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전화위복(2)
“여기 싸인 해주시면 됩니다.”
동훈은 도경민 대리가 가리키는 서류의 결제란을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죄송한데 하루 정도 생각할 시간을 주시겠어요?”
“네? 저기... 죄송하지만 지금까지 충분히 고민할 시간을 드린거 같은데... 물론 안 되는건 아닙니다. 충분히 생각하시고 결정하시면 되죠. 급한 것도 아니고. 단지 그냥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더 생각이 필요한 부분이 있는지... 조금더 생각이 필요하실줄 알았으면 제가 며칠 뒤에 올걸 그랬네요. 하하.”
표정에는 전혀 아쉬워하는 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여유로웠고 계약이 취소된다고 해도 전혀 아쉽지 않아 보이기까지 했다.
“미안해요. 딱 하루만 시간을 더 주셨으면 합니다. 몇가지 더 체크해봐야 할 것도 있어서요.”
“몇 가지 체크할 거요?”
도경민 대리의 눈빛이 번뜩인 것처럼 보인건 착각일까?
동훈은 내심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SHOW쪽에서 상당히 좋은 제안을 해왔거든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계약서 쓰기 전까진 다 해줄것처럼 하다가 나중에 여건이 어쩌고 하면서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하니까 완전히 믿음이 가는건 아니에요. 그래도 완전히 드랍하기엔 그래서 조금더 체크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그러시군요. 알겠습니다. 대표님의 마음이 그러시다면야 우리가 기다릴 수밖에요.”
도경민 대리는 더 권하지 않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지금 상황으로만 보면 오렌지튜브 쪽에서는 급할게 하나도 없었다.
급한쪽은 영화 후반부 작업이 거의 끝나가는 DH 미디어였는데 투자받은 돈이 워낙 크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배급일정을 잡아야 했다.
“그럼 연락 드리겠습니다.”
유지은 팀장은 갑자기 회의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그래도 그 자리에서 의문을 표하지는 않고 표정관리 한 채 도 대리를 문 밖으로 배웅했다.
“SHOW에서 따로 제안한게 있었어요?”
유 팀장은 돌아오자마자 급히 물었다.
그녀가 알기론 SHOW에서 한강의 괴물을 배급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고 있기는 했지만 따로 어떤 추가 혜택을 제안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요. 전혀...”
“그럼 왜 그러셨어요?”
동훈은 무슨 핑계를 댈까 생각했지만 마땅한 방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느낌이 이상해서요.”
이 정도 말 밖에 할 수 없었다.
“느낌이 이상해요? 어디가요?”
“일단 계약을 하러 왔는데 대표가 아니라 고작 대리가 온 것도 그렇고... 솔직히 우리 장덕수 대표 얼굴 한 번 못 봤잖아요. 거기 사무실이 어딘지 가보지도 못했고.”
“전에 한번 사무실로 오라고 했었어요. 저희가 바빠서 못 간 거지만...”
당시 유 팀장이 어떤 회산지 확인하려 가려고 했었지만 급하기 일이 생기는 바람에 가지 못했었다.
“흠... 어쨌든요. 그럼 오늘 한번 갔다 와볼래요?”
“지금요? 그럼 연락해볼까요?”
“아니요. 전에 알려준 주소 있었죠? 그냥 한번 다녀와보세요. 아니다. 유 팀장이 가지 말고 직원 한 명 보내죠.”
유지은 팀장도 동훈이 뭘 걱정하는지 알겠는지 직원 하나를 호출하더니 주소를 알려주고 다녀오라고 시켰다.
“그리고 또 뭘하면 될까요? 영화진흥위원회에 알아볼까요? 아니다. 그럼 대충 서류만 보고 대답해줄텐데... 일단 장덕수 대표도 직접 만나볼게요.”
“아, 전에 ‘사기와 전쟁’이라는 영화 배급했었다고 했었죠? 거기 한번 연락해볼래요? 제작사.”
“그냥 연락해서는 안 될 것 같아요. 제가 한번 다녀와볼게요. 제작사가 어딘지는 알거든요. 거기 갔다가 오렌지튜브로 간 직원하고 상의해서 장덕수 대표를 만나 볼 수 있는지도 확인해볼게요.”
“네. 그럼 부탁드려요.”
