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전화위복(4)
유지은 팀장이 경찰에 신고하자마자 당황한 그는 허둥지둥 서류를 챙겨들고 급히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동훈은 도망치는 그를 잡으려다가 괜히 사람이 다칠까 싶어 뒤쫒아가려던 유 팀장을 말리곤 경찰이 올때까지 기다렸다.
이후 사무실은 한동안 경찰이 들락날락거렸고 회사 대표인 동훈과 유지은 팀장도 몇 번 조사를 받기도 했다.
며칠 뒤, 양지원 대표는 다시 한번 동훈의 DH 미디어 사무실로 방문하게 됐다.
DH 미디어는 당장 배급사를 결정해야 했고 이미 해외 판권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였으니 빛그림과 배급계약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건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놈 어떻게 됐데요?”
양지원은 간단히 인사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그에 유 팀장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듯 말했다.
“이 사람 본명이 강만식인데 사기 전과 7범이래요. 나이도 젊던데 얼마나 놀랐는지...”
“어머, 7범이래요? 나이가 몇인데요?”
“들어보니까 이제 스물일곱이더라구요.”
“어머어머...”
“아무래도 외모가 바탕이 되다 보니까 쉽게 넘어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정말 다행인게 DH 미디어 뿐만 아니라 다른 몇 군데의 제작사도 같은 제안을 받은거 있죠?”
“어머 웬일이야. 그래서요?”
“LS엔터 같이 대기업 계열사가 아닌 중소 제작사는 거의 비슷한 제안을 받았던 거예요. 이게 만약 우리가 밝혀내지 못했으면 피해핵만 수십억 원에 달할 뻔했대요.”
“와... 진짜 대단한 새끼네요.”
“그렇죠? 어쩜 그렇게 뻔뻔하게 사기를 칠 수 있는지...”
당시 경찰서에서 사건의 진상을 듣고 나서 하마터면 큰 곤란을 겪을뻔했다는 생각에 동훈이나 유 팀장이나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물론 사기를 당했다고 해도 이번 악질형사가 엄청난 흥행을 하는 통에 회사가 망한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며 직원들이 어설픈 사기에 당하는 한심한 사람이 되어야 했을지도 몰랐다.
사기를 당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라 사기를 치는 사람이 문제지만 어디 일반인들이 다들 그렇게 생각할까?
어쨌든 그렇게 사기꾼을 흉보며 입을 풀던 그녀들은 가만히 앉아 있는 동훈의 눈치를 살짝 보곤 화제를 돌렸다.
“일단 A&P쪽에 편집본 보내놓았어요. 혹시나 믿기 힘드실까봐 담당자와 통화는 이 자리에서 하도록 할게요. 안 그래도 이번에 큰일 겪으셨는데 뭐든지 확실한게 좋지 않겠어요?”
“네. 그렇긴 합니다.”
“그럼 일단 전화 걸겠습니다.”
그녀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전화를 건 다음에 스피커 기능으로 바꾸어 놓었다.
사실 영어로 대화할 것이기에 전혀 알아듣지 못할 테지만 그래도 알아듣는 척 팔짱을 끼고 통화를 지켜보았다.
“하이, 프랭크. 나 양지원이에요. 내가 보낸 편집본 확인했죠?”
“확인했어요. 일차적으로 내가 확인하고 상당히 흥미로운 작품이라 직원들 모두 시청했었죠. 음... 한국 영화치고 굉장히 모험적이면서 재미있긴 했어요.”
“이 정도 퀄리티면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했던 다니엘 모리스만 감독의 ‘황혼의 습격’에 비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신가요? 전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보는데.”
“하하, 글쎄요. 그런데 갑자기 영화를 보내줘서 난 잘못 보낸줄 알았어요. 당연히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물론 애니메이션도 좋은 작품이 많죠. 하지만 이것 역시 충분한 상품성이 있다고 생각해서 제안하는 거예요. 말씀하셨던 대로 플롯도 괜찮고 생각할 것도 있어서 단순히 괴물 영화가 아니거든요. 작품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지닌 작품이라 해외판매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겠더라구요.”
“흥미로운 작품이긴 했습니다. 그런데 제작사는 전혀 들어본 적 없는 곳이던데... 정확히 어디라구요?”
“제작사는 거기에 써 있듯이 DH 미디어인데 신생제작사구요. 대표님이 동훈 장이라고 상업영화 두 편을 연달아 성공시키고 회사를 설립한 거라 다른 신생제작사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죠. 양호민 감독에 대한 내용은 제가 이메일로 보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한번 확인해보죠. 아, 혹시 가능하다면 제작기획서도 보고 싶어요. 물론 영문판으로 말이에요.”
