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첫 사랑 그 느낌(2)
동훈은 흥분하는 명진이에게 그만하라고 손을 들어 말렸다.
일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봐야 했으니까.
“아, 미안해요. 잘 지내셨죠?”
“후훗. 그거 너무 형식적인 질문 아닌가요?”
이 여자는 항상 사람을 당황하게 만드는데 뭐 있는 것 같다.
“하하, 그런가요? 알겠어요. 연락하신 이유가 어떻게 되세요?”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는 이제 대표가 된 동훈에게 직접 연락이 오질 않는다.
회사에 엄연히 캐스팅 디렉터를 채용한 상태라서 캐스팅에 관한 모든 사항은 캐스팅 디렉터가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주에게 전화가 왔을 때 조금 놀랐었던거다.
굳이 자신에게 직접 전화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트리트먼트 보고 고민을 좀 했어요. 감독님 작품이 아니라서 더 고민이 되기도 했구요.”
“네.”
“솔직히 전체적인 각본도 보고 싶은데 그건 안 될 것 같고... 촬영은 언제쯤으로 생각하세요?”
“늦어도 두 달 안에 크랭크인 들어가는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최대한 빨리 찍는 방향으로 하고 있어서요.”
“그렇게 빨리요?”
이게 다 회사에 돈이 빵빵하기 때문이다.
2백억 넘는 자금이 들어왔으니 이번 작품은 투자를 받지 않고 자체적인 자금으로 제작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렇게 되면 일단 투자자와의 협의 때문에 시간과 노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고 중간에 투자자가 캐스팅이나 스토리에 관여할 염려도 없다.
만약 영화가 실패한다면 제작비를 전부 날리는 위험성은 있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투자자에게 돌아갈 상당할 만큼의 수익률을 모조리 챙길 수 있으니 만약 영화가 성공한다면 더더욱 이득이 된다.
이 모든게 악질형사가 성공했기 때문에 할 수 있는거지, 만약 악질형사가 이렇게까지 성공하지 못했다면 결코 이런 모험을 할 수 없었을 거다.
“네. 각본도 절반 정도는 나왔거든요.”
“혹시 감독님도 연출에 도움을 주시거나 그런건...”
“아니에요. 연출은 오로지 유명진 감독이 할 겁니다.”
“네...”
그녀의 불안감의 근원은 이제 입봉 감독인 유명진 감독의 연출력이 과연 어느 정도까지 될지 전혀 알 수 없는데 있었다.
아마 소속사를 통해 유명진 감독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로영화 연출을 했었다고 들었을 테고 심하면 그 영화를 봤을수도 있었다.
당연히 더더욱 신뢰가 가지 않을 것이고 아마 자신이 배우라고 해도 꺼려졌을 거다.
“연출력은 걱정하지 마세요. 재능있는 친구니까.”
동훈의 칭찬에 명진의 입꼬리가 싸악 올라간다.
“흠... 그럼 일단 만나서 이야기 좀 해보고 싶어요.”
“네, 당연하죠. 제가 그럼 캐스팅 디렉터 통해서 일정 잡아보도록...”
임현주는 동훈이 말도 다 끝내기 전에 말했다.
“감독님도 같이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도요?”
“네. 바쁘시지 않으시면 꼭 나와주셨으면 좋겠어요.”
말이 바쁘지 않으면 나와달라는거지만 이 상황에 ‘미안한데 내가 요즘 바빠서 못 나갈 것 같아요’라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솔직히 동훈이 연출하는 영화였다면 임현주가 대단한 스타이긴 해도 꼭 그녀를 고집하지는 않았을 거다.
이제는 감독 자체의 이름값이 올라갔기에 주연 여배우를 누구를 쓰든 큰 상관이 없을것이고 만약 무명의 연기자를 여주로 발탁한다면 오히려 관객의 호기심을 끌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명진이가 연출하는 것이었고 그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일단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명진이의 첫 연출작 주연 여배우가 임현주인 것과 아닌 것의 차이는 너무도 클 테니까.
“네. 일정 조율해서 한번 만납시다.”
“알겠어요. 그럼 그때 뵐게요.”
확실히 위치가 달라졌다는걸 여기서도 느꼈다.
지금까지 현주와 대화하면서 그녀의 말투가 이렇게 고분고분했던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투는 항상 당당했으며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흘러넘쳤다.
