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69화 (69/116)

# 69

전화위복(6)

양지원은 유리벽 안에서 자신을 보며 당황하는 김용민 부장의 얼굴을 보고 승리의 웃음을 지어 보였지만 그녀는 사실 끌어오르는 화를 억지로 내리 누르고 있었다.

빛그림이 국내 최고의 배급력을 자랑하고 있던 그 시절 ‘그 새끼’로 인해 회사가 내리막길을 걸었다고는 하지만 당시 SHOW와 LS엔터에서 망해가는 회사를 더 벼랑끝으로 밀어버렸다는걸 알고 있었다.

안 그래도 작품 선정을 잘못해 흥행력이 별로인 작품을 배급했는데 당시 SHOW와 LS엔터에서 필사적으로 스크린을 끌어와 아예 숨통을 조여버렸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저기 회의실 안에서 당황하고 있는 저 사람이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중요한건 양지원으로써 처음으로 대형 배급사에게 한방 먹인 셈이 된 거다.

뭐 그렇다고 기쁘다기 보다 전의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말이다.

반면 양지원 대표를 보고 당황한 김용민 부장은 고개를 홱 돌려 동훈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너무 섣부르게 결정하신 건 아닐까요? 국내 배급력을 생각했을 때 빛그림과 우리 SHOW는 따라올 수 없는 격차가 있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긴 그렇지만 아마 빛그림은 초기 스크린을 800개도 확보하기 힘들 겁니다.”

이번에는 동훈 대신에 유지은 팀장이 나섰다.

“저희도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거 아시죠? SHOW에서도 악질형사 배급할 때 스크린 800개 조금 넘긴거...”

“그렇긴 하지만 그건 분명 상대편 애니메이션이 워낙 강세였기 때문에...”

“이번에는 안 그렇다는 보장 있나요?”

“네?”

“그렇잖아요. 이번에 ‘진격의 카프리모’가 워낙 기대작이어서 힘들었다는 말인데 솔직히 대단한 작품은 맞지만 또 그런 작품과 또 맞상대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요. 그때마다 상대 작품이 어떻고 하면서 다른 말씀을 하실 수도 있는데 어떻게 SHOW를 믿고 계약을 할까요?”

“우리가 실수했다는 건 알지만 너무 극단적인 경우로 비약하시는게 아닐까요?”

“극단적인 경우라기엔 조금 확률이 높은 상황이라고 보는데요? 솔직히 국내에서 대형 애니메이션이 1년에 몇 개나 개봉하는지 따져볼까요? 올해 ‘진격이 카프리모’를 제외하고 제작비가 2백억이 넘게 들어간 작품만 네 개가 개봉했어요. 그리고 그 작품들이 스크린에 걸려있던 기간이 평균적으로 4주 정도 되구요. 그냥 러프하게 한달이라고 보면 네 달이에요. 네 달. 이런데도 극단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나요?”

김용민 부장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렇게만 보시면 안 됩니다. 분명 대작이 많이 나오긴 했어도 이번 경우는 이상하게 LS엔터에서 스크린 확보에 열을 올린 경우였어요. 아주 이상할 정도로요. 보통 애니메이션은 꾸준한 관객몰이를 하기 때문에 제작사나 배급사에서 이렇게 무리하게 스크린을 확보하려 하지 않는데 이번만큼은 뭔가 달랐습니다. 이런 말씀드리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마치 자기네들 매출을 올려보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상대방을 죽여야겠다는... 하여튼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동훈은 그 이야기를 들으니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껏 수많은 애니메이션 대작이 개봉했었지만 이렇게 공격적으로 스크린 확보를 나선 경우는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뭐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특히 유지은 팀장은 기준이 확실한 사람이다.

“솔직히 그렇게 와닿는 말은 아니네요. 그리고 그게 그렇게 이상했다면 처음부터 문제점을 알려주고 우리와 상의했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지금에 와서 그런 문제가 있었다고 말하는건 변명으로 밖에 안 들리는데요.”

“유 팀장. 우리가 ‘악질형사’ 하나만 배급하는것도 아니고...”

“맞아요. 바쁘시죠. 할 일도 많으시고...”

김용민 부장은 자신이 말을 잘못 꺼냈다는걸 알고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동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대표님, 분명 깊은 생각 끝에 하신 결정이겠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시는게 어떨까 합니다. 제작비가 무려 120억입니다. 광고비까지 생각하면 최소 150억을 봐야 하는데 그럼 손익분기점이 4백만을 넘어요. 말이 4백만이지 1년에 4백만을 넘는 영화는 열 손가락에 다 들지도 못합니다. 악질형사가 천만 관객을 바라본다고 하지만 다음 작품은 감독님이 연출한 작품도 아닌데 고작 몇 백개 스크린으로 4백만 관객을 자신 하십니까?”

