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
성공해야 하는 이유(2)
사실 주혁은 촬영이 조금 심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분량은 메인 주연인 황정훈에 비해 적었고 마침 오늘도 자신의 촬영은 두 시간 가량이나 이후에 진행할 거라 상당히 무료하던 참이었다.
대사는 이미 다 외웠고 리허설도 열 번을 넘게 했기에 뭘 더 연습한다는 것도 지겨울 찰나 때마침 일어난 소란이 반가울 지경이었다.
“다리 아프게 여기 서 계시지 말고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나긋나긋한 주혁의 말에 강호의 어머니는 홀리듯 끄덕이며 주혁을 따라나섰다.
동훈은 이게 뭔 일인가 싶었지만 일단 강호 어머니를 잘 달래는 것 같으니 내심 웃음이 나오는 걸 참고 세트장 한켠에 마련된 휴게실로 들어갔다.
스태프들이나 배우들이 잠시 쉬는 동안 간단한 과자와 차를 들며 쉴 수 있게 마련된 공간이었는데 막상 촬영 때는 정신없이 움직여서 스태프들은 거의 이용을 못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일단 앉으시구요. 녹차 드릴까요? 아니면 커피? 여기 아메리카노 있는데.”
“아이구, 아니에요. 오호호! 주혁 씨가 뭘 이런 걸...”
“아닙니다. 저 커피 잘 타요. 그리고 어디 가서 제가 타는 커피 드셔보시겠어요. 촬영장에 오신김에 제가 타는 커피 한 번 드셔보세요. 그리고 나중에 친구분들께 자랑도 하시고.”
마지막 멘트가 혹했는지 그녀는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커피 한 잔만 부탁드릴게요.”
“네. 그런데 여기 어쩐 일로 오셨어요? 여기 일반인들이 잘 찾아오는 곳은 아닌데.”
커피를 타면서 지나가듯이 물으니 그녀는 방금 전의 살벌한 분위기는 어디로 갔는지 봄날 훈풍 불 듯 잔잔하게 말했다.
“아니... 내가 너무 이상해서 한번 와봤어요. 우리애가... 여기, 이름이 강호에요. 이강호. 인사드려야지.”
“안녕하세요. 팬이었습니다. 헤헤...”
강호가 쑥스럽게 인사하자 주혁이 강호의 두툼한 어깨를 툭툭 치며 반가워했다.
“아이고, 듬직한 친군데요? 예의도 바르고, 어머님이 아주 잘 키우셨네. 뿌듯하시겠어요.”
“오호호! 아유, 내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어쩌면 그렇게 순한지 어디가서 화낼 줄도 모르고, 지 욕심껏 챙길 줄도 모르고... 덩치만 컷지 아주 애에요. 애.”
“이렇게 큰 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하,”
“어쨌든 제가 왜 여기 왔냐면 며칠 전부터 애가 자꾸 밥을 안 먹겠다는 거예요. 그렇게 좋아하던 곱창을 줘도 싫다고 하고, 치킨이라면 환장을 하는 애가 치킨도 안 먹겠다고 하고... 난 애가 아픈 줄 알았다니까요.”
“그런데요?”
듣다 보니 재미있는지 주혁도 그녀의 맞은편 간이의자에 앉아서 열심히 듣기 시작했다.
동훈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으면서 가만히 휴게실 입구에 서서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보았다.
“내가 너무 답답해서... 몸이 안 좋아 보이니까 가자고, 병원이라도 억지로 끌고 가려고 했는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애가 어쩔 수 없이 말을 하더라구요. 어느 영화감독님이 살을 빼면 자기 배우 시켜 준다고.”
주혁도 그 소리에 놀랐는지 부릅뜬 눈으로 가만히 동훈을 돌아본다.
자신이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다는 눈빛이 역력하다.
이 상황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는 없어 결국 해명을 시작했다.
“어머님. 전 영화감독이고 많은 배우들을 보아 왔습니다. 지금 강호의 모습이 조금... 많이 부족해 보이실 수 있지만...”
“저기요, 감독님. 내 애지만 전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전 우리 아들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내 애니까. 우리 애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거지. 얘가 진짜 이런...”
강호 어머니는 주혁을 가리키면서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저 얼굴이 어떻게 살빼고 꾸민다고 주혁처럼 될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솔직히 동훈도 강호의 미래 모습(?)을 보지 않았다면 똑같이 미친놈처럼 취급했을거다.