조금 심할 때는 사람을 내려다보는 느낌까지 주곤 했다.
그런데 오늘 통화에서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질 못했다.
“한번 보자네.”
“오오! 그럼 된 거 아닙니까?”
“너무 좋아하지 마. 만나서 확신을 받고 싶은 모양이니까. 그리고 다른 배우 캐스팅은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거야?”
“아직 다른 배역은 정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각 소속사에 트리트먼트 돌릴 예정인데 일단 임현주 상대역만 체크해놔서... 그런데 트리트먼트 보면 다른 배역 보고 연락이 올 것 같은데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여튼 알겠어. 일정 잡아보자고.”
*
[‘배신자’, 너무 식상한 패턴의 답습이 아쉽다]
[‘악질형사’에 힘 한번 못 쓴 ‘배신자’의 몰락]
쾅!
“이런 씨발...”
강석호 감독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상을 내리쳤다.
제대로 물 먹었다.
제대로 야심차게 제작한 영화건만 개봉한지 한 달이 넘어가는 악질형사에게 예매율 역전 한 번 못해보고 그대로 스크린에서 내려오고 만 것이다.
최종 관객수는 고작 37만명. 손익부기점인 150만 관객에 턱없이 모자른 관객수였다.
제작사인 ‘플라워 줌’은 이번 영화의 실패로 상당한 손해를 보았고 이제는 아예 자신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전에는 조금 안 되도 ‘다음에 잘 해보자’며 담당 피디가 와서 파이팅도 해주고 했는데 앞으론 그런 기회가 없을 거라는 무언의 싸인이나 다름 없었다.
강석호는 억울했다.
처음 배급 일정을 잡았을 땐 이보다 더 완벽한 타이밍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대작 애니메이션인 ‘진격의 카프리모’를 고려해 한 달도 더 지나 개봉일을 잡았고 당시 그 애니메이션 말고는 눈에 띄는 대작도 없었다.
지나고 보니 그게 맞긴 했다.
지금까지도 악질형사를 제외하고 나머지 영화들은 맥을 못 추는 형국이니 말이다.
겨울 방학을 앞두고 많은 대작이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바로 이 기간에 개봉하면서 배급사와 절묘한 타이밍에 잘 개봉한다고 서로간에 얼마나 격려하고 좋아했던가?
그런데 막상 개봉일정을 확정짓고 난 뒤, 악질형사가 흥행 돌풍을 일으키면서 그와 배급사 둘 다 숨이 턱턱 막혀왔었다.
제발 그만 좀 먹고 떨어지라고 자면서도 기도했지만 결국 악질형사는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기에 이르렀고 자신의 영화인 ‘배신자’는 추풍낙엽처럼 사라져버렸다.
망해도 너무 참혹하게 망했다.
“후...”
강석호 감독은 자신의 방을 물끄러미 둘러보았다.
담배 연기에 쩔은 벽지와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그리고 퀴퀴한 냄새를 풍기는 빨래를 보고 있자니 도저히 갑갑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대충 씻고 집을 나선 그는 곧장 WAS엔터 산하 제작사인 플라워 줌으로 향했다.
제작사에서 단단히 뿔이 났다고는 하지만 자신까지 연락도 안 하고 집에 처박혀 있으면 정말 미래가 없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떡해서든 제작사를 달래서 다음 작품을 찍을 수 있게 해야 했다.
추운 날씨에 가벼운 가을 점퍼만 걸치고 버스에 올라탄 그가 청담동 한 복판에 내린게 오후 3시경이었다.
저 멀리 WAS엔터테인먼트 건물이 보이자 급히 걸어가는 그의 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아무래도 쪽팔리고 미안한 마음이 없을 수 없으니 자연스레 마음이 약해지는 거였다.
그래도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힘차게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WAS엔터 소속사 사무실과 제작사는 한 건물에 있었기에 가끔 배우들을 보기도 했는데 하필 이날따라 엘리베이터에서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 맞부딪쳤다.
“어? 현주 씨.”
“안녕하세요. 강석호 감독님 맞으시죠?”
“반가워요. 얼굴 좋아보이네.”
“요즘 스트레스 많이 받는데 티가 안 나나 봐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쓸데없는 이야기를 줄줄이 늘어놓지 않고 슬쩍 고개를 숙였다.
