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스타예감(2)
처음에는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게 당연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평생 안 보고 살 사람일 수 있는데 그런데도 끝까지 갚으려고 하는 사람이 대단한 사람이지 안 그런 사람을, 그것도 성인도 안 된 학생을 뭐라 할 수 있을까 싶었다.
그렇게 핸드폰을 책상위에 던져놓고 아침에 일어나니 톡 하나가 와 있었다.
[아저씨, 죄송해요. 친구들이 장난치느라 연락 못했어요. 계좌번호 알려주시면 돈 보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친구들 사이에 소위 왕따를 당하는게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톡으로 얘기할까 하다가 일단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강호니?”
“안녕하세요. 어제 연락 못 드려서 죄송해요.”
강호의 목소리에는 미안함이 가득했을뿐 아니라 기가 잔뜩 죽어 있었다.
“아니야, 괜찮아. 친구들 장난이 좀 심했나보다, 그렇지?”
“네...”
“오늘 토요일인데 혹시 시간 있니?”
“시간이요? 왜요?”
“오늘 아저씨가 행사 하나 하거든. 거기 놀러오라고.”
“행사요? 무슨 행사인데요?”
목소리 톤이 조금 올라가는 걸 보니 확실히 학생은 학생이다.
“아저씨가 영화감독인데 오늘 배우들이랑 만나서 대본리딩을 해. 같이 참석하는 건 안 되고 리딩 전에 배우들 볼 수 있게 해줄 수 있거든. 너 여배우 차혜린 알아?”
“와, 차혜린 볼 수 있다구요?”
몇 번의 고심 끝에 황정훈과 같이 범죄를 소탕하는 경찰 역에 차혜린을 캐스팅했다.
차혜린은 분명 예쁜데도 불구하고 주연자리를 따지 못한 주조연급 배우다.
보통 주연 여배우의 연적이 되거나 남주의 죽은 옛 연인이라던가 하는 그런...
분명 드라마나 영화에서 매력적으로 나오는데 딱 한끗차이, 톱스타가 되기 위한 그 한끗이 부족했다.
그 한끗이란 바로 스타성.
스타성이 아주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시청자들이 딱 보자마자 확 홀려버리는 그 매력이 부족했기에 아직 주연자리를 못 따내고 있었다.
어쩌면 그렇기에 주연이 아닌 조연임에도 캐스팅 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감독 입장에서는 조연으로 캐스팅 할 수 있는 배우중에 가장 급이 높은 배우가 참여해줬기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응, 내가 싸인도 받게 해줄게. 한 번 놀러올래?”
“네. 그런데 제가 가도 될까요?”
자고로 남자 치고 미녀 싫어하는 사람 없고 더욱이 한창 여자에 호기심이 왕성한 고등학생이니 거부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민폐가 될까봐 묻는걸 보면 인성은 착한 녀석이 틀림 없었다.
“괜찮아. 그냥 와서 구경하다가 가.”
“감사합니다. 진짜 감사합니다.”
“그래, 주소 남겨줄테니까 절대 늦으면 안 된다. 리딩 시작하면 볼 시간이 없어. 알겠지?”
“넵.”
톡으로 시간과 장소를 찍어주고 나서 콧노래를 부르며 씻고 집을 나왔다.
청담동 샵에 가 헤어 메이크업을 마치고 나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을 만끽하며 테헤란로의 한 빌딩에 도착했다.
사무실이 작아 어디서 대본리딩을 할까 하다가 촬영장소로 대여한 이 고급스러운 업무공간에서 대본리딩을 하는 것으로 결정했었다.
며칠뒤 이곳에서 촬영이 잡혀 있어 그런제 동훈은 도착한 빌딩을 다시 한번 유심이 살펴보면서 들어섰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감독님, 오셨다! 안녕하세요.”
동훈이 들어서자 오늘 대본리딩을 준비하는 직원들과 미리 와 있던 몇몇 배우의 매니저들이 다가와 인사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유지은 팀장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오셨어요? 일단 이거... 오늘 인터뷰 순서구요. 가장 중요한건 MBS 영화사냥이란 프로그램의 최소라 리포터와의 인터뷰에요. 단독 인터뷰고 이건 질문지에요. 미리 답변할 내용 생각해두세요.”
전에 MBS의 영화사냥에서 배우들과 같이 코멘트를 한 적이 있었기에 영화사냥에서 왔다고 하니까 친숙하게 느껴졌다.
미리 답변을 준비하라길래 질문지를 확인하니 민감한 주제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다.
“별 내용 없는데요? 그냥 대답해주면 될 것 같아요.”
“네. 만약에 질문지에 없는 내용을 질문한다면, 감독님이 대답하기 꺼려질때는 그냥 그 질문은 넘어가겠다고 하시면 돼요. 억지로 대답하실 필요는 없구요.”
“그럴게요.”
