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눈 떠보니 흥행의 신-56화 (56/116)

# 56

DH미디어의 원투 펀치(5)

양호민 감독은 다소 얼떨떨한 얼굴로 동훈의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벌써 주연급을 캐스팅 확정하고 투자자와의 미팅 자리에 나와 있기 때문이었다.

“김우진을 어떻게 캐스팅 한 거야? 내가 듣기론 김우진이가 거절한 걸로 알고 있는데?”

“솔직히 저도 잘 모르겠어요. 내가 한 게 아니라서...”

진심이었다.

고은숙 대표한테 적당히 자신감을 내비추며 가슴에 펌프질을 하긴 했는데 이게 이렇게 쉽게 먹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또 고은숙 대표가 어떤 방법으로 김우진을 구워 삶았는지도 몰랐다.

주말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며칠 후 촬영 중에 유지은 팀장으로부터 김우진이 오케이 했다는 말이 들려왔고 유 팀장 혼자 WAS 엔터에 가서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 와버린 후 일이 이렇게 빨린 진행된 거였다.

“장 감독이 캐스팅하지 않았으면 누가 해?”

“소속사 대표가요. 대표가 잘 설득했나 봐요.”

“씁... 그래? 이상하네... 어쨌든 도장은 확실히 찍은 거지?”

“네.”

“그래, 후... 나도 김우진 급이랑 영화하는건 처음이라 떨리긴 한다.”

공포영화는 주로 톱스타보단 조금 급이 떨어지는 배우들로 하는게 보통이다.

제작비도 적고 스타 감독이나 엄청난 작품성을 동반한 작품이 아니면 톱스타들도 단순 공포영화는 많이 꺼리기 때문이다.

다만 그와 함께했던 배우들 중에 톱스타로 올라선 배우들이 있기는 한데 다시 양 감독과 같이 작품을 하자고 할 때 응하는 배우는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지금 가장 떨리는 건 저거든요?”

양 감독 말고도 유 팀장 역시 옆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작성해온 제작기획서를 다시 한 번 살펴보며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계속 검토에 검토를 거듭하고 있었다.

“유 팀장 그거 만드느라고 고생 많았어.”

“감독님도 고생하셨죠. 몇날 며칠을 밤새셨잖아요.”

“내 작품 때문에 내가 밤새는건 일도 아니지. 하여간 고생 많았어. 오늘 일 잘되면 내가 한턱 쏠게.”

“또 피맛골가서 막걸리 쏠거죠? 아... 난 막걸리 싫은데...”

“알았어. 내가 우리 유 팀장 좋아하는 소고기로다가 쏠게.”

“하핫! 약속했어요?”

옆에서 동훈이 웃으며 양 감독에게 말했다.

“막상 촬영장에선 아무렇지도 않게 잘 하실텐데요, 뭘...”

“현장에서 카메라 돌면 내가 선장이지만 선장도 배 태우기 전에는 선원들 눈치봐야 하는거야.”

그렇게 둘이 떠들고 있을 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낯익은 장년의 중년인이 들어섰다.

“안녕하십니까. 촬영하시느라 살이 쪽 빠져있을 줄 알았는데 얼굴이 너무 좋아 보이십니다, 감독님?”

“상무님도 잘 지내셨어요?”

가장 먼저 투자를 생각한 곳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에스원 투자법인이었다.

황대철 상무와는 이미 안면이 있었고 투자와 관련한 여러가지 일로 의논을 나눴던 적도 있었기에 이번 작품의 투자처도 당연히 이곳을 제외하고 생각할 수 없었다.

“나야 항상 그렇지요. 그런데 감독님은 오늘 촬영 없으십니까?”

“당연히 있죠. 회의 끝나고 바로 가면 늦지는 않습니다.”

지금 시간이 오전 8시 반.

빠르게 회의를 끝내고 남양주 세트장으로 이동하면 점심 전에는 충분히 도착할 수 있었다.

촬영이 10시 반이니 여유롭지는 않아도 아주 빡빡한 건 아니었다.

원래 유지은 팀장만 보내려고 했지만 제작비가 백억을 넘어가는 대형 프로젝트였기에 각본과 기획의도를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고 투자를 확실히 받아내기 위해 직접 나온 거였다.

“우선 보내준 제작기획서는 잘 검토 했습니다. 첨부해주신 각본과 캐스팅 방향, 기획의도, 마케팅 계획까지 꼼꼼히 살펴보았어요.”

옆에 앉은 유 팀장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만큼 그녀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어땠습니까?”

