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정면승부(1)
제작사를 상대함에 항상 갑의 위치를 고수하던 김용민 부장은 오늘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미안합니다만 일단 저희도 최선을 다하는 중입니다.”
동훈이 황당함에 입을 다물자 않자 유 팀장이 대신 나섰다.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천개도 아니고 800개라뇨. 정확히 칠백 구십... 몇 개라고 하셨죠?”
“796개.”
“네. 796개. 부장님, 저랑 부장님이랑 하루 이틀 본 거 아니잖아요. 그럼 이러시면 안 되죠. 정도라는게 있는 건데 이건 너무 심하잖아요.”
“나도 아는데... 극장주들이 안 받아주는건 내가 어떡하냐?”
“그럼 받아주게 해야죠. 그러라고 배급사에다 일 맡기는거 아니에요? 극장주들이 원하는대로 수긍할거면 뭐하러 배급사에다 일을 맡겨요? 그냥 우리가 배급하면 되지.”
“유 팀장아. 너 말 너무 심하게 한다.”
“알아요, 심한거. 근데 우리는 이 영화에 생존을 걸었다구요! 그런 상황에 지금 제가 흥분 안 하게 생겼어요? 고작 800개 걸어줄거면 초기에 무슨 협상을 그렇게 똥폼 잡으며 하셨냐구욧!”
“...”
유지은 팀장은 분명 선을 아슬아슬 넘나들며 소리를 빽빽 질렀지만 김용민 부장은 뭐라 대답하려다가도 고개를 돌려버렸다.
아무리 불가항력적인 상황이라고는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난관을 헤쳐가는게 자신들의 일이라는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난리인 상황이 분명 밖에 알려졌을텐데도 그 누구도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이 똥통에 자칫 모습을 드러냈다가 옴팡 뒤집어 쓸게 분명하니 말이다.
“어쩔거예요? 진짜 이대로 개봉시킬거예요?”
김용민 부장은 유지은 팀장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침묵하고 있던 동훈에게 물었다.
“감독님, 정말 죄송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습니다. 지금 ‘진격이 카프리모’가 시리즈 중 역대급 작품이 될 거라고 SNS와 포털사이트 카페를 중심으로 바이럴 마케팅을 뿌리고 있고 배급사인 LS엔터와 제작사인 팔버라이즈가 사활을 건 것처럼 극장주들을 꽉 잡고 안 놔주고 있습니다.”
“그건 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풀어줄 수 있는거 아닌가요?”
“그렇죠. 그래서 저희도 ‘진격의 카프리모’가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다고 들었을 때 곤란하긴 했지만 큰 걱정까지는 하지 않았습니다. 스크린을 절반 이상 잡아놓고 안놔줄 줄은 몰랐으니까요. 특히 방학시즌도 아닌데 말이죠. 그런데 막상 이렇게 나오니까 우리가 방도가 없습니다. 스크린 독점이니 뭐니 말은 나오겠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그런 말은 들어가게 돼 있으니까요.”
“그럼 어쩌자는 겁니까?”
“배급사 수수료를 줄여들이겠습니다.”
“하...”
최악의 시나리오가 김 부장의 입에서 나왔다.
결국 두손 두발 다 들겠다는 거다.
몇 달 전, 악질형사의 편집본을 본 저들은 무인도의 보물을 발견한 것마냥 좋아하면서도 최고의 매출을 올려주겠다고 큰소리 뻥뻥치면서 계약했었다.
당연히 국내에서 세 손가락 내에 드는 배급사였기에 상당한 수수료를 주기로 약정했지만 그래도 믿을만한 회사였기에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배급사의 수수료는 다른 곳이라고 해도 얼마간의 차이가 있을뿐 큰 차이는 없었기에 크게 고민도 하지 않았었다.
그런데도 수수료를 줄여주겠다는건 자신들의 무능(?)을 인정한다는 것이었고 더 이상 스크린 확보는 불가능하다는 통보나 마찬가지였다.
“후...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죠. 일어납시다.”
“아니, 감독님...”
유지은 팀장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여기서 죽치고 앉아 씨름한다고 상황이 더 나아질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수수료까지 조정을 해준다는 말이 나온 만큼 배급사에서는 해줄만큼은 다 해줬다고 생각했다.
“일정만 차질없게 잘 해주세요.”
김용민 부장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돼서 할 말이 참 없습니다.”
“네. 그럼...”
동훈은 억울해 죽을라 하는 유 팀장을 데리고 배급사인 SHOW를 나왔다.