“그리고 저기 저 학생은 뭐에요?”
유지은 팀장은 복도 저 끝에 열심히 고개를 돌리고 있는 덩치큰 학생을 가리켰다.
고개를 삐쭉 내밀면서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는게 나름 방해가 되지 않으려 애쓰고 있는 것 같았다.
“벌써왔네? 아, 내가 불렀어요.”
“그건 알죠. 감독님이 부르셨다고 하지 않았으면 안 들여보냈을거예요. 그런데 누군데요? 친척이에요?”
“아니... 그냥 어제 어떻게 하다가 알게 됐어요.”
“네? 어떻게 하다가 알게 됐는데 대본리딩에 불렀다구요?”
유 팀장이 괴상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는 걸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유 팀장이라고 해도 ‘미친거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쟤가 살이 쪄서 저렇게 보여도 점 자세히 살펴보면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눈빛이 선명한게 잘 생긴거 같지 않아요?”
“네? 그렇게까지 자세히 본 건 아니라서...”
“원래 남자는 T존, 그러니까 눈썹부터 눈, 그리고 코가 선명하고 뚜렸해야 잘 생겼다고 느껴지거든요. 여자는 일단 하관이 계란형으로 생겨야 매력적으로 느껴지구요. 그런데 쟤가 딱 그래요. 얼굴 형태는 두툼해서 잘 모르겠지만 눈이랑 코가 있단 남자답게 생겼잖아요? 쟤 살만 빼면 완전 장난 아닐건데...”
유 팀장이 고개를 갸웃하다가 물었다.
“그런데 매니지먼트도 하실 거예요? 아예 인재 발굴까지 하시려구요?”
“아니 뭐 그렇다기 보다... 나중에 좋은 배우 나오면 우리도 좋은 작품에 캐스팅 해서 서로 좋은 시너지를 낼 수 있으면 좋은거니까요. 그리고 너무 진지하게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냥 한번 보여만 주는 거니까.”
“흐음... 그렇다고 하기엔 감독님 말씀에 열의가 느껴지는데요? 쉽게 포기할 것 같지 않은데...”
유 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사라졌다.
동훈은 피식 웃으며 앉아서 열심히 고개만 돌리는 강호에게 다가갔다.
“왔어?”
“어? 안녕하세요.”
“앉아, 앉아. 찾는데 어렵진 않았고?”
“아니요. 쉽게 찾았어요. 버스 정류장에서 엄청 가까워서... 그런데 아까 차혜린 온다고 막 얘기들 나오던데요?”
“어, 올거야.”
“와... 장난 아니다.”
“그런데 지금 몇 학년이야? 고2? 고3?”
“고3이요.”
“그래? 수능공부해야하는데 시간 뺏은거 아니야?”
“아니에요. 집에 있으면 어차피 게임하고 만화 볼텐데 나온거예요.”
“으음, 그렇구나. 친구들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아?”
강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안 좋은건 아니구요. 그냥 뭐...”
“너 무시하는 친구들한테 진짜 제대로 된 복수 할 수 있는 방법 아저씨가 알려줄까?”
“네? 뭔데요?”
“TV나 영화에 나오는 톱배우가 되면 아무도 너 무시 못할걸?”
“에이... 제가 어떻게 배우가 되요? 말도 안 돼. 그리고 저 연기해본적 한 번도 없어요. 우리 엄마가 감독님 말 들었으면 엄청 웃었겠다.”
“아니야. 내가 널 처음 딱 보는데 마스크가 아주 카메라에 잘 받겠어. 물론 이대로는 안 되지. 살을 빼면.”
살을 빼야한다는 말에 강호가 흠칫 놀란다.
“얼마나 빼야 하는데요?”
“너 지금 몇 키로냐?”
강호는 잠시 주저하더니 말했다.
“117키로요.”
많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숨이 턱 막히기는 했다.
“어, 그래... 우리 80키로까지만 빼보자. 내가 그럼 너 캐스팅 해줄게.”
“진짜요? 근데 80키로는 너무 힘든데...”
“야, 너 아저씨가 진짜 좋은 기회 주는거야. 남들은 살을 빼면서도 ‘살을 빼면 건강해지고 외모적으로 자신감이 생길거야’라는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을 빼잖아. 그런데 넌 달라. 살만 빼면 바로 인생이 바뀔수 있는 기회를 준 거라고.”
“그런데 진짜 살만 빼면 저 배우 될 수 있는 거예요? 진짜 TV에도 나오는?”
“응. 진짜 배우 될 수 있어.”
“혹시 배우 되는데 돈 같은거 필요해요?”
걱정스레 묻는걸 보니 웃음을 참기 어려웠다.
“하하! 필요 없어, 인마. 돈 필요 없고 살만 빼 와. 그리고 나서 연기력이 필요하다 싶으면 네가 알아서 연기 학원을 다니든지 하고. 처음에는 간단한 단역부터 맡길 테니까 일단 살부터 빼.”