시선을 피하는 걸 보니 자신과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파악한 강석호 감독은 다시 고개를 돌리려다가 문득 생각난게 있어서 물었다.
“그런데 내가 요 며칠 전에 도한결 감독 결혼식 갔다가 들었는데 장동훈 감독이랑 무슨 작품 한다고 소문이 돌던데요? 진짜에요?”
반쯤은 진지하게, 반쯤은 미인과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 물어본 거였다.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가볍게 물어본 건데 현주가 흠칫 놀라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음... 아직 정해진게 없어서...”
“어? 그럼 뭔가 말은 오갔다는 거네?”
강석호 감독은 진심으로 놀랐다.
다른 감독도 아니고 1년 전만 해도 도한결, 한태주 감독을 이어 장래에 대한민국 최고의 감독이 될거라 많은 기대를 받았던 감독이 바로 유병세 감독이었다.
그런 감독과 만나서 작품을 하기로 이야기를 끝냈다고 들었는데...
장동훈 감독과 작품을 한다는게 사실이었다면 이건 진짜 충무로에 퍼질 쇼킹할만한 뉴스임이 틀림없었다.
“원래 작품 전에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눠야 되는 거잖아요. 그게 이상한가요?”
“아니, 뭐 그건 아니고...”
“안 내리세요?”
그제야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 상태였다는걸 안 강석호 감독은 황급히 내렸다.
“그럼, 잘 지내요~”
“네, 볼일 보세요.”
현주는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닫힘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고 잠시 닫힌 문을 바라보던 강석호 감독은 그대로 핸드폰을 들어 어디론가로 전화를 걸었다.
*
“아, 짜증나. 그 인간 뭐야?”
“왜? 뭔데 또 그래?”
고 대표는 이제 현주의 저런 짜증이 놀랍지도, 새롭지도 않았다.
물론 현주는 건성으로 묻는 고 대표의 반응에 더 짜증이 올라왔다.
“아니~ 잘 들어봐요. 아까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오는데 강석호 감독이랑 딱 마주친거야.”
“강석호 그 인간하고?”
평소였다면 결코 그 인간이라고 하지 않았을거다.
하지만 악질형사에게 처참하게 박살난 이후 회사 자금사정에 악영향이 미친 건 사실이었다.
같은 시기에 정면으로 붙은 것도 아니고 한 달 뒤에 개봉한 거라 그래도 조금 기대했었는데 막말로 빗나간 펀치에 넉다운을 당한 셈이라 고 대표나 플라워 줌에서도 이만저만 실망한게 아니었다.
당연히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갈 수 없었다.
“네.”
“지금쯤 집에 틀어박혀서 전화도 안 받을 줄 알았는데 뭐 받아 먹을거 있다고 왔지? 하여튼 그래서?”
“나한테 다짜고짜 장동훈 감독하고 일할 거냐고 묻는거 있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아직 확정된건 없다고 그랬지.”
고 대포는 듣는 순간 열이 뻗쳐 소리를 빽 질렀다.
“야, 이 멍청아! 아후...”
고 대표가 머리를 짚으며 괴로워하자 현주는 억울한지 소파에 풀썩 앉으며 우는 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무한 거 아니에요? 멍청이가 뭐야, 멍청이가...”
“멍청한게 아니면? 그거 듣는 순간 강 감독이 가만히 있겠어? 바로 유 감독한테 일러 바칠거 아니야? 넌 아무 생각이 없니? 그냥 물으면 머리를 안 거치고 답이 막 나와? 생각이라는걸 해야지. 생각을! 아휴, 이 멍텅구리 진짜...”
고 대표가 자신의 머리를 콕콕 찍으며 소리질렀고 현주는 속상해서 다리를 동동 굴렀다.
“에이 씨...”
“씨는 무슨... 지가 뭘 잘했다고... 아, 이거 봐!”
고 대표는 자신의 핸드폰을 들고 현주에게 보여주며 소리질렀다.
현주가 뭔가 해서 보니 유병세 감독에게 전화가 걸려오고 있었던 거다.
“아니, 솔직히 말해요. 조금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하고 있어. 그럼 이 인간이 ‘아 그럼 시간을 더 드릴까요? 얼마나 드리면 될까요? 이러겠니?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해. 유명진 감독꺼 할 거야? 도장 찍을 거야?”
“할 거야. 하면 되잖아!”
빽 소리지른 현주는 대표실 문을 쿵 닫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