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스타예감(1)
순식간에 시간이 흘러 어느덧 새해가 밝았다.
동훈과 유지은 팀장 둘밖에 없었던 사무실은 썰렁했던 분위기를 탈피해 두 명의 직원이 추가되었고 이제는 제법 사람도 많이 오갔다.
사람이 많이 오간다는 건 회사가 바쁘게 돌아간다는 것이고 당연히 DH미디어의 첫 작품이 막 시작되려하고 있었다.
“내일 단정하게 하고 오실거죠?”
유지은 팀장의 물음에 뭘 그런걸 묻느냐는 얼굴로 동훈이 말했다.
“아니 그러면 대본리딩때 거지꼴로 나타날 것 같아요?”
“감독님이 하도 안 꾸미고 다니시니까 그렇죠. 내일 기자도 셋이나 불렀으니까 아침에 샵 좀 다녀오세요. 제가 미리 청담동 윤은진 헤어살롱 예약해놨어요. 거기 아시죠?”
대한민국에서 손꼽힐 정도로 유명한 미용실인데 모를리 없다.
“거기 비싼데?”
“장동훈 감독님이시라니까 50% DC 해준다고 했어요. 회사카드로 결제하고 오시면 돼요. 아, 후줄근한 패딩 점퍼는 안 되는거 아시죠? 사진 많이 찍힐 거예요.”
“유 팀장님, 저 대본리딩 처음 아닙니다. 두 번이나 했었잖아요.”
“그 때는 마냥 감독의 신분이었지만 내일은 감독님 겸 제작자의 신분으로 가는 거잖아요. 말 하나도 조심스럽게 하셔야 하구요. 옷도 잘 입으셔야해요.”
“네, 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전 그럼 이만 갑니다.”
“네, 가서 좋은 거 딱 하나만 사오세요. 딱 하나만요!”
“들어가세요, 대표님.”
직원들의 인사를 받으며 회사를 나온 동훈은 곧장 택시를 타고 강남으로 향했다.
동훈이 가는 곳은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리는 한국컨텐츠 박람회로 웹툰, 웹소설을 소개하고 판매하는 행사인데 그냥 웹툰이나 웹소설을 좋아하는 일반인들이 관람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알고 있었다.
본래 DH미디어는 신생회사였고 동훈이 가지고 있던 돈도 많지 않았던 관계로 2차 판권을 살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 ‘악질형사’의 투자를 성공시키고 내일 대본리딩을 앞둘 만큼 회사 업무가 착착 진행되면서 은행의 대출이 가능하게 되었다.
아마 제작투자를 받지 못했다면 은행 대출을 불가능했을게 분명했다.
어쨌거나 사업자대출이 나오면서 단순히 영화 제작을 위한 자금이 아니라 회사운영 자금에 여유가 생겼고 그래서 이번 컨텐츠 박람회에 눈길이 갔던 것이다.
“와... 엄청나네.”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그런지 입구 앞에는 줄이 엄청나게 길었다.
평일이라 사람이 적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긴 줄에 입이 떡 벌어졌다.
“예약번호 불러주세요.”
“B5649요.”
미리 예약구매한 입장권으로 한참을 기다려 들어서니 너무 많은 사람들 때문에 몇 걸음을 옮기지 않아서 사람들과 어깨를 부딪칠 정도였다.
천천히 둘러보며 좋은 작품을 찾으려고 왔긴 했는데 이렇게 사람이 많고 복잡해서 작품을 살펴볼 시간이나 있을까 걱정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인파에 떠밀리듯 걸음을 옮겨갈 때 뒤에서 누가 부르는 소리가 들였다.
“저기요, 혹시 장동훈 감독님?”
뭔가 해서 뒤돌아보니 서른이 조금 넘어보이는 남자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장동훈 감독님 맞으시죠?”
“네, 그런데 절 어떻게...”
“안녕하세요. 웹툰 작가들을 매니지먼트하고 있는 ‘엔플러스’의 차희수라고 합니다. 여기...”
그는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일단 명함을 받아드니 그가 재차 자기 소개를 이어갔다.
“감독님 영화 팬이라서 전에 무대 인사하실때도 갔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렇게 뵐 줄이야... 하하하! 영화할 만한 작품을 보러 오신 건가요?”
“네. 이것저것 보려고 왔는데 사람이 너무 많네요.”
“그렇죠? 그런데 여기 오시는 관람객들 대부분이 청소년들인데 평일인데 어떻게 학교를 빠지고 왔는지 엄청 많이 왔습니다.”
그의 말처럼 지나가는 사람 둘 중 하나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그러게요. 학교 안 가고 어떻게 이 시간에 여기 있을까?”