“연기 하면서 살 빼면 안 되는거죠?”
“안 돼. 네가 그저 그런 연기파 배우가 될 생각이면 모르겠는데 넌 내가 봤을 때 잘 생겼거든. 그럼 처음부터 잘 생겨야해. 사람들은 첫 인상을 잊어버리지 않으니까. 알겠지? 그럼 잘 생각해봐.”
더 이상 해줄 이야기는 없었다.
나머지는 강호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을 뿐.
동훈이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저 멀리 차혜린이 다가왔다.
“어머, 감독님 벌써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반가워요.”
“전에 미팅했을때보다 오늘 너무 멋져지셨어요. 평소에도 그렇게 하고 다니시지...”
“그런가요?”
“네. 너무 멋지신데요?”
동훈은 언제 자리에서 일어났는지 옆에서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강호를 슬쩍 앞으로 내세우며 말했다.
“이 친구가 혜린 씨 평소 팬이래요. 싸인 하나만 해주실 수 있을까요?”
“어머, 그럼요. 이야, 너 진짜 크다. 이름이 뭐니?”
“가, 강호요. 이강호. 누나 너무 예쁘세요.”
“아하하! 고마워.”
강호는 후다닥 가방에서 곱게 개어져 있는 후드티와 매직을 꺼냈다.
딱 봐도 오래 입은 것 같지 않은, 새것같은 옷이었다.
“누나, 여기다가...”
“옷에다가 싸인해도 되니?”
“네. 괜찮아요.”
차혜린은 강호가 소중하게 들고 있는 후드티에다 정성스레 싸인을 해주었다.
“감사합니다.”
싸인된 후드티를 가슴에 꼭 껴안고 있는게 귀여웠던지 차혜린이 강호에게 악수까지 해주었다.
물론 강호는 혜린과 악수했던 손을 틀어쥐곤 ‘씻지 않을 거야’라고 중얼거렸고.
“이따가 대본리딩할때는 안에 못 들어가니까 밖에서 보고, 갈때는 배웅해주지 못하니까 조심해서 잘 들어가.”
“네. 불러주셔서 감사했습니다.”
강호는 감격하며 꾸벅 인사했다.
이후 한 시간 뒤 진행된 대본리딩은 즐겁고 훈훈한 분위기 속에 진행됐다.
배우들은 미리 연구했던 캐릭터로 혼신의 연기를 펼쳤고 기자들은 그 모습을 담기에 바빴다.
특히 주연을 맡은 황정훈과 주혁에게 관심이 집중됐던건 당연했다.
리딩이 끝난 뒤 인터뷰가 잡힌 배우들은 남고 그렇지 않은 배우들은 스탭들과 촬영날에 보자며 사라지거나 회식을 한다며 사라졌다.
동훈은 당연히 개인적으로 잡힌 인터뷰를 소화해야 했다.
“오래기다리셨죠?”
“아니에요. 먼저 제 소개부터 드릴게요. MBS 최소라 리포터입니다. 반갑습니다.”
“저도 반갑습니다. 장동훈입니다.”
“인터뷰하게 돼서 영광입니다, 감독님. 오늘 리딩하느라 힘드셨죠?”
“제가 힘들게 있나요? 배우들이 힘들지.”
“역시 배려심이 많으시네요. 오늘 인터뷰 아주 기대가 됩니다.”
“저도 기대가 되네요.”
“사실 이번 악질형사를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새로운 세계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7백만 관객을 돌파했어요.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릴게요.”
“그냥 감사할 따름이죠. 그리고...”
질문지에 적힌 순서와 내용 그대로 진행된 인터뷰는 뻔했지만 지루하지 않게 최대한 열심히 인터뷰에 응했다.
그렇게 30여분의 인터뷰가 진행되고 질문지에 있는 모든 질문이 끝날 때 최소라 리포터가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더 물었다.
“오늘 너무 고생하셨습니다. 끝나기 전에 개인적으로 한 가지만 더 질문하도록 할게요. 감독님이 이번에 제작자로 변신하면서 관객분들은 왜 감독이 제작사를 차리는지 의아해하는 분들이 많으시거든요. 이번에 감독과 제작사 대표를 겸하면서 가장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지 말씀 좀 부탁드릴게요.”
동훈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모든 스태프에게 표준근로계약서를 쓰게 하고 일을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 제작사에서 제작하는 모든 영화는 표준근로계약서를 씀으로 해서 비상식적인 과중한 업무와 저임금의 제작환경을 점차 바꿔보려고 합니다. 물론 제가 하고 싶은 영화를 마음껏 제작할 수 있다는 것도 가장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겠지만요.”
동훈은 나름 각오하고 인터뷰를 한 건데 놀랍게도 영화계보다 애니메이션 쪽에서 더 크게 반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