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
전화위복(5)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십쇼!”
“우리 먼저 갈게요, 감독님.”
고 대표와 현주는 임현주의 밴에 올라 유병세 감독의 배웅을 받으며 사라졌다.
유병세 감독은 대형 밴이 멀어져가는걸 지켜보다가 곧바로 근처 커피숍으로 향했다.
“유 감독님! 여기!”
유병세 감독은 커피숍 구석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 손을 들고 있는 남자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오래 기다렸죠?”
“아닙니다. 오래 얘기하신거 보니까 잘 되셨나보네요?”
“이미 결정난거나 다름없었어요. 오늘 마지막으로 서로간에 다시 한번 확실히 도장을 찍은 겁니다. 임현주 성격상 일단 입으로 내뱉은 말은 되돌리지 않잖아요.”
“하긴, 걔가 성격 화끈하죠.”
“너무 화끈해서 문제지. 어쨌거나 알아봤던 일은 잘 됐어요?”
유 감독의 눈빛은 아까 고은숙 대표와 임현주랑 같이 캐스팅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욱 진지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앞에 앉아 떠들어대는 이 사람은 중견 영화 제작사인 ‘light 미디어’ 송유근 제작피디였기 때문이다.
이미 그와 몇 차례 영화를 만들어 봤었기에 손발이 무척 잘 맞는 사람인데다가 중요한건 앞으로 세울 제작사의 차기 제작피디가 되기로 이미 합의했기 때문이다.
“일단 이것저것 다 알아봤는데 초기 자금은 크게 들지 않을 것 같아요. DH 미디어도 보니까 임대료 싼 곳에 인테리어도 거의 하지 않고 시작했더라구요. 직원은 유지은이 하나 데리고 시작했으니 거의 맨손으로 시작한거나 다름없죠.”
“그런데 지금 엄청나게 성공한 셈이죠?”
“아유 그럼요. 요즘 천만 돌파할거라고 말들 많은데 정말 천만 돌파하면 회사 규모가 달라질겁니다. 물론 지금도 엄청나게 벌었을 테지만.”
“얼마나 벌었대요?”
사실 유병세 감독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게 바로 이 질문이었다.
얼마나 벌어들였을까?
“극장 수수료 빼고 투자자에 배급 수수료까지 제하고 나면 지금까지 한 150억은 넘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해외 판매 대금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극장관객들이 많아서... 대단하죠?”
유병세 감독은 침을 꿀꺽 삼켰다.
150억... 지금까지 벌어들인 돈만 해도 그 정도인데 만약 천만을 돌파하고 나중에 IPTV에 진출해 VOD로 벌어들일 수익까지 생각하면 정말 입이 떡 벌어진다.
그 중에 딱 20%만... 아니, 덜도 말고 10%만 챙긴다고 생각해도 15억에서 20억은 챙길 수 있다.
그리고 회사 법인카드로 명품구입하고, 유흥에 쓸 생각을 하니 황홀해지기까지 했다.
원래는 영화가 크게 성공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이 꾸준히 작품만 제작할 수 있어도 성공이라고 봤는데 그 재수 없는 장동훈이 이렇게 성공하니 꿈을 크게 가질 수밖에 없었다.
“굉장하네. 그거 다 어디에 쓴대요?”
“하핫,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일단 차기작 이야기는 아직 없고 양호민 감독이 촬영 끝낸 ‘한강의 괴물’ 개봉 준비에 여념 없는 것 같더라구요. 이제 배급 계약한다는 이야기가 들려니까 지금쯤 천천히 돈 세면서 차기작 선정을 어떤 걸로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수도 있겠네요.”
“이번 영화는 성공할거 같습니까?”
“한강의 괴물이요?”
“네.”
송유근 피디는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했다.
“일단 유지은이에게 듣기론 작품은 잘 나왔다고 하던데 정확한건 모르겠습니다. 언론시사회는 돼야 알 수 있는데 묘한건 이번에 계약한다는 소문이 있는 배급사가 빛그림이에요.”
“빛그림? 거기 망했잖아요?”
“아예 망한건 아니었고 법원에서 회생신청 받은 뒤에 애니메이션을 배급하면서 꾸역꾸역 빚 갚고 정상화를 시키고 있었나 봅니다.”
“허... 장동훈이 미쳤네. 대형 배급사를 나두고 왜 빛그림처럼 하빠리랑 계약을 하려고 하지?”