“어쨌든 다리 아프실텐데 잠시 앉으세요. 혹시 괜찮은 작품 찾으시는 거 있으시면 저희가 추천을 좀 해드려도 괜찮을까요?”
“네. 그러죠.”
무작정 혼자서 찾다간 답도 없을 것 같아 그러기로 했다.
웹툰 작가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는지 ‘엔플라잉’ 부스는 다른 부스에 비해 조금 넓은 편으로 상당히 많은 작품을 진열해 놓고 있었다.
동훈이 부스 안쪽 아주 조그만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자 그가 시원한 콜라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밖은 추워도 여기는 사람 많고 히터는 빵빵하게 틀어놔서 더울 겁니다.”
그의 말처럼 갑갑하고 더워 점퍼를 벗고 콜라 한 모금 마셨더니 속이 시원해졌다.
“감사합니다.”
“혹시 원하는 장르가 있으세요?”
“딱히 원하는 장르가 있다기 보단 일단 중세 판타지나 초능력물처럼 일단 영화화하기 어려운 것들은 아예 볼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겠죠. 여기가 헐리우드도 아니고, 하하하!”
“헐리우드도 소화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니 사극 로맨스나 현대 로맨스, 아니면 직장물이라던지 공포물 같은거?”
“아, 뭘 말씀하시는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그는 자리를 떠난 후 한참동안 자료를 정리하더니 다시 돌아왔다.
“사실 판권계약이 체결된 사례는 많지 않고 그 많지 않은 사례에서도 정말 드라마나 영화까지 제작되는 사례는 극히 드믈긴 하지만 한번 제작이 되면 작가 명성이나 판매수익이 확 올라가니까 작가들이나 저희나 기대하고 있기는 해요.”
“그렇겠죠.”
“그래서 어지간하면 정말 좋은 작품으로 꼭 제작에 성공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일단 저희가 생각할 때 영상화하기 좋은 작품이 이거, 공포물인데 이야기가 아주 짜임새 있어서 각본을 만들 때 굉장히 편하고 좋을 겁니다.”
제목은 ‘1114호’.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공포물인 것 같았다.
“제목에서 유추하셨겠지만 아파트를 배경으로 한 공포물이구요. 주인공이 14세 남자입니다. 어리고 힘이 없기 때문에 제한된 환경으로부터 공포의 근원을 파헤치고 위기를 극복해가는 과정이 아주 스릴있게 그려진 웹툰입니다. 인기도 많고 플랫폼인 NEVER에서도 인정할 만큼 매출이 잘 나오고 있구요.”
“흐음... 괜찮은데요?”
동훈은 천천히 웹툰의 내용을 살폈다.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괴이한 일과 하나 둘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며 14세의 소년이 사건을 홀로 파헤치는 과정이 두 장의 요약본에 담겨 있었다.
“좋네요.”
“그렇죠? 사실 이걸 드라마나 영화화하게 되면 각본을 수정하시는 분들은 정말 편할 겁니다. 이야기 구조가 너무 탄탄해서 건들게 없거든요. 독자들 평도 너무 좋고, 제가 제일 처음에 꺼낸 이유가 있습니다.”
보면서 김영웅 감독이 봤었던 ‘이웃집 사람’과 ‘불신지옥’이 떠올랐다.
차희수라는 사람은 이걸 그대로 쓰면 된다고 했지만 자세히 읽어보니 약간의 판타지성 요소가 있었다.
이걸 현실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조금의 수정을 거친다면 충분히 가능할성 싶었다.
그런데 이때, 저쪽 맞은편에서 ‘우당탕’하는 책상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비명소리가 같이 들렸다.
“아악!”
“아이씨, 이게 뭐야!”
“아 쫌! ”
뭔가 해서 일어나보니 덩치큰 남학생이 상을 뒤엎고 자빠져 있었다.
아무리 플라스틱 의자이라고는 하지만 다리 하나가 부러져 있었고 남학생은 부끄러운지 빨개진 얼굴로 엉기적거리면서 일어나고 있었다.
“미안...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합니다.”
“아... 이 오타쿠 새끼, 내가 진짜 안 데리고 올라고 했는데.”
“개 쪽팔리네.”
친구들의 심한 면박에 남학생은 얼굴도 들지 못하고 부스의 직원들에게 연신 고개만을 숙였다.
부스 내 직원들도 무척 곤란한지 ‘의자 비싼건데...’라고 혼잣말을 하며 사건이 쉽게 끝나지 않을 것임을 짐작하게 했다.