유 팀장이 가고 난 뒤 동훈은 도경민 대리가 주고 간 계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만약 도경민 대리가 정말 사기꾼이라면 A&P라는 회사는 진짜 있는 것이겠지만 저 계좌는 실제 A&P의 계좌가 아닐게 분명했다.
한편으로는 괜히 엄한 사람 잡는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 사기꾼이었다고 여기서도 사기꾼이라는 법은 없지 않은가?
물론 김영웅 감독이 있던 차원에서 배우였던 이가 여기서도 배우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지만 항상 똑같은 삶은 사는건 아니니까.
그래서 함부로 경찰에 연락하지는 못하고 끙끙 앓는 중이었다.
일단 저 A&P라는 회사의 진짜 임직원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게 첫 번째인데...
동훈은 먼저 고은숙 대표가 줬던 연락처를 뒤졌다. 그리고 하나하나 전부 연락하기 시작했다.
*
한때 대한민국에서 나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던 배급사인 ‘빛그림’은 이제 그 명성을 잃고 중소규모 배급사로 전락해버렸다.
이게 다 전 대표인 유명규 때문이었다.
이제는 이름도 불리지 않고 회사 직원들에게 암묵적으로 ‘그 새끼’로 통하는 그는 잘 나가던 회사에 전문경영인으로 참여한 이후 각종 사업에 진출했었다.
사옥을 짓고 주식에 투자했으며 결정적으로 영화 제작을 시작하면서 탄탄하던 회사가 점차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던 거다.
그 새끼 몸에 귀신이 붙었던 것인지 하필 재수도 없었다.
투자했던 주식이 폭락한건 대단한 일도 아니었다.
주변에 주식투자하는 사람들 보면 성공하는 사람들보다 실패하는 사람이 많았던 만큼 회사 직원들도 그 주식투자가 성공하리라고 생각한 이들은 별로 없었으니까.
문제는 야심차게 시작했던 영화 제작이 연달아 망하면서부터였다.
우리나라 문화산업을 쥐고 흔드는 대기업에 맞서 정면승부 해보겠다는 야심으로 제작한 백억 이상이 투자된 블록버스터는 50만 관객으로 폭망해버렸고 이후 제작한 영화들마다 망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돈이 안 되니 드라마를 제작해보겠다는 말에 직원들이 또 말렸지만 그는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누구의 말도 듣지 않고 수많은 돈을 끌어들여 투자했다가 또 실패의 쓴맛을 봐야만 했다.
이렇게 되니 짓던 사옥에 들어가야 할 자금이 부족해서 공사는 중단되고 결국 거금을 들여 샀던 부지는 경매로 넘겨야 했다.
그렇게 쓰러져가는 회사를 일으킨 사람이 바로 회사 창립자의 손녀이자 지금 대표를 맡고 있는 양지원이었다.
이제 이십대 중반인 그녀는 회생선고를 받은 회사를 일으켜 세우며 나름 직원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바탕엔 어릴때부터 애니메이션 오타쿠였던 그녀의 작품보는 안목이 있었다고 할 수 있었다.
“돼지불백 콜?”
“대표님이 쏘시는 거예요?”
“내가 쏜다기 보단 회사가 쏜다고 봐야겠죠?”
“아싸, 2인분 먹어야지.”
양지원이 법인 카드를 들고 흔들자 직원들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때 대표 자리에 있던 전화가 울렸다.
“네, 빛그림입니다.”
“안녕하세요. DH 미디어 장동훈 대표라고 합니다. 양지원 대표님 되시나요?”
“네? 누구시라구요?”
“DH 미디어의 장동훈이에요.”
양지원은 급히 자리에 앉으며 목소리를 다듬었다.
“어머, 장동훈 감독님~ 안녕하세요. 전 빛그림 양지원 대표라고해요. 개인적으로 너무 팬입니다.”
직원들은 장동훈 감독이라는 말이 나오자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며 지원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지원은 그런 직원들에게 손을 휘저으며 저리 떨어지라는 행동을 취했고.
“아, 네. 감사합니다.”
“저희 회사에 어떻게 다 연락을...”
“혹시 A&P라고 아세요?”
“A&P요? 영상물 해외판매 업체 말씀하시는 건가요?”
“맞아요.”
“네, 저희랑 몇 번 거래한 업체에요.”
