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64화 (64/116)

# 64

전화위복(1)

한적한 시골길을 따라 운전하기를 30여분 정도, 동훈은 저 멀리 기와지붕이 보이는 걸 보고 속도를 죽였다.

도착한 곳은 충주에 위치한 한 추모공원.

1년에 한번씩은 꼭 들렀지만 작년은 바빠서 오지 못했다.

사실 바쁘다는건 핑계였고 진짜 이유는 성공을 앞두고 마음이 약해지기 싫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여전이 똑같은 미소로 자신을 반기는 엄마가 있었다.

“나 왔어. 작년엔 바빠서 못 왔어. 미안... 그래도 이해해 줄거지? 와서 괜히 짜증만 내고 가는 것보단 낫잖아. 그리고 나 이제 완전 스타됐어. 못 믿겠지? 잠깐 기다려봐.”

동훈은 재빨리 기사를 검색했다.

[악질형사 5백만 돌파!]

[거침없는 악질형사의 상승세, 어디까지 갈까?]

동훈은 핸드폰에 뜬 기사를 보고 슬며시 미소지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들어 앞을 향해 내밀었다.

“엄마, 보여? 아들이 만든 영화가 이렇게 잘 나가고 있대. 엄마는 내가 영화감독이 꿈이라고 했을 때 싫어했지? 솔직히 경영학과는 나랑 안 맞았어. 회사생활이 재미도 없었고. 뭐 이제는 회사 대표가 되긴 했지만.”

유골함에 담긴 엄마에게 기사를 보여주며 중얼거리던 동훈은 슬쩍 눈물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이제는 아들 돈 걱정 안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사먹어. 엄마 살아있었다면 내가 우리 엄마 좋아하는 황태구이랑 간장게장 배터지게 사줬을텐데 아쉽다. 그리고 나 요즘 엄청 인기 많아. 온갖 연예 프로그램 작가들이랑 연예인 소속사에서 어떻게 번호를 알았는지 계속 연락이 와. 그리고 여자들 있는 술집에서 술 사준다는데도 있었는데 거긴 안 갔어. 엄마 아들이 또 선은 잘 지키잖아?”

동훈은 중학교 졸업사진때 같이 찍은 사진은 물끄럼히 바라보았다.

저때가 엄마가 아프지 않았을 때였다.

이후 암으로 고생했을 때 찍은 사진은 일부러 두지 않았다.

엄마도 예쁜 사진을 두고 싶어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리 아프다. 조금 앉자.”

동훈은 아무것도 없는 맨바닥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고개를 조금 들어야 엄마의 얼굴이 보였지만 계속 허리를 구부정거리며 숙이고 있을 바에는 이렇게 앉아서 보는게 편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곳에 올 때마다 항상 이렇게 앉아서 몇 시간이고 시간을 보내다 헤어졌었다.

“사실 작년에 아주 신기한 일이 있었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인데 엄마한테만 이야기할게.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거야. 솔직히 주변 사람들한테 말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 같았어. 그런데 그대로 말하면 미친놈 취급을 받을게 뻔해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지. 그런데 엄마는 믿을 거 같아. 원래 엄마는 내 거짓말 다 믿어줬잖아. 그런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그리고 엄마는 영혼이 돼있으니까 어쩌면 이게 진짜라는걸 알지도 모르겠다. 뭐냐면...”

동훈은 친구에게 이야기하듯 작년 그 때의 일 이후로 벌어졌던 자신의 이야기를 천천히 늘어놓았다.

아무도 없는 공간에 홀로 중얼중얼 이야기하는게 처음에는 영 어색했는데 이제는 정말 앞에 사람이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렇게 몇 시간을 주절주절 떠들기를 몇 시간이 흘렀다.

더 할 말도 떠오르지 않을 때 동훈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나 갈게. 항상 올때마다 나도 힘들어서 투덜대기만 했는데 오늘은 마음껏 자랑하다 가서 마음이 좋아. 아마 다음에 올 때는 새 집을 샀다고 자랑할지도 몰라. 엄마랑 같이 좋은 집에서 사는게 꿈이었는데 진짜 아쉽네.”

동훈은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는걸 느끼곤 숨을 크게 들이쉬며 가슴을 진정시켰다.

“이제 걱정 안해도 돼. 잘 있어, 또 올게.”

사진을 보고 있으니 엄마가 다음에 올때는 여자친구 좀 데려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여자친구는 무슨... 나 갈게.”

동훈은 후련한 얼굴로 돌아섰다.

오늘은 막걸리 진탕 마시고 쓰러져 자야 할 것 같았다.

*

“어쩌냐? 속 좀 쓰리겠다? 벌써 5백만 넘었잖아?”

김우진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푹 기댔다.