“그냥 제 눈을 믿어달라고 밖에 말씀을 못 드리겠네요. 그런데 어머니, 보니까 강호는 공부에 흥미가 없는데 굳이 공부에 목을 메는 것보다 차라리 이쪽으로 방향을 잡는게 어떨까요? 솔직히 여기 주혁 씨처럼 엄청나게 잘생겨야지만 좋은 배우가 될 수 있는것도 아니잖아요. 지금 최고로 잘 나가는 최준식 씨도 꽃미남처럼 잘생겨서 톱배우인가요? 지금 우리 영화 주연배우인 황정훈 씨도 잘생긴 편은 아닙니다.”
그 말에 설득되는지 그녀가 한껏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우리 애가 그런 배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걸 어떻게 제가 장담할 수 있겠어요? 강호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하느냐에 달린 문제인데. 다만 강호 얼굴이 음... 살에 조금 파묻혀 있긴 한데 살만 좀... 아니, 많이 빼면 굉장히 남자답고 선이 굵은 인상이 될 거거든요. 이건 경험이니까 믿으셔도 됩니다.”
“정말 그런가요?”
밖에서 만나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면 절대 안 믿었을 거다.
하지만 이렇게 톱스타 주혁이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는 이 상황 자체가 믿음을 팍팍 주고 있으니 자연스럽게 동훈의 말에 신뢰감이 드는 것 같았다.
“어차피 선택은 본인이 하는 거니 전 절대 강요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저 기회를 주었을 뿐이죠. 어머님께서 믿지 않으신다면 안 믿으셔도 상관 없습니다. 제가 소속사 사장도 아니고 굳이 이렇게 불편한 관계를 만들면서까지 배우를 키워야 할 이유가 없으니까요.”
그제야 자신이 무척이나 실례된 짓을 했다는 걸 알았는지 그녀는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아유, 죄송해요. 전 얘가 뭘 몰라서 사기라도 당했는줄 알고...”
“아닙니다. 괜찮아요. 그럴 수 있죠.”
주혁도 웃으며 강호 어머니를 두둔했다.
“어머니, 저 같아도 사기꾼이라고 생각했겠어요. 그런데 장동훈 감독님이 작품만 잘 쓰시는 줄 알았는데 심미안이 있으신 거 같아요?”
주혁도 궁금한가보다.
도대체 강호의 어떤 면을 봐서 그런 제안을 했을지 말이다.
“그냥 경험이야. 경험. 그리고 주혁 씨가 캐릭터를 분석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는 것처럼 남들도 다 한 가지씩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면 돼.”
“와... 한 가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재주가 많으신거 아니에요?”
요새 촬영을 하며 주혁이 느끼는 감정은 단연 감탄과 신기함이었다.
같은 장면이라도 계속 컷을 찍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좋은 장면을 찾거나 장면의 연결을 자연스럽게 하려 한다.
그런데 장동훈 감독은 일정상 정해진 컷들만 딱딱 찍어대고 당일 촬영분량을 결코 넘기는 적이 없었다.
장동훈 감독이 촬영 일정을 정확히 끝낸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막상 같이 촬영해보니 신세계를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안 그래도 드라마 촬영장보다 영화 촬영장이 훨씬 편하고 쉬웠는데 이번 촬영은 정말 속된말로 거저 먹는다는 느낌이었다.
이번 작품을 하기 전만해도 이번 영화가 성공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있었는데 왠지 지금까지 장동훈 감독의 작품 흥행이 단지 운빨이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많긴... 넌 생긴게 재주잖아. 난 네가 더 탐난다 야.”
“하긴, 그것도 재주긴 재주에요? 하하!”
대충 분위기가 정리된 것 같자 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혁이 일어나니 강호와 강호 어머니도 따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어머, 가시게요?”
“촬영 준비해야죠. 이름이 뭐라고?”
“이강호입니다.”
“강호. 이름 멋있네. 나중에 배우 되면 형이랑 소주 한잔 하자.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아, 우리 감독님 믿을만한 분이시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시구요.”
“네, 너무 고마워요.”
주혁이 떠나가고 난 뒤, 휴게실은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아까 불같이 화를 낸 것이 너무도 민망했기 때문이리라.
“아까는 너무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괜찮습니다. 오해하실 수 있죠. 여기까지 오시나라 고생하셔서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촬영중이라 그럴 수가 없네요.”
