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성공해야 하는 이유(3)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동훈의 악질형사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양호민 감독의 한강의 괴물 역시 주연급 캐스팅으로 투자가 빠르게 이뤄진 이후 순식간에 프리 프로덕션을 끝나가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진행이 너무 빨리 이루어진터라 충무로에서나 주변 관계자들은 우려의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두 편 모두 상당한 제작비가 들어가는 작품이었고 특히 양호민 감독의 한강의 괴물은 백억이 넘는 대작이었기에 자칫 두 편이 모두 망했다가 충무로 일대에 닥칠 안 좋은 여파를 걱정하는 거였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로 DH 미디어를 주목하는 이들이 강남 모처의 일식집에서 만났다.
“성공 할거라고 봅니까?”
조윤혁 실장은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한경록 대리의 술잔에 작은 다기 주전자에 담긴 청주를 따라주며 대답했다.
“반반. 하나는 60억이고 하나는 120억이 넘는 작품이야. 솔직히 다른 제작사였으면 둘 중 하나만 성공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을텐데 난 장동훈 감독을 도한결이나 한태주 감독 급으로 보기 때문에 반반으로 보는거다.”
“만약 120억짜리가 망하고 60억짜리가 성공하면 제작사가 망할까요?”
“아니, 60억짜리가 얼마나 성공하느냐에 달렸지만 어쩌면 장동훈 감독에게 더 신뢰가 쌓일지도 모르지. 어쨌거나 자신이 연출한 세 작품을 연속으로 성공시킨게 되니까. 120억 대작은 양호민 감독이 연출한 거라 제작자로써는 의구심이 들 수 있어도 본인 작품 또 한다고 하면 이번에는 오히려 투자자들이 더 달려들거다.”
“흠... 그럼 만약 60억 짜리가 실패하고 120억 짜리가 성공한다면요?”
“그것도 애매해. 백억 이상의 대작을 성공시키면 일단 투자자들이 거액 투자를 할 때 조금더 쉽게 결정할 수 있게 되니까. 60억 짜리가 실패하면 장동훈 감독 개인적으로는 실패라고 할 수 있지만 제작사 입장에서는 작은게 실패하고 큰게 성공했으니 큰 타격은 아니지. 역시나 다음 작품을 할 때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이진 않을 거다.”
한경록 대리는 고개를 돌리고 한잔 마신후 잔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며 말했다.
“큼... 그럼 가장 이상적인건 둘 다 실패하는거겠네요.”
“맞아. 그럼 이번 영화를 끝으로 DH 미디어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겠지. 사실 두 편의 영화를 제작하면서 둘 다 성공하는 것보다 둘 다 망하는게 더 확률이 커. 어떻게 보면 그냥 가만히 둬도 알아서 망할 확률이 높은데... 어째 느낌이 꼭 그렇지 않다는게 문제야.”
“실장님이 그렇다고 하시니까 정말 둘 중 하나는 성공 하겠네요.”
“둘 다 성공시킬수도 있지.”
“그럼 그냥 우리도 DH 미디어에 줄이나 대고 꿀이나 빨까요?”
경록이 묻자 조윤혁 실장은 피식 웃었다.
“그래볼까? 그냥 아무 생각없이 돈이나 대고 꿀이나 빨까?”
“오늘 미팅 결과에 따라 그래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요?”
“흠...”
그 때 문이 드드륵 열리면서 40대 초반의 남자가 들어섰다.
조윤혁 실장과 한경록 대리 역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늦었습니다.”
“아닙니다. 앉으시죠.”
그는 정장 마의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자리에 앉아 조윤혁 실장이 주는 술을 받았다.
“회의는 어떻게 됐습니까?”
“일단 윽박 질러놓긴 했는데 쉽게 마무리 될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는 에니메이션 제작사인 ‘팔버라이즈’의 이영한 전무였다.
팔버라이즈는 국내 최고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로 지금까지 수많은 명작 에니메이션을 제작해 왔으며 세계에서도 거장으로 취급받는 영화감독들 상당수와 계약을 맺고 있는 곳이었다.
또한, 파라곤 파트너스의 가장 큰 돈줄이자 투자처이고 말이다.
“계약서를 전부 새로 쓰자고 하던가요?”
“네. 포괄적임금제가 아닌 표준근로계약서로 다시 쓰자고 나오는데... 솔직히 저들만 들고 일어났으면 대충 무마시켜볼라고 했습니다만, 정부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으니 아주 곤란한 상황입니다.”
