼트 때문에 지금 절 깠다는 말입니까? 정리해보면 그런 거네요? 그쵸?”
“아휴, 감독님. 너무 빡빡하시다. 사실 각본을 누가 쓰던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요? 저야 감독님과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하니까 어떡해서든 감독님과 같이하고 싶지만, 현주는 그냥 각본이 재밌으니까 조금 더 알고 싶어서 그랬던건데.”
“아니, 그게 변명이 됩니까?”
유병세 감독이 목소리를 높아지 잠시 수화기 너머로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 조금 싸늘해진 목소리로 고 대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감독님, 이거 하나만 분명히 할게요. 내가 감독님한테 변명을 해야 하는 위치는 아닌거 아시죠?”
“아니, 말이 좀 잘못 나왔는데, 그게 아니라...”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구두로 합의를 본 건 맞지만 그렇게 구두로 합의본 사항이 전부 도장까지 찍게 되던가요? 도장을 찍어야 진짜 계약이지, 안 그래요?”
“그건 그렇지만 이건 너무하잖습니까?”
“너무하다... 좋아요. 그럼 전에 영화 찍으실 때 우리 석민이 조연으로 캐스팅 하신다고 장담해놓고 나중에 왜 말 바꾸셨어요?”
유 감독은 말이 길어질수록 할 말이 없어지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는 제가 싫어서 그런게 아닌거 아시잖습니까?”
“맞아요. 투자자가 배우 하나 꽂으라고 했던거 아니까 저도 그냥 넘어갔던 거예요.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이 바뀔 수도 있고 환경이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이해하고 넘어갔던 거라구요. 그런데 상황이 바뀌었다고 이렇게 흥분하시면 저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요?”
“그건 그렇죠.”
“그러니까 진정하시구요. 설사 우리가 했던 말이 달라지더라도 여유를 가지고 다른 배우 천천히 물색하시는게 좋을 것 같아요. 앞으로 WAS엔터 배우 아예 안 쓸거 아니잖아요? 그리고 우리 회사 배우들도 감독님처럼 유능한 사람하고 같이 일할 수 있는 기회 만들면 좋은 거구요.”
이렇게 되니 여기서 더 열을 냈다간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낼 것임을 알기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네. 알겠습니다.”
“미안해요, 감독님. 언제 밥이라도 살게요.”
“네.”
“그럼 들어가세요.”
고 대표는 깔끔하고 담백하게 전화를 끊었고 유 감독은 멍하니 끊어진 전화기를 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하... 씨발... 까여도 씨발 에로영화 하던 새끼한테 까였네.”
나중에 에로영화 하던 감독한테 임현주를 뺐겼다는 말이 나오면...
정말 생각도 하기 싫어졌다.
DH 미디어가 망해야 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
“뭐래요?”
고개를 슬그머니 내밀어 물어보는 현주를 보며 고 대표는 다시 한번 열불이 치밀어오르는 걸 느꼈다.
“뭘 뭐래? 온갖 짜증을 다 내지. 어이구... 저 화상.”
“그래도 잘 넘어간 거 같은데?”
“어쩌겠어? 지가 여기 와서 불을 지를거야? 어쩔거야? 계약서도 안 썼는데 그냥 넘어가야지.”
현주는 고 대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내말이...”
“너! 이번에도 말 뒤집으면 진짜 계약이고 뭐고 확 짤라버릴줄 알아.”
고 대표의 엄포에도 현주는 상황이 다 정리되자 다시금 평소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서 또 딴소리하면 진짜 미친년이지. 장동훈 감독... 아니다. 이제 대표지? 장 대표한테 약속 잡자고 말해놨거든요?”
“얼씨구? 지가 뭔데 직접 전화해서 약속을 잡고 지랄이야?”
“나 정도면 다이렉트로 연락해도 민폐는 아니잖아?”
고 대표는 혼잣말로 욕설을 중얼거렸지만, 현주의 말이 틀린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짜증이 나기도 했다.
“좋겠다. 예뻐서... 그 지랄을 해도 다 봐주고.”
“히힛! 그렇긴 해. 어쨌든 대표님~ 나 이번 거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뭔 생각?”
“내가 뭐 아무 생각도 없이 장 대표한테 전화해서 약속 잡자고 했겠어요? 내가 아침에 딱 일어나서 샤워하면서 계속 생각을 해봤는데 이번 작품 느낌이 너무 좋은거 있죠? 그 어릴 때 첫사랑이 세월이 흐르고 결혼을 바라봐야 하는 서른을 넘어서 딱 마주쳤을 때, 당시에 있었던 오해와 엇갈림을 표현하는 느낌이 너무 좋은 거야.”
고 대표는 ‘지랄한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러니?”
“응, 유 감독 작품도 나쁜건 아니었는데 사실 예전에도 그런 작품들이 있어서 좋긴 하면서도 막 가슴이 간질거리고 새로운 느낌은 없었거든. 그런데 이건 묘하게 가슴을 간질거리는 뭔가가 있다니까요.”