“부장님이 어떤 말씀을 하시려는지는 알겠지만 우리는 마음을 정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보면 SHOW의 배급을 보고 더 마음을 정했다고 볼 수 있어요.”

“네? 그게 무슨...”

“초기 스크린을 많이 확보하지 않아도 입소문을 타면 스크린 천 개 이상 불려가는건 일도 아니라는, 그런 좋은 선례를 보여주시지 않았습니까?”

유 팀장이 거들었다.

“맞아요. 개봉 후 2주 지났을 때 스크린이 1400개까지 올랐으니까요.”

“그건 우리가 그만큼 노력해서 올린 겁니다!”

김용민 부장은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지만, 동훈과 유 팀장의 표정은 요지부동이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감사하고 있구요. 어쨌든 빛그림도 그렇게 노력한다면 1400개까지는 아니라고 해도 그에 비견할만큼 모을 수 있지는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대승적 차원에서 중소규모 배급사도 꾸준히 매출을 올려야 더 좋은 환경이 조성되는거니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구요.”

김용민 부장은 황당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하... 장동훈 대표님은 정말 이상적인 생각을 하고 사시네요.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개소리라고 했겠지만, 대표님이 그러시니까 믿지 않을 수 없군요.”

얼마 전에 영화계와 애니메이션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장본인이 장동훈 감독이었기에 마냥 헛소리라고 하기에도 어려웠으리라.

“어쨌든 우리 결정은 이렇습니다.”

동훈의 마지막 말은 그만 나가라는 말과 같았다.

그렇기에 김용민 부장은 참담한 심정을 삭히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잘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그럼 가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미 감정이 상할대로 상했을걸 알기에 굳이 립서비스로 다음에 더 좋은 작품으로 같이 하자는 말 따위는 하지 않았다.

김 부장이 나가고 난 뒤 회의실에 양지원 대표가 들어왔다.

상당히 기분이 좋을 줄 알았는데 그녀는 의외로 조금은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무 미안해하지 마세요.”

유 팀장이 그렇게 말하자 양 대표는 다시금 그녀 특유의 발랄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아니에요. 전혀 미안하지 않아요. 원래 사회는 동물의 왕국이잖아요? 하핫! 음... 그건 그렇고 아주 좋은 소식이 있어요. 오늘 계약에 맞추려고 A&P쪽에 빨리 서두르라고 하긴 했는데 이렇게 빨리 결과물을 내놓을 줄은 몰랐는데요?”

그녀는 품에 꼭 안고 온 서류봉투를 열어 몇 가지 서류를 동훈과 유 팀장에게 나눠주었다.

“일단 그쪽에서 제시한 판매금액과 판매루트, 편집에 필요한 사항 등을 제시한 내용이에요.”

“굉장히 많네요.”

유 팀장이 서류를 뒤적이며 놀라 말했다.

“그쵸? 이게 영화 하나를 판다고 해도 각 나라마다 연령제한이라든가 번역상 제한이 있는 것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게 해결되야 해당 국가 배급사에 넘길 수 있거든요. 만약 돈 받고 팔았는데 해당 국가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연령 제한을 높여버린다든가 하면 배급사는 뒤통수 맞는거라 조금 예민하게 접근해야 해요.”

“음...”

“특히 A&P는 우리나라에서 접근하지 못한 아프리카나 동유럽쪽도 판매라인을 가지고 있어서 조금 번거럽기는 해도 매출액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여줄 겁니다.”

“그럼 자막이 가장 문제인건가요?”

“일단 자막과 여기 보시면 몇몇 나라에서 제한하는 장면을 편집해주셔야 해요. 추가적인 비용은 발생하겠지만 그 부분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시구요.”

“알겠어요. 그럼 이게 마무리되는 동시에 계약하면 되는 거죠?”

“맞습니다.”

양지원 대표는 A&P와 계약하지 않으면 배급 계약을 하지 않겠다며 그 전까지 계약서도 내밀지 않고 있었다.

정확히 A&P와 해외판매 계약을 체결하는 동시에 빛그림과의 배급 계약서도 같이 하겠다는 입장이라서 동훈으로서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편집실에 보내서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지 확인해보고 내일까지 연락 드릴게요.”