“나쁘지 않았습니다. 음, 솔직히 말할게요. 장동훈 감독이 아니었으면 무리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제작기획서만 보면 다들 꿈에 부풀어 있거든요. 어느 하나 성공하지 못할 영화가 없습니다.”

“아마 그렇겠죠.”

동훈은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투자자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옥석을 골라내기 정말 쉽지 않았을 터였다.

“결국 우리가 보는건 누가 연출을 하고, 누가 출연을 했는가... 사실 이 두 개가 가장 중요하죠. 그리고 나서 시나리오를 검토하는건데 내부회의에서 상당히 좋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적극 투자쪽으로 결론이 나왔거든요.”

유지은 팀장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작은 제작사에서 동훈의 작품이 아닌 다른 감독의 작품이었기에 투자를 못 받을까봐 내심 걱정이 많았던 것 같았다.

“다행입니다.”

황대철 상무는 유지은 팀장에게 빙그레 미소를 띄워보인 후 동훈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선 몇 가지 확인할게 있습니다. 김우진 캐스팅이 확정된게 맞는 거겠죠?”

동훈 대신 유 팀장이 준비해둔 서류를 내밀었다.

“여기 계약서구요. 올해 7월까지 스케줄 확보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촬영이 딜레이 되면 최소 올해까지는 기다려준다고 했구요.”

“기다려준다는 건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겠죠?”

“그건 그렇죠.”

그걸 계약서에 명시하는 소속사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제작사와의 구두 합의를 무시하는 소속사 역시 흔치 않다.

“흐음... 다른 캐스팅은 어떻게 됩니까?”

“오디션 일정 잡고 있기는 해도 일단 김우진을 중심으로 캐스팅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무 급이 올라가면 제작비도 많이 들뿐더러 시선이 분산된다고 감독님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B급 이하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그럼 하나 더. 개봉 시기를 언제로 잡고 있습니까?”

“네?”

순간 유지은 팀장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을 받았는지 동훈을 돌아보았다.

이제 캐스팅하고 제작기획서를 작성 투자를 받으러 왔는데 개봉시기를 언제로 잡고 있는지 물어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다.

동훈은 유 팀장 대신에 대답했다.

“아무래도 내년 말 겨울방학이나 내후년 초, 설날 연휴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요? 그런데 그건 왜...?”

개봉시기를 조율하는건 투자자가 투자를 결정할 때 조율할 문제가 아니라 배급사에서 조율할 문제였다.

그렇기에 궁금함을 못 참고 물어보니 황대철 상무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서 그래요. 내가 제작기획서를 받고 연계할 투자사를 좀 알아봤는데 파라곤 파트너스에서 DH 미디어 재작일정에 대해 굉장히 궁금해 하더라구요. 특히 개봉 시기를 가장 궁금해 했습니다.”

“파라곤 파트너스요?”

“애니메이션을 주로 투자하는 곳인데 자금 규모가 크고 대형 애니메이션 제작을 지원해서 지금 대한민국에서 굴리는 돈으로만 따지면 LS엔터테인먼트와 비슷하거나 넘어갈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유 팀장은 화색이 된 얼굴로 말했다.

“어머, 그럼 우리 영화를 지원해 주려고...”

황 상무는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상해요. 투자를 할려는 움직임은 아니었으니까. 아무 연락도 못 받았죠?”

“네. 그런 연락은...”

“거봐. 이상하다니까.”

동훈이 물었다.

“제작 일정은 궁금하면서 투자할 생각이 없었다는 말이죠?”

“맞아요. 그러면서 파라곤 파트너스와 직접적으로 연관돼있거나 출자한 회사들은 전부 투자를 거부했습니다.”

“어...”

동훈이나 유 팀장, 양호민 감독은 서로를 돌아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했다.

“사실 파라곤 파트너스와 그 계열사가 투자를 안 한다고 해서 투자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에요. 국내에는 수많은 투자사들이 있으니까. 그냥 궁금했어요. 혹시 감독님이 파라곤 파트너스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게 아닌가...”

“전혀요. 지금껏 영화밥을 먹어오면서 파라곤 파트너스와 관련된 일을 한 적이 전혀 없습니다. 제가 조감독으로 있을 때도요.”

양호민 감독도 말했다.

“저 역시 파라곤 파트너스에게 투자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럼 다른 이유가 있나 보군요. 알겠습니다. 그냥 이건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으니 신경쓰실 필요 없습니다.”

황 상무는 그가 가져온 서류를 유지은 팀장에게 내밀었다.