“그게 의외였어요. 들리는 소문으로는 해외 매출을 노리고 한다는 말이 있던데 이건 정확하지 않습니다.”
“영화 잘 안 나온거 아닐까요?”
유 감독의 질문에는 그의 바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제발 망했으면 좋겠다는...
“그럴 가능성도 있죠. 아시다시피 영화가 잘 안 나오면 제작사나 배급사에서 바로 알지 않습니까? 자신들이 보기에도 뭔가 부족하다 싶으니까 대형 배급사를 통해 스크린 꽉 잡고 매출 끌어올리지 않고 해외 판매부터 노려보려는거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
“흐음...”
마음에 들었다.
송유근 피디도 유 감독의 입가에 가늘게 그어진 미소를 보곤 웃으며 말했다.
“이번 영화에 투입된 제작비가 120억이 넘는다는 말이 있던데 진짜 제대로 안 나온거면 진짜 고민이겠어요.”
“그렇게 해도 뭐 제작사 입장에서 완전히 큰 타격은 아니잖아요?”
유 감독은 아쉬움을 담아 말했다.
“그렇긴 하죠. 악질형사로 벌어들인 돈을 이번 영화에 손해봤다고 다 틀어막을 것도 아니고...”
“하긴 이렇게 해야 제작사가 안정적으로 작품을 만들 수 있으니까...”
장동훈의 입에서 곡소리가 안 나온다는게 아쉽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제작사 설립이 더욱 매력적이었다.
대박을 터뜨릴땐 돈을 쫙 빨아들이면서 실패하면 리스크를 투자자에게 최대한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작품이 몇 개 실패하면 투자자는 붙지 않을 것이고 회사는 작품을 만들지 못해 망해버릴테지만 50% 정도의 성공률을 유지한다면 평생 돈걱정 없이 살 수 있을게 분명했다.
“감독님께서 이번 영화를 성공시키시면 일단 거기서 번 돈으로 회사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가겠습니다. 그게 가장 안정적이니까요.”
지금까지 번 돈을 유흥이나 여자 만나는데 흥청망청 쓰지 않았다면 바로 회사를 설립했을텐데 참 아쉽기만 했다.
“그렇게 합시다. 피디님은 후배인 유지은을 잘 살펴보면서 DH 미디어가 이번에 성공했던 과정 같은걸 많이 체크해 두시구요.”
“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잘 배워놓겠습니다.”
유병세 감독은 가슴이 부풀어 오르는걸 느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고 있었다.
*
현주의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고은숙 대표는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물었다.
“그래서? 진짜 할 거야?”
고 대표는 처음부터 이 작품이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로맨스 판타지가 어쩌고 했지만 지금까지 로맨스 영화가 성공했던 경우가 많지 않았고 더욱이 성공한다고 해도 5백만 이상의 대박은 지금껏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장동훈 감독의 흥행질주를 옆에서 본 이후 이제는 그저 그런 로맨스 물이 눈에 안 들어오는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문제는 장동훈 감독이 제작하는 영화가 여배우 원톱 영화가 아니라는 것.
제작사 입장이나 남자배우를 가진 소속사라면 얼씨구나 할테지만 톱 여배우를 가진 제작사 입장에서는 장동훈 감독이 여배우 원톱 영화를 만들어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이 와중에 현주가 시나리오 하나를 찍고 하겠다고 하니 고 대표 입장에서는 걱정스럽기 그지 없었던 거다.
“시나리오 괜찮았어요. 그리고 유병세 감독 실력 괜찮잖아.”
“그렇지. 나쁘지 않지.”
솔직히 장동훈 감독이 아니라면 유병세 감독의 흥행전적이나 연출력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다른 감독들에 비해 상당히 좋은 편이라고 해야 맞았다.
“그런데 왜 싫어해요?”
“난 시나리오가 그렇게 땡기지 않더라고.”
이게 문제였다.
연출력도 상당하고 흥행전적도 나쁘지 않았지만 이번 시나리오는 고 대표에게 큰 감흥을 주지 못했다.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처음에 보고 확 재밌다고 느끼진 않았으니까.
“석태는 재밌다고 하던데?”
“진심으로? 네가 재밌다고 하니까 재밌다고 한 건 아니고?”
“글쎄, 하여간 대표님은 별로라는거죠?”
“아니다. 그냥 네가 땡기면 해. 괜히 말렸다가 마땅한 작품 안 들어오면 시간만 보내는거잖아.”
