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전화위복(3)
“반갑습니다~ 너무 뵙고 싶었던거 있죠? 양지원이라고 합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렸던 목소리가 상당히 젊은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젊을줄은 몰랐다.
아니, 이 정도면 어리다고 해야 맞는 것 같았다.
그리고 여배우들 만큼은 아니지만 일반인 치고 굉장히 예쁜 편이라 그것도 의외였다.
대표치고 굉장히 수수한 차림이었는데 아마 여배우들처럼 꾸미고 다녔으면 누가 배우인지 몰라볼 정도라고 해야 할까?
다만 저 영업적인 목소리 톤이 그녀를 천상계에서 일반인으로 끌어내리는 느낌이었다.
겪어본 적 없는 독특한 느낌이다.
“아, 네. 장동훈이에요. 대표님이신데 굉장히 젊으신 것 같아요.”
그녀는 입을 가리고 ‘풋’하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회사가 조금 우여곡절이 있었답니다. 사실 제가 창업주 손녀 되거든요.”
저 딱딱 끊어지는 특유의 경박한 말투 역시 그랬다.
“아... 그러신가요?”
“보통 이런 경우는 경영 능력이 떨어져서 회사를 자주 말아먹고는 하는데 제 경우는 이미 어느 분께서 말아 드신 회사를 일으켜 세운 경우니까 선입견 없이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하하하!”
“대단하시네요.”
사실 동훈도 그녀가 오기 전에 ‘빛그림’이라는 배급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아본 상태였다.
동훈이 이 바닥에 처음 들어왔을때까지만 해도 빛그림이라는 배급사는 꽤나 알아주는 배급사였기에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같이 일해본 적은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사라진 이름이어서 마침 궁금하던차에 직원들을 시켜 알아보니 아주 망해도 폭삭 망했다가 요즘 서서히 애니메이션을 통해 회복하고 있는 중이라고 들었다.
바뀐 대표에게 상당히 운이 따른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 대표가 이렇게 어릴 줄은 몰랐고 또 이렇게 자신만만할 줄도 몰랐다.
저 당당히 편 어깨와 자신만만한 눈빛만 봐도 그녀는 자신의 실력에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제가 소싯적에 애니메이션 좀 봤거든요. 앉아도 될까요?”
“아, 미안해요. 앉으세요. 커피나 쥬스 중에 어떤걸...?”
“그냥 물 주세요. 얼음 동동 띄워서 아주 시원하게.”
“네. 알겠어요.”
동훈은 자신이 직접 얼음정수기에서 얼음을 가득 넣어 그녀 앞에 내려놓았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A&P라는 회사를 알고 있는 곳은 많아도 막상 그곳과 거래하는 회사는 많지 않더라구요.”
“맞아요. 솔직히 저희도 그곳하고 같이 일하게 된건 순전히 운이었거든요. 그 회사 대표가 홍콩 사람이라고 말씀드렸죠?”
“네.”
“어릴 때는 일본에서 살았대요. 그래서 한국 애니메이션보다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더 친숙하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한국 영화는 그렇게 인정받는 편이 아니니까... 아, 이건 장동훈 감독님을 디스하는게 아니라 그냥 세계 영화시장에서 한국의 위치를 말씀드린 거예요.”
“그럼요.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국제적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회사는 분명해요. 단지 대표를 비롯해서 그쪽 직원들의 입맛이 무척 까다롭거든요. 제가 처음 만났던 파리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도 1차 티저영상을 본 그 자리에서 번역은 어떻게 할 거냐, 완전 편집본은 언제 받아볼 수 있냐, 이슬람권에 나가려면 이런저런 내용이 없어야 하는데 괜찮은 거냐, 등등등 엄청 까다롭게 굴었거든요.”
“아...”
“그리고 애초에 A&P 직원들은 한국에 들어와 있지도 않아요. 그래서 그쪽이랑 접촉하려면 홍콩에 가거나 메일을 통해서 영상을 보내야 하는데 글쎄요. 국내 영상물 제작사들 중에 그쪽이랑 컨택하려고 마음먹은 곳도 몇 없을 거라 메일 주소를 아는 사람도 별로 없을 거예요. 해외 판매를 하는 데가 거기만 있는 곳도 아니고... 국내에서 친숙한 회사는 따로 있기도 해요.”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녀의 회사를 홍보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심 재밌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그럼 우리 쪽에 왔던 A&P의 제안이 거짓에 가깝다는 거죠?”