저 구겨진 양준기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우진은 웃음을 참을 수 없었지만 최대한 표정관리에 힘쓰고 있었다.

“뭐 별로...”

입으론 별로라고 하지만 그의 기분이 지금 최악이라는 건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 알고 있었다.

“드라마는 진행 중이야?”

우진이 슬쩍 떠봤다.

“어? 어... TVS랑 편성계약 얘기중이라던데?”

“사전제작이 아닌가보네? 편성이 확정돼야 촬영이 들어가는 건가봐?”

“제작사가 큰곳이 아니라서... 송혜진 작가와 거기 대표가 상당히 친한가보더라고.”

“대표가 인맥으로 제작하는거구만?”

“뭐 아무려면 어때? 잘 나오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드라마는 작가 놀음인데 어디에서 제작하면 어때?”

“그래, 그건 네 말이 맞다.”

우진은 준기의 말에 맞장구를 쳤지만 이미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준기의 말대로 제작사는 사전제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금이 넉넉한 곳이 아니었고 제작사가 믿을만하지 않다 보니 투자자 역시 편성계약을 받으면 추가 투자를 약속한 상황이라고 알고 있었다.

당연히 추가 투자금이 들어와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아마 지금 준기의 속은 바짝바짝 타고 있을게 틀림 없었다.

여기서 이시은이 천진난만한 미소로 준기의 속을 더 긁었다.

“그런데 악질형사 진짜 재밌긴 하더라. 나 VIP 시사회 갔을 때도 다들 재밌다고 난리였거든. 머리 비우고 보기 딱 좋다고. 그런데 지금 예매율도 거의 안 떨어졌지? 이러다 진짜 천만 찍는거 아닐까?”

“천만이 무슨 옆집 개새끼 이름인가...”

준기는 스트레이트 잔에 가득 담긴 양주를 원샷으로 들이키며 이죽거렸다.

“왜? 우리 실장이 그러는데 스크린도 많고 예매율도 좋아서 정말 천만 갈 것 같다고 그러던데?”

“저러다 훅 빠져. 그런 영화 한 두 개야?”

“뭐 그럴수도 있고...”

이시은은 준기의 표정을 보곤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수긍하고 넘어갔다.

이때 문이 열리며 뜻밖의 사람이 들어섰다.

“아... 형이 왜 여기와?”

들어선 남자를 보고 준기가 짜증을 부렸다.

“너 내일 오전에 미팅있는거 알지? 그러게 왜 전화 안 받아?”

“알아서 갈 거야.”

들어온 남자는 양준기의 소속사 대표인 최영준이었다.

아무래도 내일 오전에 약속이 있는데 자정이 넘도록 연락이 되지 않으니 걱정되서 직접 찾으러 온 것이었다.

“일단 오셨으니까 앉으세요. 준기가 어디 가는것도 아니고...”

우진이 자리를 권하자 최영준 대표도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최 대표는 준기가 마시던 스트레이트 잔에 술을 따랐다.

“왜? 형도 마시려고?”

“밖에 영식이 와 있어. 왜? 내가 로드까지 해주리?”

“아... 영식이는 왜 또 불렀대?”

“걔 퇴근 못하고 있으니까 이제 미안하냐? 내가 온 건 안 미안하고?”

“형은 돈 많이 벌잖아. 영식이는 월급받는 애고.”

“그렇게 애틋하면 좀 챙겨주지 그러냐?”

“안 그래도 챙겨줘. 형이 알면 보너스 적게 줄까봐 말을 안 하는거지.”

“오호... 그러셔?”

최 대표는 의외라는 얼굴로 술을 마시곤 과일 안주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우진에게 물었다.

“개봉 준비중이지? 날짜는 확정됐어?”

“아직 배급사도 못 정했어요.”

“정말? 왜?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이 있다기 보단 제작사에서 조금 더 좋은 조건으로 배급해줄 회사를 찾는 것 같아요. SHOW랑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아 보이는건 확실한 것 같고...”

“정말? SHOW가 왜 그랬을까? DH 미디어는 이 바닥에서 거의 황금알 낳는 거위 아니야?”

“그렇게 생각 하셨으면서 왜 준기는 악질형사랑 한강의 괴물 포기하셨어요? 생각해보니까 DH 미디어에서 두 작품이나 컨택했었네.”

순간 최 대표는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잠깐 멈칫하다가 말했다.

“우리 준기하고는 안 맞아서. 아무리 작품이 좋아도 배우랑 잘 맞아야 하잖아. 우리 준기는 인상이 너무 선해. 악역이랑 안 맞지. 그리고 한강의 괴물도 그랬어. 대학때 학생권 운동하다가 회사원이 된 캐릭터가 썩 와닿지 않더라고.”

“으음...”

“그렇구나.”