“너무 쉽게 물러선 거 아닐까요?”
“수수료까지 조정한다고 했는데 더 이야기해봤자 서로 감정만 상할 뿐이에요. 그리고 사실 800개가 적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독립영화 수준도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우리가 너무 과하게 스크린을 확보하려고 했을수도 있어요.”
“우리가 무슨 1,500개 정도를 바란것도 아니고 1,100에서 1,200개 정도를 원한 거였잖아요. 그런데 800개는 너무 떨어진건데...”
“솔직히 극장주들이 야속하긴 한데 그들이 이해가 안 되는건 아니에요. 지금까지 가장 꾸준하게 매출을 올려줬던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두고 예측불가능한 상업영화의 비중을 올려주기는 어렵겠죠.”
“감독님 이런 상황에서 쓸데없이 냉정해지시는거 아시죠? 지금 남 걱정할때가 아니에요. 우리 걱정만 하자구요.”
“맞아요, 그렇긴 한데... 영화는 결국 입소문과 예매율이 다잖아요. 입소문 나고 예매율 올라가면 극장주들이 우리보다 먼저 반응할겁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그래도 초반에 확 빨아들여야 손익분기점을 하루라도 빨리 넘기니까 그렇죠.”
이 모든건 전부 투자금을 최대한 빨리 회수해야 한다는 제작대표로서의 마음 때문이다.
만약 지금 순수한 감독의 입장이었다면 조금 아쉽기는 했어도 이렇게 답답하기까지는 않았을거다.
그런데 회사의 대표가 되다 보니 확실히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져 있었다.
“예매율만 잘 올라가주면 초반 스크린 부족은 금방 극복될 겁니다. 800개도 아주 나쁜건 아니니까.”
동훈은 마음을 다잡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
“그래서 몇 개나 확보했는데?”
“1,600개 정도 확보했답니다.”
최영준 실장은 경록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국내 스크린 수는 정해져 있으니 이중 1,600개나 가지고 왔으면 장동훈 감독이 얼마나 가져간지는 굳이 물을 필요도 없었다.
“고생했네.”
“제가 고생했나요? LS에서 이번에 진짜 목숨걸고 잡았답니다.”
“거기 영업팀 애들 데리고 룸하나 잡아. 고생했잖아.”
“흐흐... 법인카드 한도 얼마로 할까요?”
“700. 그 이상은 안 돼.”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경록은 눈썹을 씰룩이며 특유의 간신웃음을 선보였다.
그만큼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흡족하다는 것이다.
“내용은 어때? 난 애니메이션 봐도 모르잖아.”
“굿입니다. 세계관도 더 확장시켰고 스토리도 촘촘한데다가 고난을 겪은 주인공이 최후의 무기를 완성시켰을땐 캬~ 온 몸에 카타르시스가 쫙! 올라옵니다.”
“그래, 뭐 잘 나왔으면 된 거지. 개봉은 우리가 하루 빠른가?”
“네. 일단 당일 조조로 인터넷 팬카페 단체관람이 줄지어 잡혀 있다고 합니다. 예매율은 절대 떨어질일 없구요.”
“음... 좋아. 좋은데...”
돌아가는 상황만 보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었다.
스크린도 압도적으로 확보했고 이 상태로 예매율이 떨어지지 않는다면 장동훈 감독의 악질형사가 아무리 예매율이 올라도 떨어져간 스크린을 다시 회복시키기는 힘들 거다.
그럼 자연적으로 시간이 지나다 개봉관에서 내려갈거고 그럼 원하는 매출을 올리지 못해 손익분기점 이하로 마감하는 수순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다 좋은데... 이상하게 불안했다.
마치 여행을 떠나러 공항까지 왔는데 가스불을 안 잠군 것 같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그런 기분 말이다.
“초조하십니까?”
“초조하다기보다 이상하게 일이 잘 돌아가서 그런지 어딘가에서 폭탄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야.”
“원래 일이 너무 잘 되면 불안하지 않습니까. 저도 학교에서 시험볼 때 시험이 너무 쉬우면 불안하더라구요.”
경록은 별거 아닌 듯 말했다.
사실 별거 아닐 수도 있었다.
“그렇지? 그래, 그리고 이번에 악질형사가 잘 안된다고 해도 DH 미디어에 시선 떼면 안 된다.”
“병 주고 약 주시려구요?”
“원래 어려울 때 친구가 진정한 친구인거야. 혹시나 영화는 좋은데 우리 때문에 완전히 폭망하면 가장 먼저 손을 내밀어준 사람이 우리가 돼야 해. 알지?”