임현주는 고 대표가 창문 밖에 시선을 두고 있는걸 빤히 보다가 물었다.
“괜찮은거 있으면 추천을 해주던가.”
“없어. 그런거.”
“칫. 난 또 뭐라도 있는줄 알았네.”
사실 고 대표는 장동훈 감독의 차기작을 은연중에 기다리는 중이었다.
장동훈 감독의 연작속도는 다른 감독들에 비해 비교를 불가할만큼 빠르다.
다른 감독 같으면 2년에 한편 만들기도 버거울텐데 장동훈 감독은 1년에 한편을 만들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그렇기에 악질형사가 개봉후 한달이 넘어가는 이 시점에서 혹시 차기작의 시나리오를 보내오지 않을까 기대중이었던 거다.
“그러게. 뭐라도 있으면 좋겠다.”
고 대표가 한강의 물결로 쏟아지는 햇빛을 보며 하는 넋두리에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있었다.
*
김용민 부장은 조금 긴장된 얼굴로 DH 미디어 회의실에 앉아있었다.
천만 관객 돌파를 앞둔 DH 미디어 사무실 분위기는 들어오며 잠깐 스치듯 봤는데도 확연히 느껴질만큼 거의 축제분위기나 나름 없었다.
전에 유지은 팀장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니 직원들에게 조금이기는 해도 러닝게런티의 일부를 주기로 약속했다고 하니 지금 저들은 악질형사가 내려가고 정산받은 뒤 나올 보너스가 무척 기대될게 분명했다.
문제는 초반에 스크린 확보를 제대로 못한 자신들이었다.
이번 악질형사로 배급사인 SHOW 역시 상당한 돈을 벌어들였지만 신뢰를 잃어버린 DH 미디어에서 다음 작품은 다른 배급사와 하겠다고 통보했던거다.
김용민 부장은 속이 탔지만 황당하게도 윗선에서는 DH 미디어의 행태를 비웃었다.
제깟것들이 배급사를 바꾼다고 한들 무슨 대수겠냐는 반응이었다.
DH 미디어를 비웃는건 예사였고 회의에서 건방진 새끼들이라고 욕설을 내뱉은 임원도 있었다.
그때가 딱 개봉후 하루 뒤였다.
그러다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건 악질형사가 개봉 후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예매율은 꺽일줄 몰랐고 극장주들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스크린을 슬쩍슬쩍 열어줬으며 그에따라 매출이 쭉쭉 올랐다.
어느덧 8백만 관객을 돌파하고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자 윗선에서는 그제야 김 부장을 시켜 다음 작품도 자신들과 계약하게 만들라고 닦달하기 시작했던거다.
“미안해요. 좀 바빠서...”
동훈이 헐레벌떡 회의실로 들어섰고 이어 유지은 팀장도 회의실로 들어왔다.
동훈은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방금전까지도 양호민 감독과 최종 편집본을 만지고 있다가 온 거였다.
“아닙니다. 당연히 바쁘실테죠.”
김용민 부장의 저자세에 유지은 팀장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저자세로 사람을 상대하는건 극히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한강의 괴물 배급 때문에 오셨다구요? 그런데 저희는 SHOW랑 안 할거라고 말씀 드린거 같은데...”
동훈이 직접 자리한 이유는 김용민 부장이 직접 왔기에 정중하게 거절하기 위해서였다.
회사까지 직접 왔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거절하기엔 상대방을 너무 박대하는 것 같아 일을 끝내고 바로 온거였다.
“이번 일 때문에 실망하셨다는거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래도 국내 배급력으로 우리 회사를 따라올 회사가 없다는거 아실 겁니다. 대신 이번에 수수료 부분을 대폭 조종하는 방향으로...”
동훈은 말이 길어질 것 같아 손을 들었다.
“죄송하지만 이미 다른 배급사로 거의 계약을 앞둔 상황이라 그쪽과 계약은 힘들 것 같습니다.”
“네? 설마 LS엔터와...?”
LS엔터는 역시 국내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는 대형 배급사로 SHOW에서는 라이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빛그림이라고 중소규모 배급사와 계약하기로 했습니다.”
“빛그림이요? 예전에 그 빛그림 맞습니까?”
“네. 저기... 저 뒤에 서 계시는 젊은 여성분이 빛그림 대표님이세요.”
김용민 부장은 자신의 뒤 유리벽 너머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양지원 대표가 김용민 부장을 향해 고개를 까딱이며 승리의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