“어휴, 무슨 말씀을요. 대접을 해드려도 저희가 해드려야죠. 너무 죄송스러워서... 그런데...”
“네?”
“그럼 지금부터 식단관리를 하면 될까요? TV에서 보니까 운동과 식단관리를 동시에 해야 한다고 하던데 맞나요?”
순간 웃음이 튀어나오려는걸 억지로 참았다.
“전 체중관리에 대한 전문가는 아닙니다. 그냥 살을 빼라고 했던 거지. 그건 헬스장이나 뭐 그런 전문적인 곳을 방문해서 상담해보시는 걸 추천할게요.”
“그럼 연기학원에라도 보낼까요?”
이제보니 아주 강호보다 더 열성적으로 준비할 모양이다.
“그것도 편할대로 하시구요. 당연히 보내면 좋기는 하지만 공부에 방해가 되니까 알아서 선택하시면 될 것 같아요.”
“네. 그럼 저희는 감독님만 믿고 그저 열~심히 노력해서 꼭 살을 빼도록 하겠습니다.”
“네네. 그럼 가세요.”
“감독님, 안녕히 계세요.”
“그래, 잘 가고.”
그녀는 강호의 손목을 잡고 세트장을 나섰다.
그러고서도 신기한지 한참동안 세트장의 모습을 눈에 담다가 사라졌다.
*
“축하드립니다. 제작 확정입니다.”
“예쓰! 예쓰! 고맙다. 수고했다 윤 대리.”
환호성을 지르던 유병세 감독은 윤 대리의 어깨를 두드리며 그의 노고(?)를 치하했다.
그 순간 굳어지던 윤 대리의 표정을 봤다면 아마 저렇게 기뻐하지 못했을 테지만...
“제작비는 20% 정도 상승될 거라 봤어요. 그래서 현재 예상 제작비는 72억 내외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아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나 많이 올라갈까?”
“일단 여유롭게 잡은 겁니다. 솔직히 유 감독님이 일정 꼬박꼬박 지켜가면서 찍는 스타일 아니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뭐 알겠어. 어쨌건 됐다는 거잖아. 하하!”
지금까지 촬영하다가 하루 이틀 일정이 늦어지는 건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제작 피디들이 돈 문제 가지고 닦달할때도 그저 잔소리 좀 들으면 끝이겠거니 생각했었다.
솔직히 지금 윤 대리가 하는 말도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는 중이었다.
제작비가 많이 올라서 힘들었지만 일단 오케이가 됐으니 제작비가 60억이든 600억이든 알게 뭐란 말인가?
그런데 그런 유병세 감독의 마음을 윤 대리는 다 꿰뚫고 있었다.
“제작비 아껴주세요. 흥행이 실패할 수는 있지만 제작비 물쓰듯이 쓰다가 망하면 그건 투자자들과 회사만 힘들어집니다.”
“알아, 알아. 너 인마, 잔소리가 왜 이렇게 많아졌어.”
“감독님...”
“됐고, 오늘 내가 쏠테니까 저녁에 시간 비워놔. 역삼동 신데렐라에서 오늘 끝장나게 놀자.”
윤 대리는 거절하려고 했지만 역삼동 신데렐라라는 말에 차마 안 간다고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신의 월급으로는 꿈도 꾸기 힘든 고급 룸싸롱인 그곳에 유 감독과 같이 간 이후 이렇게 마음에도 없는 호형호제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곳은 정말 지상낙원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알았어요.”
유 감독은 못 이기는 척 승낙하는 윤 대리의 어깨에 팔을 척 두르며 말했다.
“인마. 어차피 그거 네 돈 아니야. 뭘 그렇게 죽을상을 쓰면서 신경쓰고 그래? 그리고 이번 영화 무조건 성공한다. 걱정하지 마.”
“잘 돼야 해요.”
“걱정 말라니까. 그리고 나 이거 성공하면 나도 제작사 하나 차릴거다.”
“네? 감독님이요? 왜요?”
유 감독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게 있어,”
동훈을 보면서 알게 됐다.
왜 지금까지 제작사를 차릴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감독이 제작사를 하면 지 혼자 다 먹을수도 있었을텐데.
엄청난 흥행을 염두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조금 흥행하고 조금 실패하며 영화만 꾸준히 만들 수 있다면 이 눈먼 돈들을 다 자신의 것으로 만들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