사실 별로 비싸보이지 않았지만 그냥 보내면 자신이 윗 상관에게 혼날까봐 그러는 것 같았다.
결국 남학생은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돈을 꺼냈지만 부스 직원은 만 원짜리 한 장과 천 원짜리 여러장을 보고 허탈한 한숨을 내뱉었다.
동훈은 그 모습을 씁쓸히 보다가 해당 부스의 직원에게 다가갔다.
“의자 값이 얼마에요?”
“네? 아시는 분이세요?”
“아니요, 근데 제가 낼게요. 얼마에요?”
“그건 저도 확실히는 잘 모르고... 위에 물어봐야 하는건데...”
“일단 이거 받으시고 모자라면 연락하세요. 보내드릴테니까.”
동훈은 직원에게 오만 원짜리 한 장과 명함을 건네주었다.
이런 플라스틱 의자는 아무리 비싸도 5만원도 하지 않을걸 알기에 나중에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DH미디어 장동훈 대표? 어쨌든 알겠습니다. 얘, 넌 좀 조심해라.”
“죄송합니다.”
직원은 명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학생을 보내주었고 학생은 다시 원래 부스로 돌아온 동훈을 따라와 감사의 인사를 했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락처 주시면 제가 돈 보내드릴게요.”
“아니야, 괜찮아. 그냥 가도 돼.”
키도 180은 넘어 보였고 소도 잡아 먹을것처럼 덩치가 컸음에도 그 남학생은 굉장히 순해 보였다.
이상하게 어디에선가 본 듯 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런 덩치큰 남학생을 알았다면 결코 잊어버리지 않았을거란 생각에 홀로 웃음지었다.
남학생은 그냥 되돌아 가려다가 정 안 되겠는지 다시 돌아와 가방에서 노트 하나를 북 찢어 핸드폰 번호를 적고 탁자에 올려놓는다.
“엄마가 남에게 신세를 지면 꼭 갚으라고 했거든요. 꼭 연락 주세요.”
이렇게까지 하니 그냥 보내는게 더 미안한 일이다.
“그래, 알았어. 그런데 이름이 뭐야?”
“이강호요.”
“이강호? 음... 그래. 강호야, 내가 나중에 연락할게.”
“네. 감사했습니다.”
땀냄새가 진하게 풍기던 이강호는 그렇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 떠났다.
동훈은 강호가 남겨준 찢어진 종이에 이강호라고 적고 접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아니에요. 저도 어릴 때 곤란한 일을 겪었었는데 그때 전혀 모르던 분께서 도와주셨거든요. 그때 기억이 남아서 도와주고 싶었어요.”
“역시 성공하신 분들은 다르네요. 그럼 다른 작품을 보여드릴까요?”
“네, 이거 말고 로맨스 쪽으로 괜찮은거 있나요?”
“그럼요, 여기...”
이후 동훈은 다섯 개의 부스를 돌며 십여개의 작품 기획안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흐응~ 뭘 골라야 하나...”
들고 온 작품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며는데 곱게 접혀진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 이게 있었네.”
혹시 기다리고 있을지 몰라서 그 강호라는 남학생에게 톡을 보내려는 순간, 이강호라는 이름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생각났다.
“뭐야, 얘가 걔라고?”
김영웅 감독이 죽기 얼마 전, 최고의 한류스타로 떠올랐던 배우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이강빈이었다.
그리고 이강호는 이강빈의 본명이었고.
어디선가 봤다는 느낌이 그래서 들었던 건데 정말 그 잘생긴 얼굴을 가지고 왜 관리를 안 했는지...
“학생이라서 그렇겠구나. 공부하느라... 그런데 이강빈이 어렸을 때 원래 저렇게 뚱뚱했었나? 여기에서만 그런가? 취향도 다르려나?”
신세연도 그렇고 이강빈이도 그렇고 아마 매니지먼트 회사를 차리려고 했으면 떼돈을 벌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영웅 감독도 이강빈을 좋아했는데 얼굴만 잘생긴 다른 스타들과는 달리 연기력도 무척이나 출중해서 30대 넘는 장년의 연기자들과 연기해도 밀리지 않았다.
“나중에 톱스타가 된다고 하면 살을 빼려나? 힘들 것 같은데...”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살은 쉽게 빠질 그런 사이즈가 아니었기에 연기에 관심을 두라고 해야 할지 망설였다.
동훈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톡을 보냈다.
만약 아까 신세졌던 돈을 갚는다면 한번 만나볼 것이고 아니라면 그냥 지나가는 인연으로 깔끔히 포기하자고.
톡을 보내고 한 시간, 또 한 시간...
연락이 안 왔다.