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정면승부(3)
CG 회사에서 양호민 감독과 같이 종일 작업하다가 저녁에 이르러서야 사무실로 돌아온 동훈은 퇴근도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유지은 팀장을 볼 수 있었다.
“왜 아직 퇴근 안 했어요? 오늘도 일이 남았어요?”
영화 개봉을 하기전이라면 몰라도 이미 개봉하고 난 뒤에는 아래 직원들은 몰라도 유지은 팀장만큼은 여유가 조금 생긴 편이었다.
“실은 아까 오렌지튜브라는 배급사에서 사람이 왔었어요.”
“오렌지튜브? 그런 회사가 있어요?”
“저도 처음 들었는데 LS엔터테인먼트 장덕수 전무가 회사를 나가서 차린 거더라구요.”
“어? 나 그 사람 이름 들어봤는데.”
충무로에서 오래 있다보면 배급사나 제작사의 임원들 정도는 알기 싫어도 알게될 때가 있다.
이중 장덕수 전무는 동훈도 알만큼 이 바닥에서 오래 자리를 자킨 사람으로 LS엔터를 지금의 위치까지 올리는데 상당한 공헌을 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다.
“이 바닥에서 그 사람 모르면 간첩이죠. 어쨌든 그 사람이 LS엔터를 나가서 새로 차린 회사인 것 같아요. 워낙에 인맥이 짱짱한 사람이라 영업력은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거예요.”
“하긴... 인맥이 대단한 분이시긴 하죠. 뭐 어쨌든 한강의 괴물 때문에 왔대요?”
“네. 우리가 이번에 SHOW를 깐게 소문이 돌긴 돌았나봐요. 아직 몇 군데 밖에 컨택을 안했는데 벌써 다른 회사에서 이렇게 직접 찾아올줄은 몰랐어요.”
“음... 그런데 소형 배급사라... 이번에 SHOW도 스크린 확보를 제대로 못 해줬는데 그런 소형 배급사에서 스크린 확보를 제대로 해줄까요?”
이번 악질형사의 총 제작비는 약 70억여 원.
그렇기에 스크린 확보가 제대로 안 돼 짜증이 나긴 했지만 냉정하게 다시 생각했을땐 입소문만 타면 충분히 이익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당연히 지금에 와서는 손익분기점 돌파는 당연하고 어느 정도나 수익을 낼지 기대하기에 이르렀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번 한강의 괴물은 다르다.
제작비만 120억이 넘어가는 대작 영화라 초반 스크린 확보가 필수이며 만약 여기서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게 되면 향후 다른 작품을 제작할 때 상당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될 게 분명했다.
“저도 그게 걱정이었는데 거기 직원이 A&P와 계약한 계약서 사본을 보여주고 갔어요.”
“A&P? 거기는 뭐하는 덴데요?”
“해외 배급 판매사에요.”
“그래요? 어쨌든 그래서요?”
“거기가 해외 판권을 독점으로 공급하는 회사라서 일단 그곳하고 계약하면 자신들하고 계약된 150개국에 바로 판매가 가능하대요.”
“정말요?”
동훈은 가볍게 듣다가 놀라 일단 직원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본격적으로 듣겠다는 자세를 취했다.
이에 유지은 팀장 역시 앉으며 자세한 이야기를 더 늘어놓았다.
“감독님도 아시겠지만 일본, 미국, 프랑스 같이 크고 우리나라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곳이 아닌 나라는 영화를 팔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이런 해외 배급 판매사에서 독점으로 우리가 직접적으로 판매 할 수 없는 자잘한 국가들에게 판매하는거죠. 150개국 각각의 나라 배급사와 150개의 계약서를 쓸 필요 없이 이곳과 계약하면...”
“150개국에 판매하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다는 거네요?”
“맞아요. 예상 매출액은 70에서 80억 원 가량이구요. 물론 중계 수수료는 있어요. 하지만 각 나라들과 계약을 따로 진행할 때 들어가는 경비와 언어적, 문화적 어려움을 생각하면 그 수수료가 결코 비싼건 아닌 것 같아요.”
“흠... 그렇다면 문제될 건 뭔가요?”
“딱 하나요. 이 회사가 믿을만한 회사인가. 그거 하나가 마음에 걸리네요.”
“흐음... 확실히 그렇네. 우리쪽에서 알아볼 수 있을 만한 인맥은 없을까요?”