쓰러져가는 회사를 일으켜 세울 때 절대적으로 도움을 회사가 바로 A&P였다.
애니메이션 제작사와 배급사에게는 영화나 드라마보다 더 해외판매가 중요하다.
이유는 압도적으로 매출 신장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애니메이션은 어떻게 번역이 되고 누가 성우를 맡느냐가 상당히 중요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토리와 그림체만 좋으면 매출이 잘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작년 프랑스 파리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참여했다가 컨택하게 된 A&P는 양지원에게는 구세주나 다름 없었다.
“아 그래요? 어... 그럼 혹시 A&P가 주로 거래하던 계좌번호가 있나요? 거래마다 계좌가 바뀌거나 그러진 않죠?”
“그럼요, 물론이죠.”
“그럼 잠시만요. 제가 알고 있는 계좌랑 비교할 수 있을까요?”
“네? 아, 네.”
지원은 당황스러웠지만 일단 장동훈의 이름값이 있으니 일단 거절하지 않았다.
“계좌은행은 UBS구요. 번호가...”
“잠시만요. 걔들은 스위스 은행 안 써요. 대표가 로이스 첸이라고 홍콩사람이고 본사도 홍콩이거든요. 그래서 HSBC로 거래해요.”
“아... 그런가요? 확실한거죠?”
“네.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실은 어느 배급사에서 A&P와 계약한 상태고 해외매출을 잘 연결해줄 수 있으니까 자기들이랑 계약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조금 이상해서 알아보는 중이었거든요.”
순간 양지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진짜 큰일날뻔 하셨다. 완전 다행이에요. 우리가 A&P랑 알고 있어서 다행이지... 몰랐으면 어쩔 뻔하셨어요?”
“그러게요. 참 다행이네요.”
수화기 너머로도 안도하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러지 마시구요. 그래도 아직 확실한 건 아니니까 제가 그 사람을 한번 만나보는건 어떨까요?”
“대표님께서요?”
“뭐든지 확실해야 하잖아요. 그대로 만약 진짜면 엄한 사람 잡는게 되니까 저도 마음이 불편하구요. 제가 어지간한 A&P 직원들은 거의 다 알고 있고 직접 만나보면 정말 A&P랑 계약된 건지 확인이 가능하니까 문제 없을 거예요.”
“아...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그럼 일단 제가 거기로...”
“아뇨, 제가 갈게요. 대표님 요즘 한창 바쁘시잖아요. 제가 A&P 관련 자료들 준비해서 방문하도록 할게요. 언제가 괜찮을까요?”
대뜸 방문하겠다는게 당황스러운지 수화기 너머로 잠시 말이 끊겼지만 이내 동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든지 괜찮습니다. 제가 연락처 남겨드릴게요.”
“네. 그럼 최대한 빠른 시간에 방문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때 뵐게요~ 네~”
전화를 끊은 지원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꺄약!”
“왜요?”
“어떻게 된 건데요?”
직원들이 물어오자 그녀는 가슴을 쓸어내리곤 말했다.
“장동훈 감독이 글쎄 A&P를 사칭한 누군가한테 사기를 당할 뻔했다네?”
“네? 어쩜 그런 일이...”
“그런데 왜 대표님이 좋아하세요?”
지원은 코웃음을 치며 검지를 흔들어보였다.
“이거이거 아무것도 모르는구만. A&P에다가 영화를 팔려다 사기를 당할뻔했다고 하잖아요. 그럼 A&P랑 계약을 맺고 있는 우리가 대신 DH 미디어랑 배급 계약을 맺을 수 있다는거 아니야?”
“어? 대표님, 영화 배급하시려구요?”
“우리 원래 영화 배급사였어요, 이거 왜 이래? 다들 잊어버린거야? 그런데 이거 설마 한강의 괴물 배급 계약이었나?”
“그거 제작비가 백억 넘는다고 하던데...”
그 말을 듣자 양지원이 움찔한다.
“그, 그래요?”
“스크린을 최소 천개 이상은 확보해야 할 텐데...”
“뭐... 불가능한거 아니잖아요?”
직원들 모두 그녀의 눈길을 피했지만 지원은 콧노래로 트로트 가락을 흥얼거리며 A&P에 관련된 서류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만 딱 믿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