“난 복장이 터지는데 넌 간질거렸구나. 그래, 후...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반주 한잔 해야 속이 풀리겠다.”
“어머, 대표님 술 좀 줄이세요. 그러다 몸 상해.”
고 대표는 어이가 없었다.
“이년아. 내가 누구 때문에 술을 먹겠니?”
“박 상무님이 요즘도 우리 대표님 힘들게 하나? 으흥~ 내가 좀 혼내줘야겠네.”
현주는 뻔뻔스럽게 지껄이며 명품 샤넬백을 들고 도도하게 대표실을 나갔다.
*
며칠 뒤, 강남의 한 고급중식당에서 미팅을 가졌다.
WAS엔터테인먼트에선 고은숙 대표와 임현주가 자리했고 DH 미디어에서는 동훈과 명진이가 자리했다.
간단한 인사와 함께 음식을 시키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 때 현주가 핸드폰에서 기사 하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천만관객 돌파로 장동훈 감독이 벌어갈 돈은?]
“나도 이게 제일 궁금하더라구요. 얼마나 버셨어요?”
보통 저런 질문은 너무 속물같이 보일까봐 잘 하지 않는데 역시나 말에 거침이 없었다.
“액수를 말하기엔 좀 그렇고, 많이 벌긴 했습니다.”
“좋겠다.”
“시끄러.”
고 대표가 현주의 허벅지를 살짝 꼬집으며 인상을 쓰자 그녀가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뭐, 이해하시죠? 얘가 워낙 가식이 없는 애니까.”
“그게 현주 씨 매력이죠.”
“이해해주세요. 어쨌거나 현주가 각본을 참 인상 깊게 봤나 봐요. 저한테도 몇 번이나 각본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니까. 원래 얘가 작품에 대해서 깊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요.”
“왜 그렇습니까?”
명진이 물어보자 고 대표가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사실 얘 성격이 좀 애 같아요. 뭘 하면 쉽게 좋아했다가 또 쉽게 실증냈다가... 아시죠?”
“아, 네. 그런 분들 있으시죠.”
“남자배우들은 다양한 배역이 들어오는 반면에 여배우들은 대게 캐릭터가 비슷한 것들이에요. 청순가련하거나,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캔디 같거나... 조금 나이가 들면 인생이 고달픈 아줌마가 젊고 잘생긴 남자에게 흔들리는 캐릭터도 많고.”
“맞습니다. 그런 캐릭터들 많죠.”
“그러니까 얘가 어느 순간부터 작품에 대해서 별 말이 없어졌어요. 조금씩 다르긴 해도 다 비슷하긴 하니까. 특히 실력 없는 작가들 특징이 캐릭터가 개성이 없는거. 흥행보증수표같은 작가들 보면 캐릭터가 다 개성 넘치잖아요? 그래서 얘가 전에 박현영 작가에 매달렸던 거예요.”
“아... 그러셨구나.”
“그런데 이번 반응이 박현영 작가나 다른 스타 작가 작품들 볼때처럼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하더라구요. 그만큼 각본이 마음에 들었던 거죠.”
“아유, 감사합니다.”
명진이는 고 대표와 현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해했다.
“우리가 감사해야죠. 좋은 작품 주셨으니까. 실은 현주가 원래 유병세 감독하고 작품을 하기로 약속까지 했었어요. 도장만 안 찍은 상태였는데...”
“유병세 감독하구요?”
동훈은 깜짝 놀랐다.
하필 엮여도 그랑 엮이는 걸 보면 확실히 악연은 악연인 듯 싶었다.
“네. 뭐 복잡하긴 했는데 어쨌든 우리 현주가 확실히 정리했거든요, 그만큼 우리 입장에선 이 작품이 정말 잘 되기를 바라고 있어요. 걱정도 많이 되고...”
고 대표는 말을 흐렸지만 그녀가 말하고 싶은게 뭔지 알고 있었다.
“그거 아십니까? 명진이가 대학 다닐 때 돈이 급해서 학교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는데 마침 당시 에로영화 공모전 눈에 띄었더래요. 그래서 상금만 타보자는 생각에 하나 찍어서 냈는데 바로 대상 받았던 겁니다.”
학교를 그만들 생각을 했다는 말에 명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동훈을 쳐다보았다.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동훈이 황당해서였다.
“어머, 그랬어요?”
“그러니까 에로영화에 뜻이 있었는게 아니라 당시 어쩔 수 없이 그 바닥에 들어가게 됐는데 그만큼 연출에 대한 센스가 있었다는거죠. 사람들이 원하는 것. 보고자 하는 장면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감각이 있는 친구에요. 아마 대한민국에서 현주 씨를 그 누구보다 아름답게 찍어줄 겁니다. 제가 장담할게요.”
현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녀의 입가가 아주 살짝 꿈틀거리는 걸 동훈은 놓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