“오케이. 보내드릴테니까 보고 연락주세요. 기다릴게요.”
전화를 끊은 양지원은 씨익 웃으며 동훈에게 말했다.
“왜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를 줬냐고 당황하던데요? 그런데 영화를 보니까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그쪽에서 립서비스 하는거 아닐까요?”
“전혀요. 저쪽은 립서비스 따위는 하지 않아요. 그럴 이유가 없는거죠. 그리고 어차피 A&P랑 계약 안되면 저희랑 계약 안 하실거니까 저 역시 굳이 계약하기 전에 부풀릴 이유도 없어요.”
“그거야...”
그녀 말처럼 굳이 대형 배급사를 놔두고 빛그림 같이 소형 배급사와 같이 할 이유는 없었다.
“저쪽에서 마음에 안 들 때는 별로 물어보지도 않아요. 감독뿐만이 아니라 제작사 대표가 누구인지, 제작기획서가 만약 영어로 번역 가능하다면 한 번 보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거든요.”
“아, 그래요?”
“제작기획서 번역은 우리가 할 수 있어요. 워낙 많이 해본 일이라 금방 하거든요.”
“그럼 감사하구요.”
“일단 오케이 되더라도 일이 빨리 진행되지는 않아요. 다들 우리나라처럼 빨리빨리 일처리를 하는 편은 아니니까요. 대신 일하는데 실수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요. 영업력이 상당해서 매출도 상당히 많이 올려주고요.”
“그렇게만 된다면 바랄게 없죠.”
“해외 판매만을 따진다면 이건 정말 저희 자랑이 아니라 빛그림을 따라올 배급사가 거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답니다.”
이렇게까지만 들으면 다 좋겠지만 아까도 얘기했듯이 문제는 국내 배급력이다.
“그럼 스크린 확보는 얼마나 가능할까요?”
그녀는 예의 그 자신만만한 표정 대신 미간을 살포시 찌푸리며 안타깝다는 투로 말했다.
“이 부분이 저희 빛그림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도 저희 빛그림이 영업력이 아주 떨어지는건 아니랍니다. 대형 배급사에 비해 조금 떨어지는 부분은 있겠지만 그래도 많아 봐야 4백에서 5백관 정도 차이라고 보거든요. 그 정도 차이는 해외매출로 충~분히, 그 이상 뽑을 수 있을 테니까 요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우리 빛그림이 최고의 선택이 아닌가 싶네요.”
빙그레 웃으며 능청스럽게 말하니 옆에서 보고 있던 유지은 팀장도 피식 웃다가 동훈을 보고 정색하곤 물었다.
“그럼 우리쪽에서 지원해줘야 할 건 제작기획서 밖에 없나요?”
“네.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아! 기왕이면 이번에 대박난 악질형사에 대한 제작기획서와 현재 상영하고 있는 완성본 좀 부탁드릴게요.”
“그건 왜죠? 어차피 해외 판권에 관한 계약은 이미 SHOW에서 가지고 있는건데...”
“하하, 그걸 팔겠다는건 아니구요. 현재 이 영화를 여기 DH 미디어에서 만들었고 지금 얼마나 흥행중인지 어필할려구요. 같은 제작사에 만든거고 흥행이 잘 되고 있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가산점을 주거든요.”
“네, 뭐 그럼... 알겠어요.”
동훈은 어쩌면 대형 배급사보다 여기와 연결된게 더 행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예매율 20% 유지중인 악질형사, 과연 천만 돌파 가능할까?]
[장동훈 감독, 한국영화계에 이런 홍복이라니?]
유병세 감독은 들고 있던 핸드폰을 탕 소리가 나도록 거칠게 내려놓았다.
“씨발...”
천만 관객이라니...
8백만 관객을 돌파한 이후에도 악질형사의 예매율은 20%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후 개봉한 영화들은 간혹 박스오피스 1위를 탈환하기도 했지만 이내 악질형사에게 다시 1위를 도로 내주기를 몇 번이나 반복하고 지금에 이르렀다.
이제는 정말 천만 관객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도 천만 관객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고 있고 그저 그 순간이 언제 오는지, 그리고 천만을 돌파한 이후 어디까지 끌고 갈 수 있을지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장동훈 감독에게 쏟아지는 걸 유병세 감독은 견딜 수 없었다.
“조상신이 도와주시나...”
이렇게 중얼거리며 홀로 화를 삭힐 때 드르륵 문이 열렸다.