“일단 전에 고은숙 대표님이 주신 연락처를 가지고 알아볼 수 있는데 전부 확인해보는 중이에요.”
동훈은 손바닥을 딱 때렸다.
“아, 맞다. 그게 있었지.”
“그걸로 부족할수도 있는데 어쨌든 그거라도 있으니 뭔가 할 수 있는건 생긴 셈이죠.”
“그런데 그 회사에서 배급한 영화는 뭐가 있대요?”
“얼마 전에 개봉했던 ‘사기와 전쟁’이라는 영화 아시죠?”
동훈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게 있었어요?”
“그래도 80만 관객이나 동원한 건데...”
“제가 좀 바빠서...”
사실 엄청 재밌다고 소문난 영화가 아니면 별로 관심이 가지도 않았었다.
“네. 어쨌든 여름 성수기에 개봉했던 영환데 톱스타를 내세운 영화는 아니라서 마케팅도 그다지 화려하게 하지도 못했어요. 나름 연출도 깔끔하고 재미있어서 80만 관객 동원한걸로 나와있구요.”
“손익분기점 넘었대요?”
“간당간당하게 실패했나봐요. 어쨌든 배급사는 손익분기점이랑 크게 상관 없으니까... 회사 설립한지 6개월이긴 한데 우리가 첫 타자는 아닌 셈이에요. 그런 면에서는 안심이 되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 영화가 워낙 사이즈가 있다 보니까 마음에 걸리긴 하죠.”
동훈은 해외판권 매출이 80억이라고 하는데도 막 달려들지 않고 차근차근 준비하는 유 팀장의 자세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자신이라면 어설프게 좀 알아보다가 덥썩 물려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일단 알아보시고 나중에 미팅 한번 잡아요. 나도 얼굴 보면서 이야기 좀 해보죠. 그리고 배급사 결정이 늦었으니까 최대한 빨리 진행해봅시다.”
“그래요. 하... 이놈의 일이 줄지를 않네.”
유 팀장은 투덜대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다.
*
이틀 뒤, 파라곤 파트너스.
조현준 실장은 갈수록 짜증이 솟구치고 있었다.
한 방 먹여주려고 했던 장동훈 감독은 오히려 상승 탄력을 받아 예매율이 50% 가까이 올라가고 있었고 자신들이 투자했던 애니메이션은 30%대로 주저 앉았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빠졌어?”
한경록 대리를 고개를 푹 숙인채 대답했다.
“현재까지 150개 정도 빠졌습니다.”
“그거 전부 악질경찰한테 넘어갔지?”
“네...”
“후...”
조 실장은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상황이 딱 며칠전에 예상했던 그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이렇게 간다고 해서 투자금을 손해본다거나 하는건 아니었다.
제작비가 무려 200억이 넘는 초대작이라고는 하지만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영화와 달리 시장이 국내로 한정되어 있지 않아 이 정도 투자금은 충분히 뽑아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 기간에 맞춰보겠다고 제작사에 가서 쌩쑈를 하고 배급사를 재촉하면서 스크린도 오버해서 확보했는데 이게 모두 부질없는 짓이 되고 말았다는 거였다.
한 마디로 개쪽도 이런 개쪽이 없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됐고, 다음주에는 어떻게 될 것 같아?”
“LS엔터 쪽에서 나오는 말이 스크린을 더 이상 붙잡고 있기 힘들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주 내내 절반씩 가지고 갈 것 같다고...”
“씨발, 반반씩 나눠먹을 것 같다는 말이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더도 말고 딱 1주일만 지나면 악질형사는 손익분기점을 뽑고도 남을 거다.
“어쩔 수 없지. 이번엔 내가 졌다. 된통 당했어. 이제는 DH 미디어 잘 보고 있다가 투자 할만한 작품 있으면 최대한 빨리 접근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그 순간. 실장실의 전화에 빨간 불이 깜빡였다.
띠리링...
“씨발, 전무님이다.”
경록은 이마를 감싸쥐는 조 실장을 보며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조 실장은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은 후 수화기를 들었다.
“네, 전무님. 네. 올라가겠습니다.”
조 실장이 전화를 끊자 경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됐다. 네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조 실장은 경록의 어깨를 툭 치고 전무실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전무의 심기가 무척이나 안 좋다는 걸 말이다.
평소에는 동네 아저씨처럼 살갑게 굴지만 일단 뿔이 돋았다 하면 조폭 저리가라할 정도로 미친개처럼 굴었다.