“확실히 아니라고는 말씀드리기 어려운게 저희를 통하지 않고 다이렉트로 A&P와 계약을 맺고 컨택을 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일단 저희는 그런 이야기를 듣지 못했고 더군다나 A&P가 한국 영화에 관심 있다는 말은... 으흥~ 만약 그랬으면 저희가 지금까지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다른 좋은 영화를 제안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움직였을 거라는 말이었다.
“그럼 만약에 우리쪽에 들어온 제안이 거짓이라면 아예 A&P에서 우리 영화의 편집본을 보지도 않았겠네요.”
“그렇긴 하겠지만 사실 원하신다면 언제든지 컨택은 가능하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씨익 웃는다.
저 웃음이 얼마나 천연덕스러우면서 귀여운지 동훈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그런가요?”
“어머, 왜 그렇게 웃으세요? 못 믿으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아니에요. 그냥 이 상황이 재밌어서요. 살다보니 영화 만드는 사람들한테까지도 사기를 치려는 사람들이 있구나 싶기도 하고...”
“아유, 그럼요.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요. 그래도 감독님은 나은 편이에요. 제가 회사 처음 맡았을 땐 채권자들이 자꾸 회사문을 두드려서 직원들한테 집에서 일하라고 했었거든요. 직원들이 사무실로 출근한게 나 대표 자리에 앉고 한... 두 달 뒤부터였나? 하여튼 그랬어요.”
“굉장히 힘드셨겠네요.”
“말도 마세요. 지난 일이니까 쉽게 말하지만, 저 진짜 별의 별 생각을 다 해봤다니까요. 그래도 어떻게 A&P 만나서 계약 맺고 판권 매출로 빚부터 틀어막고 보니까 어찌어찌 여기까지 굴러왔네요. 후후... 그럼 이제 그 양반은 언제쯤 오나요?”
“올 때 됐습니다.”
오늘 그녀만 부른게 아니었다.
도경민 대리를 다시 불러 이번에는 계약을 할 것처럼 말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럼 그때까지 제가 A&P에 제안했다는 영화의 티저 영상을 좀 볼 수 있을까요?”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는걸 보니 굉장히 기대하고 있나 보다.
그리고 사실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네. 잠시만요.”
동훈은 자신의 자리에 있던 노트북을 가지고 와 그녀 앞에 세팅하고 ‘한강의 괴물’ 3분짜리 1차 예고편을 틀어주고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밖에서 눈치를 보던 유지은 팀장이 쪼르르 달려왔다.
“뭐래요?”
“확실히 이쪽이 훨씬 신뢰성이 있는데요?”
“음... 이거 뭐 누가 진짜인지...”
“장덕수 대표는 아직 못 만났죠?”
직원이 찾아가 보니 사무실은 멀쩡하게 운영중이라고 한다.
그래서 더 헷갈리는 중이었다.
“하필 해외 출장중이라고 하니... 정말 사기일까요? 정말 타이밍도 딱 맞게 해외로 나가 있다고 하니까 더 의심스럽긴 해요.”
“일단 도경민 대리 올때까지 기다려 보자구요.”
이후 유 팀장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20여분 정도 시간을 보냈을 때 도경민 대리가 여느 때처럼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무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동훈은 도경민 대리와 유지은 팀장을 데리고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다.
도경민 대리는 회의실에 들어오면서 어느 젊고 예쁜 여자가 앉아 있어 잠시 멈칫하더니 동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일단 앉으세요. 여기 앉으신 분은 배급사 ‘빛그림’의 양지원 대표라고 해요.”
“배급사 ‘빛그림’이요?”
그의 물음에는 왜 빛그림에서 나와 있냐는 물음이 담겨있었다.
“네, 어제 빛그림에서 A&P 쪽에 우리가 해외 판매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더라구요.”
동훈이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양지원이 나섰다.