“먼저 와 계셨네요. 일찍 올 걸 그랬다.”
화사한 웃음으로 들어선 이는 WAS엔터의 고은숙 대표였고 그녀의 뒤를 따라 임현주가 하얀 티셔츠에 검은 모자를 눌러쓴 캐쥬얼한 차림으로 들어섰다.
“아닙니다. 저도 금방 왔거든요. 현주 씨, 반가워요.”
유병세 감독이 손을 내밀자 현주가 그의 손가락 3분의 2 정도만 살포시 잡으며 고개를 숙인다.
“안녕하세요.”
“현주 씨 미모는 참 볼때마다 새로워. 예쁜걸 알고 있는데도 보면 또 놀랍다니까. 이래서 스타야.”
“호호호! 감독님도 참... 우리 현주 너무 띄워주지 마요. 안 그래도 자기 잘난 맛에 사는데 자꾸 그러면 성격 더 안 좋아져.”
“이렇게 예쁜데 너무 착하면 오히려 사람들이 더 쉽게 봅니다. 전 현주 씨가 굉장히 현명하다고 생각해요. 하하, 앉으세요.”
오늘 자리는 그가 준비하는 신작의 여주인공 캐스팅을 위한 미팅었다.
그가 그리는 원대한 꿈(?)을 위해 반드시 이번 영화를 성공시켜야 하는 만큼 스타캐스팅은 필수였고 마침 스케줄이 비는 여배우들 중에 임현주가 가장 대어라고 할 수 있었다.
“우리 현주가 시나리오를 굉장히 재밌게 봤어요.”
“하하, 감사합니다. 사실 시나리오를 쓸때부터 현주 씨를 여주인공이라고 생각하면서 썼어요. 그래서 임현주 씨한테 가장 먼저 보냈었는데 이렇게 좋게 생각해주시니 정말 감동적입니다.”
유병세 감독은 가슴을 짚으며 현주를 향해 진심으로 고맙다는 눈빛을 보냈다.
물론 그녀를 생각하면서 시나리오를 썼다는건 거짓말이었지만 뭐 그게 중요한가?
현주는 평소 도도하던 표정이 아닌 조금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감독님 시나리오 진짜 재밌었어요. 꼭 절 생각하면서 쓰셨든 아니든 상관없이 정말 여주인공에 몰입되는거 있죠? 끝까지 읽고 나서 ‘내가 해보면 어떨까?’ 생각해보니까 막 설레이는? 그런데 조금 걱정되기는 해요. 제가 재밌어서 한 작품이 잘 된적이 없었어서...”
그녀는 지금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톱스타에 올라서 있지만 드라마에서 또 흥행부진을 겪었던 그녀는 지금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게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지금 유 감독에게 흥행에 대한 확신을 얻길 기대하고 있었다.
“제가 시나리오를 딱 쓰면 보통 두 가지 느낌이 오거든요. 하나는 뭔가 재밌긴 한데 찝찝해. 똥 싸고 밑 안 닦은 그런 찝찝함이 아니라 처음 가는 길을 헤멜 때 그 불안함이 섞인 찝찝함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튼 그런 찝찝함이 있고 또 하나는 그냥 후련해요. 그냥 막 시원해. 더 할 것도 없고... 머릿속에 있는거 다 토해낸 그런 후련하고 시원함? 그런 두 가지 느낌이 있는데 후자일때는 항상 성공했어요.”
당연히 구라다.
수십 개의 시나리오를 썼다 지웠다 반복하면 그저 글쓰는 노예가 된 기분일 뿐이었다.
이번 작품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그 수많은 시나리오중 주변 사람들이 제일 괜찮다는 걸 추진중인 거였다.
“어머, 그래요?”
고 대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유 감독은 냉수를 들이키며 말을 이었다.
“560만 관객이 들었던 ‘눈을 바라봐’ 있죠? 그 작품이 딱 그랬어요. 트리트먼트를 작성하고 난 뒤에 그 후련했던 감정이 이번 작품을 쓰면서 다시 한 번 느꼈거든요.”
“어머어머... 이거 되려나보다.”
“제가 보통 흥행에 대해서 확언하거나 그러지는 않아요. 솔직히 전 상업적인 면보다 작품의 완성도를 더 신경쓰니까. 그냥 이건 제 느낌을 말씀드린거예요.”
“너무 멋있다. 내가 그래서 우리 유 감독님 좋아하잖아.”
유병세 감독은 소녀처럼 두손을 꼭 모으고 바라보는 고 대표에게 그저 씨익 미소 한번을 지어주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