“이건 파라곤 파트너스와 연관되지 않은 투자사 목록입니다. 여기서 최소 55% 이상 투자를 받아온다면 나머지는 우리 쪽에서 투자 진행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동훈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끝입니까?”

“네. 뭐 열심히 준비한 PPT라도 하시려고 했습니까? 준비한게 있다면 봐 드릴 수는 있습니다만.”

“PPT까지 준비했으면 더 억울할 뻔했네요.”

“사실 장동훈 감독님 회사에서 제작한 영화라서 큰 고민할 거리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제작한 영화 두 편이 다 성공했으니 성공률 100% 잖습니까. 물론 지금부터가 더 중요하겠지요. 단 한 차례만 실패해도 지금처럼 쉽게 결정이 나진 않을 테니까요.”

당연한 말이다.

어쩌면 지금 이렇게 쉽게 결정난 투자가 더 이상할런지도 모른다.

“이번 영화는 절대 실패해선 안 되겠네요.”

“그러길 바랍니다. 전 개인적으로 장동훈 감독님이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

황대철 상무는 씨익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싱겁게 끝난 자리였지만 홀로 차를 타고 촬영장으로 향해는 동훈의 마음은 찝찝하기 그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라곤 파트너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왜 개봉 시기를 궁금해 했던 것일까...

*

은정은 아침부터 화가 솟구쳤다.

오늘 그토록 기다리던 오디션 당일이건만 아침에 난데없이 끌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안녕, 반갑다. 오랜만이지?”

남자치고 하얀 얼굴에 180이 훌쩍 넘는 커다란 키, 첫 만남과 똑같은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는 언니인 세연의 남자친구 한종혁이었다.

입고 있는 옷이나 걸치고 있는 악세서리 하나하나 명품 아닌게 없는 이 남자는 얼굴이 좀 말상이다 싶은 것 말고는 생긴 것도, 스타일도 나쁘지 않았다.

“네, 그런데 무슨 일로... 절 보자고 하셨다면서요?”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응?”

은정은 슬쩍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빨리 얘기하고 일어난다면 오디션에 늦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뭐 마실래?”

세연이 물어보자 은정은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며 종혁을 재촉했다.

“됐어. 나 뭐 마실 시간 없어. 죄송한데 제가 지금 좀 급해서요. 원래 이 자리도 안 나오는건데 언니가 하도 오라서 해서 온 자리거든요. 어떤 이유로 절 만나자고 하셨는지...?”

“오늘 오디션인가 뭔가 하러 간다면서?”

순간 은정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빡 솟아올랐다.

저 ‘오디션인가 뭔가’리는 워딩이 심기를 거스른 거다.

“네. 그 오디션인가 뭔가를 하러 가야해서 좀 바쁘네요.”

“아, 미안. 화내지 마. 내가 실수했나보네.”

종혁이 웃으며 사과했지만 은정은 자꾸 본론을 꺼내지 않자 더욱 짜증이 솟아 올랐다.

“괜찮으니까 빨리 말씀해주세요. 저 지금 일어날까요?”

“아니아니. 너도 언니 닮아서 성격이 급하구나. 알았어. 사실 내가 연예 소속사를 하나 세우게 됐어.”

“회사를 차리셨다구요?”

“그래. 엄밀히 따지면 인수한거긴 하지만 계속 규모를 키워갈 생각이거든. 그래서 네가 이번에 회사로 들어오면 어떨까 하고 불렀지.”

은정은 잠시 멍때리다가 세연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언니네 회사?”

“응, 맞아. 우리 회사.”

“헐...”

은정이 종혁의 머니 클라스에 놀라고 있을사이 종혁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언니와 같은 회사에 있으면 언니도 더 좋고 너도 더 좋지 않을까 생각해.”

“글쎄요. 그건 모르겠고, 제가 오빠네 회사 들어가면 무슨 혜택이 있는데요?”

“단적인 예로 오디션 같은... 아, 미안. 오디션 없이 캐스팅하게 해줄게. 이번에 너한테 딱 맞는 작품이 생겼거든. 내가 가지고 왔는데...”

종혁이 가지고 온 명품 가방에서 서류를 주섬주섬 꺼내는 사이 은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한데 더 들을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소속사 힘으로 꽂아 넣는 거잖아. 난 싫어요, 그런거. 난 또 뭐 자동차라도 사주는 줄 알았네. 언니, 나 갈게.”

은정은 종혁이 미쳐 뭐라 할 사이도 없이 쌩 가게를 나가버렸다.

종혁은 은정이 열고 나간 가게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물었다.

“은정이 차 좋아해?”

“쟤 운전 면허도 없는데...”

“은정이가 물욕이 있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