우진도 고개를 끄덕였고 시은도 수긍했지만 이들은 다 내심 고소를 금치 못했다.

결국 최 대표의 말은 준기가 그런 캐릭터를 잘 표현할 만한 실력이 안 된다는 말이었고 그게 아니라면 그저 망할 것 같은 영화에 내보내기 싫었다는 변명이었으니 말이다.

“아, 그만해. 가자 그냥...”

준기 역시 그걸 알기에 짜증을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 그래도 술맛 떨어지는 참이었는데 최 대표까지 껴서 더 열받는 상황이 되지 않았는가?

준기는 우진과 시은의 인사를 받는둥 마는둥하고 가게를 나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벤에 올랐다.

“오셨어요?”

“어. 고생한다. 나 혼자 대리 불러서 갈 수 있는데 왜 왔어?”

“괜찮습니다. 하하.”

“새끼... 자.”

준기가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두 장을 꺼내 내미니 로드매니저인 영식이 황급히 손을 저었다.

“괜찮습니다. 전에도 주셨는데...”

“됐어. 받아. 지금 형 올라온다. 늦으면 못 받아.”

그 말에 영식이 두 손을 내밀어 공손이 받을 때 옆문이 홱 열렸다.

최 대표는 영식이 돈 받는 걸 못 본척하곤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인마, 나갈거면 계산을 해야지.”

“우진이가 돈 내겠지.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샀는데?”

“내가 없을때면 몰라도 회사 대표가 왔는데 어떻게 그냥 나가냐?”

“그러게 왜 와가지고는... 아니고 그리고 아까 그건 뭐야? 왜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어?”

“그러는 넌 왜 우진이랑 계속 술 먹냐? 이런 얘기 나올줄 몰랐어?”

“자존심이 있지. 내가 지금 술 안 먹겠다고 하면 내가 잘못 선택한거 인정하는거 아냐? 끝까지 아닌척 해야지.”

준기는 그렇게 말하곤 목베게를 끼고 척 드러누워 버렸다.

“그래, 자라, 자.”

최영준 대표는 이미 지은 죄(?)가 있는지라 뭐라 반박하지도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을 뿐이었다.

그저 제발 이번 드라마만 잘 진행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어서오세요. 이리로...”

유지은 팀장은 오렌지튜브 도경민 대리를 이끌고 회의실로 안내했다.

회의실에는 이미 동훈이 앉아서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도경민 대리입니다.”

“반가워요. 장동훈입니다.”

도경민 대리는 동훈이 보던 서류를 흘깃 보았다.

전부 다른 배급사에서 온 제의들임이 틀림 없었다.

“너무 바쁘셔서 이제야 뵙네요.”

“그러게요. 솔직히 전 조금 빨리 만나기를 바랬거든요.”

동훈은 의아한 얼굴로 말했다.

안 그래도 배급사 선정이 안 된 와중이었는데 파격적인 해외판매를 약속한 배급사에서 바쁘다며 계속 미팅을 미뤄 답답하던 참이었다.

이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알아본 결과 A&P라는 해외 판매사가 실제 상당한 영업력과 판매루트를 확보한 것으로 알아낸 뒤여서 답답함이 더 했던 것일지도 몰랐다.

“죄송합니다. 대표님도 그렇고 저도 계속 미팅에 계약서 작성에 정신 없었거든요.”

“뭐 바쁘시면 어쩔 수 없죠.”

작은 회사치고 확실히 탄탄한 기반이 있어서 그런지 저런 바쁜 모습도 내실있어 보이긴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도경민 대리의 얼굴이 낯이 익은 느낌이었다.

이런 느낌을 강호에게서 받았었기에 혹시 저런 얼굴의 배우가 있었나 빤히 바라보았다.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니에요. 제가 아시는 분이랑 닮으셔서...”

“하하, 그런가요? 굉장히 잘생기신 분이신가봅니다. 하하하. 농담이에요, 농담.”

동훈도 같이 웃었지만 계속 도경민 대리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얼굴도 하얗고 잘 생겼으니 분명 배우였음이 틀림 없을 거다.

“여기 제안서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초기 계약금으로 3억이 필요한데 우리가 아니라 A&P로 입금되는 겁니다. 그럼 그쪽에서 바로 해외판매를 시작할거고 늦어도 한 달이면 성과가 나올 겁니다. A&P에서도 편집본을 보고 아주 흥분하더라구요. 이런 작품이면 상당히 비싼 가격에 팔 수 있을 것 같다구요.”

“그런가요? 제발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유 팀장이 웃으며 받을 때 계속 도경민 대리의 얼굴을 생각해내던 동훈의 머릿속으로 배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영화 제작사에게 접근해 충무로 일대를 털어먹었던 희대의 사기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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