“알겠습니다. 충무로 동향 빠짐없이 체크하겠습니다.”
조현준 실장은 의자에서 일어나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아우... 죽겠다. 나 사우나 좀 하고 올게.”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푹 담구고 모든 걸 잊고 한 숨 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쓸데없는 걱정을 잊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문득 궁금한게 떠올랐다.
“너 근데 이번에 나올 진격의 카프리모 완성본까지 다 본 건 아니지?”
“그건 못 봤습니다만 크게 문제는 없을 것 같은데요? 제가 크리에이터로 참여한건 아니지만 스토리 구성을 전부 확인했고 3차 편집본까지는 확인했으니까요.”
그 정도면 투자사의 입장에서 정도 이상으로 볼 수 있는건 다 본 셈이었다.
그 이상 요구하면 제작사에서 반발할게 틀림없었다.
“그래. 수고했어.”
*
일주일 뒤, 진격의 카프리모 개봉 당일인 토요일 아침.
극장앞에는 오늘 개봉하는 진격의 카프리모를 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첫 상영관에서 가장 먼저 본다는게 의미가 있는 이벤트인지 다들 잔뜩 기대어린 얼굴로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오줌 싸고 와야겠지?”
“중간에 처나가지 말고 지금 다녀와.”
“기대된다. 티저 영상보니까 기함이 한 단계 더 진화하던데 내 생각엔...”
각장 자신만의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린 친구들뿐만 아니라 성인들도 상당히 많았다.
이십대 초반의 커플부터 서른은 훌쩍 넘어보이는 커플도 많았다.
그리고 그 사이엔 진명이가 손톱을 뜯으며 홀로 서 있었다.
[괜히 혼자왔음. 커플들 아니면 다들 애기들인데... 아 개쪽팔려요]
[그렇다고 제가 갈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감독님은 카프리모 시리즈 팬이었다면서요? 혼자 가는게 뭐 어떻다고... 어쨌든 잘 보고 오세요. 파이팅!]
진명은 유지은 팀장과 톡을 주고 받으며 초조하게 기다렸다.
솔직히 카프리모 시리즈를 좋아하긴 하지만 이렇게 혼자 영화관에 와서 보는건 처음이었기에 조금 설레는 것도 없지 않았다.
“9시 반, 진격의 카프리모 입장하실게요.”
드디어 입장시간,
원래 혼자 밥먹는것도 쪽팔려하던 진명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얼굴을 가리며 자리를 찾아갔다.
하필 자신의 양 옆자리가 다 커플들이었기에 그 쪽팔림이 더욱 극대화 되었지만 이 모든 건 전부 일이라고 되뇌이며 얼른 상영관에 불이 꺼지기를 기다렸다.
십여분 동안 의미없는 광고가 지나가고 드디어 상영관에 불이 꺼졌다.
“오오... 드디어 시작이다.”
“조용히해, 병신아.”
뒤에서 들리는 남자애들의 잡소리를 흘려들으며 진명은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했다.
한참 뒤.
진명은 우르르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을 은근히 살피며 걸어나왔다.
다들 카프리모의 스토리에 관한 내용을 주절주절 떠들며 나왔지만 절반 정도는 엄청난 대작이 탄생했다며 호들갑을 떨었고 나머지 절반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구심을 표했다.
그리고 진명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온 순간 유지은 팀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딱 맞춰서 전화하셨네요.”
“어떻게 됐어요? 재밌어요?”
지명은 그녀가 어찌나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렸을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만 가지고도 알 것 같았다.
“아우...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어쨌든 엄청난게 나오긴 했어요.”
“네? 어떡해...”
유 팀장은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실망했지만 진명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근데 좀 애매해요.”
“뭐가요?”
“이게 진짜 재밌긴 한데 스토리가 깊이 파고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 카프리모 진성 팬들이면 감탄스러울만큼 명작이긴한데 라이트하게 애니메이션을 즐기시는 관객들은 너무 철학적으로 깊게 들어가는 내용 때문에 머리가 아플 것 같기도 해요. 반응들도 보니까 절반 정도는 대작이 탄생했네, 어쩌네 하고 다른 절반 정도는 조금 실망했다고 해야 하나? 하여튼 이 작품을 만든 감독은 정말 존경스럽네요. 어떻게 그런 대사를...”
“아니, 그래서 어떨거 같냐구요?”
“어... 생각보다 대박은 안 나올 것 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