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DH미디어의 원투 펀치(3)
주중 5일 내내 이어진 촬영이 끝났지만, 동훈은 뒷정리를 명진이에게 맡겨놓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왔다.
밤 10시가 넘었음에도 아직 불이 꺼지지 않은 사무실엔 유지은 팀장이 아직도 퇴근을 안 한 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하셨어요.”
“고생은 스탭들이 했죠. 유 팀장님이 고생했어요. 사실 우리 중에 가장 바쁜 사람이 유 팀장님이잖아요.”
“알아주니 고맙네요.”
“내가 모르면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그러게요. 남편도 몰라주는데 우리 감독님만 알아주시네.”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비품실 냉장고를 열어 음료수를 가져다주며 직원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는 곤혹스러운 얼굴로 동훈에게 시나리오를 내밀었다.
“다 안 한 대요. A급 전부 일일이 확인해봤는데 절대 안한대요.”
“정말요? 아... 이게 그렇게 싫은가?”
“메인급 주연이 드라마 주조연급 배우잖아요. 그런데 그보다 분량이 훨씬 적은데 받아들이겠어요?”
모두 양호민 감독의 신작, 한강의 몬스터(가제)에 관한 이야기다.
각본을 완성시키고 나서도 우선 악질형사의 촬영이 끝날때까지 천천히 진행하려고 했었다.
두 개의 작품을 동시에 진행한다는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이 요상하게 흘러가면서 양호민 감독의 작품을 빠르게 진행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동훈이 표준근로계약서를 언급한 이후 촬영 전문 스태프들이 일제히 동훈의 제작사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팀 단위로 움직이는 그들에게 있어서 더 좋은 근로조건에 더 나은 임금을 준다는데 굳이 더 안 좋은 조건으로 다른 작품을 할 이유가 없었던 거다.
감독이야 작품에 애정이 있어서 아무 제작사로 옮겨 다니겠지만 스태프들이야 계약도 하지 않은 작품에 무슨 애정이 있겠는가?
더 좋은 조건으로 계약하게 되면 그 작품에 더 애정을 쏟게 될거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인해 영화로 밥 벌어 먹고 사는 전문인력들은 DH 미디어로 발길을 돌렸고 이렇게 되니 당장 일이 없다고 그들을 계속 돌려보낼 수는 없게 된거다.
“흠... 난 내용이 좋아서 받는 사람이 좀 있을 줄 알았는데...”
문제는 양호민 감독의 작품에 스타급, 그것도 최소 톱스타급 한 명 정도는 들어가야 원하는 제작비를 투자받을 수 있는데 아무도 둘째 역할에 흥미를 보이는 이가 없었다는데 있다.
특히 주연을 박노진으로 확정하면서 더더욱 캐스팅에 난항이 생기고 말았다.
“박노진 씨가 성격이 좀 있나 봐요. 특히 연기력이 부족하고 노력하지 않는 후배들을 엄청 싫어해서 촬영장에서 혼내기 일쑤였대요. 그래서 그런지 톱스타들은 전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요.”
“다 지 잘되라고 하는건데...”
“그건 그렇지만 어깨에 한껏 뽕이 들어가서 부모를 제외하곤 다 아랫사람으로 보일 텐데 선배라고 질책하면 기분이 좋겠어요?”
“후... 그래서 들이밀데가 하나도 없어요?”
유 팀장은 의자에 털썩 앉으며 힘없이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요. 말했듯이 제가 직접 각 소속사 실장급 이상하고 통화까지 했는데 다들 난색을 표해요.”
“그럼 어쩔 수 없죠. 시간을 두고 기다려볼까요?”
너무 급하게 서두르지 말자는 생각에 말했는데 유지은 팀장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감독님, 감독님은 첫 입봉부터 지금까지 감독이 되고부터 사실 그렇게 힘들게 제작을 해오지는 않았어요. 그쵸?”
“아무래도 그런 편이죠.”
첫 입봉작부터 박만구 대표가 확실히 밀어줬기에 제작과정에서 차질이 빚어진 적은 없었다.
“보통 제작이 엎어질 때는 여러 가지 상황이 있는데 가장 큰 이유이자 가장 흔한 이유가 캐스팅부터 차질이 빚어질 때에요. 원래 처음엔 캐스팅하기 힘들죠. 그런데 누가 되려다가 안 되고, 또 누가 되려다가 안 되고... 이렇게 몇 번 반복되고 나면 그 시나리오는 배우들이 아무리 재밌어도 안 하려고 해요. 왜 그런거 있잖아요? 영화를 볼 때도 입소문이 제일 중요한 것처럼 남들이 서로 하려고 하면 나도 하고 싶다가도 남들이 서로 안 하려고 하면 자기도 안 하고 싶어지는거.”
