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첫 사랑 그 느낌(1)
유병세 감독은 너무 놀라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태주 감독은 허튼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무언가 착각이 있을 수 있다고 해도 티끌만큼의 소스라도 있었으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거다.
그런데 자신은 WAS엔터로부터 그 어떤 이야기도 듣지 못했으니 정말 임현주가 장동훈의 작품을 선택했다면 완전히 뒤통수를 얻어 맞은거나 다름 없었다.
한태주 감독은 벙찐 유병세 감독의 표정을 보곤 급히 말을 정정했다.
“아, 미안. 내가 잘 못 알았던 것 같아. 신경쓰지 마. 알잖아? 이 바닥이 원래 뜬소문 많은거.”
“하하, 그렇긴 하죠.”
“그런데 어디서 그런 말이...”
“아니야, 신경쓰지 마. 응? 내가 괜한 소리를 해가지고... 이래서 나이 먹으면 더 입조심해야 하는데 칠칠맞지 못하게 말이야. 신경쓰지 마.”
한태주 감독은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후배 마음을 심란하게 한 것을 알고 미안해하며 화제를 돌렸다.
“네. 맛있게 드십쇼.”
유병세 감독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지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대한민국 최고 호텔의 뷔페였고 떠온 음식들도 스테이크, 초밥 등 맛있는 것들이었지만 먹고 있어도 무슨 맛인지 느끼지도 못했다.
속된말로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이 빠진 거였다.
그렇게 대충 식사를 마치고 급한 약속이 있는 것처럼 호텔을 빠져나온 유병세 감독은 곧장 WAS엔터로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신호음도 길다고 생각할 찰나 박대진 상무가 전화를 받았다.
“아이고, 유병세 감독님! 어쩐 일로...”
박대진 상무가 말도 채 끝내기 전에 유 감독이 쏘아붙이듯 물었다.
“임현주 씨 저와 작품 하는거 아니었습니까?”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 저와 작품하기로 이미 만나서 이야기까지 다 했는데 지금 다른 소리가 들리던데요?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저도 지금 처음 듣는 이야긴데 확실한 겁니까?”
고은숙 대표 다음으로 WAS엔터에서 2인자의 위치에 있는 박대진 상무가 전혀 모르는 이야기라는 식으로 나오자 유병세 감독도 조금 마음이 놓였다.
그래서 잠시 숨을 가다듬고 흥분을 가라앉힌 후 천천히 말했다.
“아니, 오늘 도한결 감독 결혼식이었잖아요?”
“맞아요. 그렇죠.”
“거기 갔다가 임현주 씨가 다른 감독하고 할 거라는 말을 들어서 제가 지금 물어보는 겁니다. 아니겠죠?”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금시초문이에요.”
“휴... 알겠습니다.”
*
전화를 끊은 박대진 상무는 황당함에 한참 동안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급히 대표실로 올라갔다.
그냥 무시하려고 했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똑똑...
“저 박 상무입니다.”
“들어와.”
다행히 대표실에는 고은숙 대표 말고 아무도 없었다.
“왜?”
“다름 아니라 방금 유병세 감독한테서 전화가 왔는데요.”
“유 감독이?”
고 대표의 미간이 살포시 찌푸려진다.
그걸 보니 이상했던 느낌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네.”
“뭐라는데?”
“이번에 임현주랑 같이 작품하기로 합의 봤는데 다른 작품 하는거 아니냐고 따지듯이 물어보던데요? 그래서 전 모르는 일이라고 했는데... 혹시 진짭니까?”
“아니. 아직은...”
‘아직은’이라는 말은 다른 작품으로 갈아탈지도 모른다는 말이었다.
“진짜요? 그럼 말을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어떻게 저는 쏙 빼놓고 그걸 진행합니까. 섭섭합니다. 진짜...”
박 상무는 아무리 고은숙 대표가 이 회사에서 왕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직위와 체면이 있는데 자신을 쏙 빼놓고 배우 캐스팅을 결정해버리니 섭섭함이 밀려왔다.
“미안해. 근데 시나리오 온게 그제였고 현주가 다시 생각해보겠다고 한게 어제였어. 그것도 어제 저녁. 시나리오 오는게 한 두 개가 아닌데 그거 다 박 상무한테 어떻게 알려줘? 나도 어제 현주한테 연락와서 알았어.”
“그런데 어떻게 알고 물어본 걸까요? 아무리 소문이 빨라도 그렇지...”