“안녕하세요. 빛그림 양지원 대표에요. 실은 우리 직원이 어디서 들었는지 A&P에서 DH 미디어의 한강의 괴물을 해외판매한다는 말을 저한테 해주더라구요. 한국에서 제작하는 애니메이션을 거의 독점으로 A&P에 납품하는 배급사가 우리였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가 뒤쳐질 수 없다는 생각에 오게 됐어요.”
“아니, 그건...”
“맞아요. 상도의가 아니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요. 알아보시면 알겠지만 저희가 얼마 전에 파산을 겨우 넘길 정도로 열약한 사정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일단 회사 직원들 월급은 줘야 하니까요. 그래서 우리 공정하게 경쟁하는게 어떨까 싶은데... 안될까요?”
도경민 대리는 말도 안 된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쪽 사정이야 어쨌든 이건 너무하신거 아닙니까?”
“죄송해요. 저희 사정이 너무 어려워서요. 그리고 지금 중요한건 DH 미디어에 누가 더 알맞은 파트너가 되느냐 같은데...”
그녀가 이렇게 얄밉게 나오니 도경민 대리도 더 나갈 수 없었다.
남의 회사에서 싸움판을 벌일 수도 없고 법적으로도 문제될게 없으니 말이다.
“아... 정말... 황당합니다.”
“죄송해요.”
말로는 죄송하다고 하지만 그녀는 표정에 전혀 미안하다는 티를 내지 않았다.
동훈은 속으로 웃으며 말했다.
“일단 진정하시구요. 어쨌든 이렇게 된 상황입니다. 그래서 우리 입장에서 비교해보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배급수수료율과 배급일정, 그리고 스크린 확보를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와 가장 중요한 A&P와 얼마나 잘 협업해서 매출액을 어디까지 확보해주실 수 있을지 말씀 부탁드릴게요.”
도경민 대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자리에 앉았다.
그러면서 계속 양지원의 얼굴을 보다가 자신의 서류가방을 흘깃거렸다가 했는데 그가 그렇게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천천히 가방에서 서류를 꺼낸 뒤 말했다.
“오늘 당장 결정하실게 아니라면 우리에게 조금 시간을 주시는게 어떻습니까? 수수료율을 대표님과 조율했으면 하는데요.”
“그 부분은 감안해서 듣겠습니다. 미리 말씀을 안 드린 부분은 우리가 잘못한 거니까요.”
“크흠... 그럼...”
그는 펼쳐놓은 파일을 주섬주섬 만지다가 말했다.
“우선 A&P와 협의한 바로 150개국의 해외 판매를 적극 추진하겠다고 밝혔는데...”
이때 양지원이 물었다.
“어? 저희는 126개국인데... 저희보다 많네요?”
순간 도경민 대리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아무래도 저희가 그쪽과 다양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150개국에 모로코가 들어가나요?”
양지원은 팔짱을 척 끼고 등을 한껏 뒤로 제낀채 물었다.
마치 누가 보면 이 회사의 주인이 그녀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네?”
“궁금해서요.”
“그게...”
도경민 대리는 서류를 뒤적였다.
떨리는 그의 손을 보니 그가 지금 얼마나 당황하고 있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안 들어가는데...”
그 말에 도경민 대리는 지금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 저희는 모로코가 들어가네요.”
“그래요?”
“네.”
“확실한 거예요?”
도 대리는 그녀의 고압적인 태도에 얼굴을 붉혔다.
“당신이 뭔데 그렇게 묻습니까?”
“아니, 말도 안 되는 말씀을 하시길래...”
“뭐가 말도 안 된다는...”
양지원은 그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작년에 A&P에서 판매했던 작품이 모로코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거든요. ‘애완견 전쟁’이라는 애니메이션인데 거기에 나온 강아지가 죽는 장면이 너무 적나라하고 잔인하다고 모로코에서 당분간 A&P에서 취급하는 모든 작품을 거부한 상태에요. 모르셨나?”
그의 옆머리에 땀이 한 방울 흘러내린다.
양지원은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더 보탰다.
“A&P랑 협의했다고 하는데 거기 마케팅 담당자가 누군지 아세요?”
“...”
“모르시네. 정말 A&P랑 계약한거 맞아요?”
“아니, 그게...”
동훈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유지은 팀장은 가만히 핸드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