장동훈 감독은 영화판을 바꿔보겠다고 지껄였지만 이게 에니메이션계로 불똥이 튀면서 시장이 아주 요상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한류의 한축을 당당하게 담당하는 애니메이션이 근로자들의 부당한 대우 속에서 커왔다는 사실이 국민들을 부끄럽게 만든 거였다.
여기에 정치권이 한 발 걸치며 더 불씨를 키웠다.
야당 정치인 한 명이 대놓고 팔버라이즈를 지목하며 노동착취의 대명사인 듯 몰아세우고 노동법 체계를 바꿔야 한다며 여권을 압박하기 시작했던거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팔버라이즈 임원진은 다급하게 직원들과 소통에 나섰지만 일은 너무 커져버렸고 결국 직원들은 파업을 입에 담았다.
정면 충돌이 가시권에 들어온 거다.
“그냥 짤라버리면 안 됩니까?”
짜증난 조윤혁 실장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이영한 전무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저들 모두 전문가들입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가르치면 저 정도 되는 실력자를 키울 수 있겠죠. 그런데 그 시간동안 회사 놀릴까요? 당장 조 실장님도 상황이 어떻게 되고 있냐고 절 부르셨지 않습니까?”
“...”
조 실장은 이영한 전무의 날카로운 답변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확실히 마음 같아서는 다 갈아엎고 싶지만 당장 팔버라이즈에서 새 작품을 내지 못하면 투자금 회수는 늦어질 수밖에 없고 자칫 잘못하면 투자금을 손해 볼지도 모를 상황이 올수도 있으니 말이다.
“누구는 십년 넘게 이 회사에서 일해왔고 조금 부족한 친구라도 최소 5년 이상 일해온 친구들입니다. 저 정도 경력직 직원들 한꺼번에 불러들이려면 저 친구들한테 새 계약서를 써주는 것보다 훨씬 큰 비용이 들어갈 것이고 또 그렇게 불러들인 친구들이 우리 직원들 만큼 실력이 좋을지 확신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 지금 전무님 말씀은 계약을 새로 해주자는 말씀입니까?”
“그래야지 않겠습니까.”
“후... 골치아프네. 전무님. 새 계약서를 써주면 근로시간이 줄어들텐데 그럼 지금 진행하는 ‘진격의 카프리모’가 일정에 맞게 제작될 수 있는 겁니까?”
“아무래도 늦어지지 않겠습니까? 일정에 맞추려면 직원들을 더 채용해야겠지요.”
“인건비가 어느 정도나 오르겠습니까?”
“열명만 더 채용해도 연봉과 보험료, 등등 생각하면 최소 6억에서 7억은 더 들어갈겁니다. 뭐, 일정에 맞추려면 열 명 가지고는 턱도 없겠지만요.”
조 실장은 경록이 따라준 술을 들이키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위에서 우려가 큽니다. 어쩔 수 없이 비용이 더 든다면 더 많은 수익을 내야 할 겁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당신들에게 충분할 만큼 많은 수익을 가져다 주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걸로도 부족합니까?”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요.”
“그럼 더 많은 투자를 해주셔야 할 겁니다. 앞으로 5년간 맞춰진 일정에 따라 순차적으로 작품을 선보이려면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건 긍정적으로 검토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한경록 대리라고 했죠?”
이영한 전무가 눈빛을 빛냈다.
“네.”
“스토리를 구성해내는 능력이 탁월하던데... 차라리 투자회사에 있지 말고 우리 회사에 크리에이터로 들어오는게 어떻겠습니까? 보수는 팀장급으로 해드리죠.”
드닷없는 제안에 한경록 대리 대신 조윤혁 실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지금 제 앞에서 제 직원을 채가시려는 겁니까?”
“한경록 대리의 조언이 아주 큰 도움이 됐습니다. 특히 총 제작을 맡고 계신 엄해주 감독님이 한경록 대리를 굉장히 칭찬하더군요. 본인의 재능에 맞는 일을 권하는 겁니다.”
한경록 대리는 쑥스럽게 웃었다.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전 이 회사가 좋습니다. 대신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찾아가서 도움을 드리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요.”
이영한 전무는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셋은 술과 음식으로 저녁을 마쳤고 조 실장은 이 전무를 택시에 태워보낸 후 경록에게 말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냇가를 흙탕물로 만들었어. 아무리 생각해도 곱게 꿀만 빨기에는 너무 짜증난단 말이지.”