“우린 다른 곳에 입도 뻥끗 안 했어. 그리고 확정난 것도 아니야. 현주가 시나리오 보고 일단 조금 살펴보겠다고 그쪽에 연락한게 다니까. 아무래도 제작사 쪽에서 좋다고 설레발치다가 유 감독 귀에까지 들어갔나보네. 하필 도한결 감독 결혼식이라 소문이 더 빨리 돈 거고. 하... 골치 아프네. 이거 유 감독한테 연락을 해줘야 하는거야, 말아야 하는 거야.”
“현주는 입장을 확실히 정한 겁니까?”
“아니야. 아직 결정을 못 내렸어. 작품 하나 선택하기 쉽니? 그리고 얼마 전에 유 감독이랑 식사까지 하면서 짝짝궁 맞춰놓고 뒤통수 때리기가 그렇잖아. 아무리 계약서를 안 썼다고 해도.”
“유 감독이 투자 받은 걸로 들어가는거죠?”
“응. 그래서 더 난감해.”
제작사가 감독과 같이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며 제작을 준비하는 경우가 상당수지만 투자자가 시나리오를 발굴해 적당한 감독과 제작사를 찾아 제작에 들어가는 경우도 상당하다.
특히 요즘엔 제작사에서 제작을 주도하기 보다는 투자사에서 제작을 주도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건 웹툰이나 웹소설 판권을 투자사에서 미리 사들인 경우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일종의 미래를 대비한 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중소규모의 제작사에서는 수천, 수억을 투자해 당장 제작하지도 않을 판권을 미리 사들인다는게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지만 투자사는 그게 가능했다.
이번 유병세 감독의 작품 역시 제작사가 주도하는게 아닌 유병세 감독과 투자사가 직접 계약하고 투자를 확정시켜 놓은 상황에서 적당한 제작사와 캐스팅을 구하는 형태였다.
그렇기에 제작이 엎어질 가능성은 낮았지만 가지고 있는 판권의 질이나 감독, 작가의 역량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고 할 수 있었고 유병세 감독의 역량이라면 성공을 기대할만 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럼 그냥 유병세 감독 걸 하는게 뒷말도 없고 좋지 않을까요?”
“그게 깔끔하긴 하지. 사니리오만 받고 고민하고 있었으면 모르겠는데 만나서 천생연분처럼 미래를 그려놓고 이제 와서 차면 그게 미친년 아니겠니? 난 그래서 마음 비웠다.”
고은숙 대표도 그 시나리오를 먼저 봤다면 당연히 그걸 선택하자고 했을테지만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게 문제였다.
그래서 온전히 선택을 임현주에게만 맡겨놓고 있었다.
“그런데 누구 작품인데 그래요? 급해서 그것도 못 물어봤네.”
“장동훈 감독.”
“네? 또요?”
“정확히는 장동훈 감독 작품은 아니고, DH 미디어에서 제작하는건데 장동훈 감독 아래에 있던 조감독이 이번 작품 연출을 맡는다고 하네.”
“조감독? 그 유명진이라는 친구 말입니까?”
“아네? 맞아. 유명진 감독 연출이라고 해서 더 애매해.”
박 상무는 고 대표가 왜 선택을 현주에게만 맡겨놨는지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장동훈 감독이 아닌 유명진 감독이 연출하는 작품이었기에 무조건 하라고 했다가 잘못 됐을시 후폭풍을 염려하는 거였다.
“시나리오는 괜찮았습니까?”
“그것도 말이야. 재밌긴 한데... 사실 내가 그렇게 시나리오를 잘 보는 편이 아니잖아? 그래서 막 무조건 되겠다 확신하지도 못하겠고 그래. 현주는 마음에 들었나 본데 모르지. 어떤 걸 선택할지. 그때까지 우린 가만히 있자고. 어디 가서 떠들지 말고.”
“아, 그럼요. 누님은 제가 무슨 애인줄 아십니까?”
“가끔 애도 안 하는 실수를 해서 그렇지.”
“크흠...”
박 상무는 고 대표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
“여기는 좀 작죠. 그리고 교통이 별로야.”
“여기는요?”
“여긴 주차장이 너무 좁던데요? 완전히 던전이야, 던젼.”
동훈과 유지은 팀장은 머리를 맞대고 사무실 사진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오픈한지 1년도 안 됐지만, 이 좁고 낡은 사무실을 벗어나 번듯한 곳으로 입주할 곳을 찾는 중이었다.
현재까지 악질형사의 예상 정산금만 2백억을 넘는 수준으로 로또도 이런 로또가 없는 상태였다.
이렇게 되니 이런 구질구질한 곳은 회사의 이름값과 맞지 않았고 앞으로 채용해야 할 직원들을 생각하면 공간도 너무 협소했다.