“알죠. 그런 마음.”
“그렇게 시나리오는 묻혀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그 이후부터도 이상하게 마가 낀 것처럼 느껴지는지 제작사도 배우도 그냥 그 시나리오를 손대려고 하지 않아요.”
“흐음...”
유 팀장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았다.
그녀는 이대로 캐스팅이 흐지부지 됐다가 시간만 보내고 나면 나중에 또 시나리오를 돌려도 반응이 예전보다 더 안 좋아질거라고 말하는 거였다.
사실 예전에 조감독으로 작품을 준비하면서 몇 번 이런 일들이 있긴 했었지만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작품이 엎어지는 거야 이 바닥에서 흔하디 흔한 일이고 결정적으로 엎어진 작품이 자신의 작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작품이 엎어지면 시간 좀 보내다가 자신을 찾는 다른 감독에게 몸을 의탁하면 됐기에 캐스팅이 좀 안 된다 싶으면 ‘안 되는가 보다’ 하면서 쉽게 생각했었던 것 같았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낯이 뜨거워지는게 지난날의 마음가짐이 무척 부끄러워졌다.
“아시겠죠?”
“네.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일단 시나리오를 돌리고 나서는 최대한 빠르게 캐스팅을 끝내야 한다는 거.”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제가 보니 양호민 감독은 배우 소속사와 그리 친하지 않은 것 같더라구요.”
“아마 몇몇 친한 배우 외에는 그리 친한 배우도 없을 겁니다.”
그 성격에 톱배우라고 살살거리면서 비위 맞춰주거나 하지는 않았을거다.
그런 성격이라면 이미 이 바닥에서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하다고 소문이 파다하게 돌았을 테니까.
“그럼 어쩔 수 없어요. 그래도 감독님하고 저하고 소속사 돌아다니면서 어떡해서든 엮어 봐야지. 일단 양호민 감독님이 찜해두신 배우가 없으니까 우선순위를 누구로 둘까요?”
“흠... 혹시 양준기 스케줄 잡았대요?”
전에 악질형사의 악역에 양준기에게 먼저 시나리오를 줬지만 차가운 거절에 주혁을 캐스팅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캐스팅 제의가 거절 됐다고 양준기를 나쁘게 생각하는건 결코 아니다.
캐스팅이야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으며 각 배우의 성향과 소속사의 방향성에 전부 부합해야 하기에 캐스팅을 제의한 배우의 거절은 어쩌면 일을 하면서 거쳐야 할 당연한 과정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양준기를 언급하는 동훈에게선 꺼림직한 기운이 없었고 유지은 팀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양준기 좋죠. 그런데 제가 이번에도 연락을 했었는데 최영준 대표가 영 반응을 안 주더라구요. 그리고 이번에 무슨 드라마를 한다고 하던거 같던데?”
“결정된 거는 아니죠?”
“그랬으면 기사 나고 보도자료 뿌렸겠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양준긴데. 그러지 말고 감독님 WAS엔터랑 친분이 좀 있잖아요. 거기에 좀 밀어보면 안 될까요? 뭐 전에는 감독님한테 캐스팅 좀 해달라고 프로필 사진까지 내밀면서 꼬셨잖아요?”
“꼬셨다고 하면 어감이 좀 이상하고...”
“에이... 그게 꼬신 거지. 하여간 WAS엔터 쪽은 감독님이 좀 해결해주셔야 할 것 같아요. 미안해요. 제가 해결하지 못해요.”
“아유, 아니에요. 시나리오가 싫다는데 팀장님이 더 어떻게 합니까. 제가 발품 좀 팔아 볼게요.”
당연히 주말에 못 쉴거라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더 무거운 일이 맡겨졌기에 어깨가 무거웠다.
*
하루 뒤.
“어머, 감독님. 얼굴 살이 너무 쪽 빠지셨네. 촬영 때문에 힘드신가봐요.”
오랜만에 만난 고은숙 대표는 여전히 고운 얼굴로 동훈을 반겼다.
“촬영장이 힘들어서라기보단 다른 신경쓸 일이 많아서 그럴 겁니다.”
“요새 감독님 때문에 영화계랑 애니메이션계가 핫하다면서요?”
“뭐 그렇다고 하네요.”
“이래서 봉황의 뜻을 뱁새가 어찌 알겠냐는 말이 나오는 거예요. 감독님의 큰 그림을 너무 몰라.”
“막상 뱉어놓고 너무 큰 그림을 그린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거 그림 그리다가 완성되기도 전에 망해버릴 것 같아서요.”
“아하하! 설마 감독님이 그러시겠어요?”
“고작 두 편밖에 성공 못 시켰는데 너무 띄워주시는 것 같습니다.”