“그럼 이제 계약서 만들어와도 되는 거겠죠?”

“그렇게 하세요.”

양지원은 잠시 멈칫하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혹시... 김용민 부장이 우리랑 계약한다고 할 때 별말 안하던가요?”

동훈이 대답했다.

“네? 아 뭐... 배급력 차이에 관해서 얘기하긴 했었는데... 그것 말고는 딱히 없었습니다.”

“그렇구나.”

“왜요?”

“아니에요. 그냥 궁금해서...”

그녀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아, 그리고 수수료에 관해서는...”

*

일주일 뒤 호텔뷔페 식당.

수많은 사람들이 음식을 퍼다 나르며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어! 오진범이! 잘 지냈어?”

“나야 잘 지냈지. 식사 다 안했지?”

“왜 이렇게 늦었어.”

영화계에 조금만 발을 들인 사람이라면 식당 가운데 몰려있는 십여명의 남자들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들이라는 걸 알아챌 것이다.

마침 오늘,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감독 셋을 뽑으라면 무조건 들어간다는 도한결 감독의 결혼식이라 영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 상당수가 초대받아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오늘 기사 봤어? 장난 아니던데?”

도한결 감독과 쌍벽을 이루는 감독인 한태주 감독은 히끗한 장발의 머리를 깔끔하게 정돈해서 넘긴 스타일이라 남자가 봐도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이 들게 했다.

스타일만 멋진게 아니라 별다른 스캔들도 없고 언제나 영화 연출에만 신경 쓰는 감독이기에 후배들의 존경까지 받는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오늘 아침에 뜬 기사는 흥분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대단했다.

[‘한강의 괴물’ 126개국 선판매 쾌거!]

[양호민 감독의 ‘한강의 괴물’에 대한 찬사 쏟아져]

[‘한강의 괴물’ 도대체 어떤 영화?]

“빛그림이랑 계약했다면서요? 이것 때문에 그런건가?”

“말이 126개국이지 대단하긴 하더라구요. 도대체 돈을 얼마나 번 거야?”

“이 정도면 거의 백억 가까이 되지 않을까?”

한태주 감독의 말을 시발점으로 전부 장동훈 감독에 대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대부분 장동훈 감독과 양호민 감독에 대한 찬사였다.

연출에 대한 칭찬부터 제작환경을 바꾸려고 하는 자세까지 칭찬을 이어나가자 한쪽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강석호 감독은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때 한태주 감독이 강석호 감독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 맞다. 장동훈 감독이랑 같이 해봤지? 어땠어?”

“네? 아... 뭐...”

“그때도 뭔가 번뜩이는게 있었을거 아니야?”

강석호 감독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솔직히 그놈이 빠릿빠릿하고 배우들과 친화력이 좋아 디렉팅을 조금... 아니, 조금 많이 도와주긴 했지만, 딱히 천재성을 보여줬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설사 그런 천재성을 보여줬다고 해도 자신의 우상이나 다름없는 한태주 감독의 입에서 장동훈의 이름이 나올수록 불쾌하기만 했다.

“그때는 별다른 느낌이 없었는데요?”

“그래? 이상하네... 보통 조감독 할때부터 느낌이 오는데... 어쨌거나 소문 들었어?”

한태주 감독의 물음에 다른 감독들이 귀를 쫑긋 세웠다.

“무슨 소문이요?”

“장동훈이가 또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벌써요?”

“와... 미쳤다. 그 정도면 어디서 시나리오 수집해오는거 아닙니까?”

“참 대단한 친구야. 이렇게 좋은 감독들이 계속 나와줘야 해.”

한태주 감독의 칭찬에 다른 감독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속이 뒤틀린 강석호 감독이 뭐라 나설 찰나 갑자기 어느 한 사람이 자리에 불쑥 끼어들었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들! 하하하!”

영화계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온 유병세 감독이었다.

“아이고, 유 감독 아니야?”

“잘 지냈어?”

“새 작품 들어간다며?”

감독들의 질문에 유병세 감독은 간단히 담아온 접시를 내려놓으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네. 이번에 새 작품 들어가게 됐습니다.”

한태주 감독은 실력 있는 후배가 기특한지 미소를 머금으며 물었다.

“캐스팅은 잘 됐고?”

“네. 임현주가 하게 될 것 같아요.”

“오~ 임현주. 장난 아닌데?”

다른 감독들이 놀라는 순간 한태주 감독이 고개를 갸웃했다.

“임현주?”

“네? 왜요?”

“장동훈 감독게 아니고 네 작품에 들어가는 거였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