그리고 앞으로 방문할 스타들을 생각하면 이곳을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이사를 해야 한다는 부담감보다는 더 좋은 곳으로 이사 간다는 흥분감이 둘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이때 명진이 쪼르르 다가오더니 동훈에게 말했다.
“감독님, 감독님이 말씀하셨던 그 구도를 생각해봤는데요. 자취방 입구를 옆에서 보는 거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걸 이렇게 표현해보면...”
뭔가 해서 보니 콘티를 그려가지고 설명하고 있었다.
“야, 너 무슨 캐스팅도 안 끝냈는데 콘티까지 그렸냐? 너무 앞서가는거 아니야?”
“우리 유 감독님, 입봉한다고 흥분하셨네. 요즘 밤에 잠도 안 오시죠?”
유지은 팀장이 놀리듯 말하자 명진이 민망한지 얼굴을 돌렸다.
“아니, 뭐...”
사실 명진이 에로영화계를 나와 동훈과 함께한 이후부터 감독 데뷔를 위해 꾸준히 시나리오를 만들어두고 있었다.
원체 연출에 대한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던 감독이었기에 시나리오의 플롯만 잡아주면 알아서 대성할 친구라고 생각해서 다른건 건들지 않고 오로지 시나리오 부분만 잡아주는데 주력했다.
그러다 나온게 정통 로맨스물.
에로영화를 해서 그런지, 아니면 평소 로맨스 장르를 좋아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의외이긴 했다.
그 시나리오의 구조가 과거 첫사랑이었던 연인을 우연히 만나서 벌어지는 이야기였는데 전개가 조금 뻔하다고 해야 할까? 색다른 맛이 없었다.
그래서 김영웅 감독의 ‘건축한 원론’의 플롯을 이야기해주었는데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것처럼 좋아하더니 부족한 시나리오를 금방 채워온 거였다.
이번에는 플롯과 ‘건축한 원론’에서의 재밌었던 요소를 이야기해 주었을뿐,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가져온게 아니었기에 상당히 다른 작품이 되긴 했지만 뼈대는 비슷하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었다.
보기에 따라선 다른 작품으로 보여질 수도 있을 정도?
어쨌거나 명진이 최종 탈고한 시나리오는 그 나름대로 상당한 완성도를 자랑하고 있었기에 동훈은 두 번 생각하지 않고 DH 미디어의 세 번째 작품을 명진의 작품으로 결정했다.
어차피 지금 회사에 계속해서 촬영 스태프들이 일을 문의하고 있었고 곧 들어올 2백억 넘는 자금으로 뭐든 해야 했다.
동훈은 로맨스 쪽은 다른 장르에 비해 개인적으로 흥미가 없어 차기작은 스릴러나 액션쪽으로 구상하고 있었고 이 빈 시간동안 명진이 입봉하기에 딱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특히 로맨스 영화는 제작비도 크게 들지 않아 회사로서 실패한다고 해도 큰 부담이 없었다.
어쨌거나 그래서 명진이는 시나리오를 각 소속사에 돌려놓고 혼자 부푼 가슴으로 열을 올리는 중이었다.
“어디 연락 온 데는 있었어요?”
동훈이 묻자 유 팀장은 웃으며 손을 저었다.
“에이, 돌린지 얼마나 됐다구요. 벌써 연락오면 그게 더 이상한거지. 우리 유 감독님 입봉작이다보니까 배우들한테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할 거예요. 그러니 마음 급하게 먹지 말고 천천히 기다리세요. 마음 편히 한 달은 기다린다고 생각하시구요. 임현주 건도 너무 기대하지 마세요. 임현주 변덕 심한거 알고 있죠?”
“그럼요. 전 마음 비우고 있습니다.”
말로는 마음을 비웠다고 하지만 계속 회사 전화를 힐끔거리는 걸 보면 잔뜩 기대하고 있음이 틀림 없었다.
솔직히 명진이도 그렇지만 동훈도 기대하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봐도 로맨스 장르로써 상당히 완성도 높은 각본이었기에 유명진 감독의 손으로 새롭게 탄생한 ‘건축한 원론’을 빨리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이때 동훈의 핸드폰으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처음 보는 번호였지만 010으로 시작하는 개인 연락처였기에 받으니 어딘지 모르게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장동훈 감독님 되시죠?”
“네, 그런데요?”
“제 연락처 저장 안 해놓으셨나 봐요. 그리고 목소리도 기억 안 나시나보네. 섭섭해요, 감독님.”
“네?”
“저 현주에요. 임현주.”
“임현주 씨?”
순간 명진이 두 손을 불끈 쥐며 소리없는 환호성을 질러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