“그 두 편이 임팩트가 너무 컸어. 어쨌든 오늘 우리 회사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동훈이 고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오늘 회사로 방문할 수 있냐고 하니 그녀가 무슨 일인지 묻지도 않고 은쾌히 방문을 수락했다.
토요일이라 밖에서 따로 만나도 된다고 했는데 그녀는 안 그래도 오늘 회사에 있는 중이니 괜찮다고 했다.
“캐스팅 때문에요.”
동훈이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지만 고 대표는 의미심장한 웃음을 짓고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 입을 열었다.
“양호민 감독 작품 말씀하시는 거죠?”
“맞아요.”
“하하, 외통수네. 전화로 말씀하셨으면 부드럽게 거절할 수 있는데 이렇게 찾아오셨으니 면전에서 막 거절할 수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감사하구요.”
고 대표는 검지를 팔걸이에 톡톡 두들기다가 말했다.
“만약 장 감독님 작품이었으면 이렇게까지 고민하지 않았을거예요. 아, 오해하지 마세요. 난 지금도 양호민 감독의 작품에 캐스팅 되는거 찬성이니까. 단지 장 감독님 작품이었으면 싫다는 배우 기절을 시켜서라도 도장 찍게 만들었을거라는 말이었어요.”
“하하하. 이거 너무 민망하네요.”
“내 마음이 그래요. 어쨌거나 이건 장 감독님 작품이 아니고 공포영화가 주포인 양호민 감독님의 작품인데다가 원톱 주연도 아니에요. 어찌보면 괴물이 진짜 주인공이고 가장 많은 비중을 가진 주연은 설상가상으로 박노진이 됐다죠?”
“맞습니다.”
“으음~ 감독님, 너무한다.”
완곡한 거절의 말이다.
“하하, 이게 그렇게 궁지에 몰릴 만큼 어려운 상황인가요?”
“그렇죠. 그것도 많이...”
동훈은 고개를 끄덕이다가 말했다.
“뭐 싫다고 하시면 어쩔 수 없죠.”
“너무 빨리 물러서시는거 아니에요?”
“제가 좀 달라붙기를 바랬어요?”
“천하의 장동훈 감독님이 좀 어려운 모습 좀 보여주면 승리감 좀 맛 보려고 했죠.”
“그래봤자 안 된다고 할 거잖습니까.”
“미안하지만 솔직히 저부터도 그렇게 마음이 안 가요. CG로 괴물을 어떻게 표현할지 감도 안 잡히고. CG 수준은 잘 나와줄지. 박노진 씨야 연기를 잘하긴 하지만 티켓파워 없으니 개봉할 때 얼굴마담을 톱배우가 해야 할텐데 그렇게 하다가 결과 안 좋으면... 특히 영화 몇 번 실패한 애가 이번에도 또 실패하면 완전히 국밥 이미지 얻는 거잖아.”
“그렇긴 하죠.”
고은숙 대표는 계속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하는 동훈을 보며 계속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차라리 반박을 하며 설득하려고 했다면 더 편하게 상대했을텐데 너무도 쉽게 인정하니 말이다.
“상황이 이러니까 감독님이 이해 좀 해주세요.”
“그럼요, 서로 이해해야죠.”
“...”
고은숙 대표는 입을 열려다 말고 동훈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눈매가 웃고 있음을 안 고 대표는 다시 검지로 팔걸이를 톡톡 두들기다가 물었다.
“여기서 깔끔히 끝?”
“네. 대표님과 소속 배우가 싫다는데 어쩌 수 없는 일이죠. 세상 일이 어디 다 제 마음대로만 되겠습니까?”
“내말이... 아휴, 우리 감독님 정말 내 사정 다 이해해주시고 나 너무 감동이야.”
“그럼 전 이만 일어나야겠네요.”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그냥 가시면 나 너무 마음이 안 좋아.”
“저도 바쁩니다. 여기서 까였으니 이제 다른 곳 가서 말해봐야죠.”
“까였다고 하면 내가 너무 미안하지. 우리 서로간의 의견이 맞지 않았던 걸로... 오케이?”
“네. 오케이. 그럼 전 이만 가겠습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던 동훈을 따라 같이 일어서던 고 대표는 흠칫 놀라 그의 입을 긴장하며 바라보았다.
“네?”
“전 분명히 기회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딴소리하기 없기에요.”
동훈의 말에 고 대표는 의자에 털썩 다시 앉아 죽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감독님. 이러면 나 어떻게 결정하라고 그래요.”
“아니 난 괜찮다니까 그러시네.”
“방금 그 말이 그게 아니잖아요. 하여튼 다시 앉아봐요. 빨리. 얘! 미영아! 박 상무 좀 들어오라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