“그렇긴 합니다. 에이... 팔버라이즈가 포괄적임금제를 포기하면 앞으로 도미노처럼 업계가 바뀌게 될 텐데 이거 아주 폭탄 제대로 터뜨렸는데요?”
“씨발, 아무래도 이대로는 못 넘어간다. 너 진짜 한 방 먹일 수 있겠어? 보니까 잘 나올 것 같아?”
“지금까지 카프리모 시리즈 중에서 손에 꼽을 만한 명작이 나올 겁니다. 장동훈 감독이 어떤 명작을 만들어내든 무조건 이깁니다.”
“좋아, 너 믿고 간다. DH 미디어에서 어느 배급사랑 손잡을지 실시간으로 계속 체크해봐. 그리고 팔버라이즈에서 제작일정 차질없이 끝낼 수 있도록 계속 지원하고. 이렇게 업계 물을 흐리는 놈들은 매장을 시켜버려야 해.”
조윤혁 실장은 씩씩거리며 눈에서 불길을 토해냈다.
*
늦은 저녁,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DH 미디어의 불은 꺼질줄 몰랐다.
“미군을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건 좋은데 재난상황에 대처하는 정부의 대응이 너무 과하지 않을까? 너무 바보 같잖아.”
“감독님, 이보다 더 할지도 몰라요. 오히려 난 너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 현실성이 없다고 욕 먹을 것 같은데...”
양호민 감독은 한강의 괴물에서 정부의 대응이 너무 과한 것 같다며 우려를 표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런 식의 무능한 대응을 정부에서 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사실 동훈도 김영웅 감독이 있던 곳에서의 정부 대응을 보지 못했다면 양 감독과 비슷한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에요. 충분히 현실성 있어요.”
“오케이. 그건 넘어가고 여기 괴물이 나타나는 장면에서 이 구도는 꼭 이렇게 찍어야 한다는 거야?”
괴물이 튀어나오고 한경변에서 평화롭게 일상을 즐기는 시민들이 일제히 도망가는 장면이었다.
“네. 괴물이 소연의 머리를 확 잡고 끌고가는게 훨씬 긴장감이 넘치지 않을까요?”
“그건 그런데 난 그거 말고 씬이 너무 기니까 CG가 많이 들어갈 것 같아서 걱정이네. 제작비를 넉넉하게 줬다고는 하지만 이건 내 손을 떠난 문제가 되잖아.”
“걱정마세요. 일단 특수촬영팀이랑 CG팀한테 여기 괴물 일러스트레이트랑 움직임을 어떻게 표현할지 그려놓은 걸 주면서 협의하면 제작비 내에서 충분히 원하는 장면을 표현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게 그거야?”
양호민 감독은 동훈이 내민 괴물의 일러스트레이트를 찬찬히 살폈다.
김영웅 감독이 봤던 괴물의 형태를 차용하긴 했지만 이곳은 그곳보다 애니메이션이 더 발달한 곳이었기에 조금 더 현실적이면서 괴수다운 형태로 만들어낼 수 있었다.
당연히 혼자 그린게 아니라 외주업체와의 협의 끝에 만들어낸 작품이었던거다.
“괜찮아요?”
“오호... 멋들어진데?”
“다행입니다.”
양호민 감독은 다시 한번 새삼스럽게 동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고는 감탄하며 말했다.
“장 감독, 대단하네. 아침부터 저녁까지 촬영하다가 언제 시간을 내서 이런것도 다 만들어왔어?”
“제가 구상한 걸 업체에다가 잘 말해놓은 거예요. 작업은 거기서 했죠.”
“원래 창작이라는게 그래. 소재가 굉장히 중요한 거거든. 기본 틀을 잡아놓는게 얼마나 어려운건데. 소스를 정확히 줬으니까 거기서도 이렇게 완성도 있는걸 만들어 온 거겠지. 좋네. 업체가 어딘데?”
“파이락스라는 덴데요. 대표가 젊은 친구더라구요. 제가 말한걸 빠르게 캐치하던데 이걸 보고 역시 유지은 팀장이 일 잘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 유 팀장 일 잘하더라.”
양호민 감독은 처음 이 작품을 구상할 때 어느 정도 혼자 생각한 괴물의 형태와 플롯에서 조금 멀어지긴 했지만 오히려 작품의 완성도는 훨씬 올라갔다고 느꼈다.
그리고 동훈과 함께 할수록 이번 작품은 성공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