잠시 숨을 고르고 전무실 문을 두들겼다.
똑똑...
“조현준입니다.”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퍼팅 연습을 하고 있는 전무의 뒷 모습이 보였다.
180이 넘는 키에 110키로가 넘는 거구의 송철규 전무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고 굉장히 순둥순둥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다.
물론 지금처럼 화가 나 있을때는 완전히 딴 사람이 되지만 말이다.
딱... 딱...
송철규 전무는 부동자세로 서 있는 조현준 실장을 돌아보지도 않고 한동안 퍼팅 연습을 이어갔다.
마치 없는 사람인냥 계속 퍼팅에 매진하던 그는 조 실장이 다리가 저려온다고 느낄 때쯤 입을 열었다.
“너 일을 왜 그렇게 해?”
“죄송합니다.”
“뭐가 죄송한지는 알고?”
그는 여전히 등을 돌린채 시선을 골프채 끝에만 두고 있었다.
“이번 영화의 실적이 예상보다 저조할 수도...”
탕!
송 전무는 골프채를 내던지고 손윽 탁탁 털고는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저게 이번에 그립감이 영 볼로네. 버려야 겠어.”
조 실장은 송 전무의 말이 저 골프채가 아닌 자신이 가리키는 것 같았다.
“...”
“작품 만들다보면 성공할수도 있고 실패할수도 있지. 좀 많이 실패하면 뭐 속은 좀 쓰릴거야. 나도 위에 깨지고 그럼 너도 나한테 좀 깨지겠지. 기분은 좀 더럽겠지만 소주 한잔 하고 나면 다 잊어버리고 새로 시작하면 돼. 그게 우리 일이잖아. 그런데 이번 작품은 그 정도로 깨질 만큼 손해가 날 것 같아?”
사실 예매율이 기대했던 것에 비해 좀 떨어졌을뿐이지 다른 애니메이션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 출발이라고 보는게 맞았다.
“시리즈 자체의 팬덤도 상당하고 작품성도 있어서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쏠쏠한 이익을 가져다 줄 작품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투자자 입장에서 이익보면 장땡이지. 그럼 문제될 거 없네?”
“...”
“그럼 내가 널 왜 불렀을까? 내가 여기까지 얘기해 줬는데도 아직 감이 안 잡혀?”
조 실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여기서 어리버리하면 송 전무 옆 골프가방에 무수히 꽂혀 있는 골프채 중 하나가 자신의 머리로 날아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순간 송 전무가 일 처리 방식을 문제 삼았다는 걸 깨닫고 말하려 할 때 송 전무가 먼저 말했다.
“왜 쓸데없는 짓을 했어? 너 일부러 DH 미디어 밟으려고 그랬다며?”
“네? 그게 무슨...”
“LS엔터에서 다 들었어. 개봉시기 억지로 맞췄다며?”
“그게 실은... 장동훈 감독이 입을 섣부르게 터는 바람에 제작사 쪽 직원들이 들고 일어나서 굉장히 손해를...”
“그래서 억지로 갖다 붙여? 야 이 병신 새끼야. 우리가 일부러 밟으려고 했다는거 소문 안 돌거 같아? LS는 애니메이션만 배급하는 곳이 아니야. 영화계 인맥도 수두룩하다고. 걔들이 자칫 입이라도 놀려봐. 너 그거 뒷감당 자신 있어?”
설마 입을 놀릴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들과 자신들 사이가 어떤 관계인가?
무수한 고난과 꿀처럼 달콤한 열매를 함께하며 커온 사이가 아니었던가?
“그 정도로 입이 가벼운 사람들이 아니라고 판단해서...”
“인생이 어디 생각했던대로만 굴러가디? 좋아, 말은 안 새나온다고 치자고. 그럼 끝나?”
“네?”
“넌 어차피 언제 개봉해도 손해 안 날 작품이라서 개봉시기를 이때로 잡았겠지만, 문제는 장동훈 감독한테 돗자리를 너무 잘 깔아줬다는거야. 괜히 엄한 놈 스타로 만들어주는 바람에 이제 애니메이션과 블록버스터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하면 극장주들이 우리말을 안 들어도 될만한 명분을 만들어 줬다고. 인마, 이길 싸움을 걸어야지. 아니면 싸우면 무조건 이기든가. 이게 뭐야?”
조현준 실장은 썩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